2004년 4월 15일 실시 _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당신 스스로가 하지 않으면아무도 당신의 운명을 개선시켜 주지 않을것이다."
- B.브레히트
'가짜뉴스'에 속아 재검표까지
2004년 4월 15일 실시된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대한 평가가 핵심 이슈가 된 선거였습니다. 사실 2002년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노무현 당선자는 시비에 휘말렸습니다. 어이없게도 대선이 끝난 뒤 한 특수학교 교사가 올린 괴문서 <정보기관 중견간부의 양심선언>이 인터넷 상에서 확산했고, 급기야 노무현의 당선을 인정할 수 없었던 한나라당과 이회창 후보 측 지지자들은 재검표를 요구하며 2002년 12. 26. 대법원에 당선무효소송 및 증거보전 신청을 제기합니다.
결국, 2003년 1월 80개 지역, 전체 투표지의 44.5%를 대상으로 법원 직원과 일반인 4,800명을 동원해 우리나라 선거역사상 유래 없는 재검표가 실시됩니다. 그러나 재검표 결과 이회창 후보와 노무현 후보의 표 차이가 근소하게 줄어들기는 했지만 이는 투표지분류기 때문이 아니라 무효표에 대한 판정이 번복되어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한나라당은 재검표 결과를 수용하고 관련 소송을 모두 취하했습니다. 하지만 "국가정보기관이 선관위의 전자개표 시스템을 해킹해 개표 결과를 조작했다."는 내용의 가짜 문서에 속아 당선무효소송을 제기한 한나라당은 재검표 비용 5억 원을 고스란히 부담해야 했습니다.
비주류 출신 대통령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사실, 한나라당 지지자들과 이회창 후보 지지자 쪽에서는 한국사회의 주류에 속하는 자신들이 상고 출신 비주류에 속하는 노무현 후보에 패배했다는 사실을 믿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노무현 대통령은 학벌이나 정치적 입지에서 한국사회의 주류에 속하지 않았던 터라 지역주의 타파와 참여민주주의 실현, 과감한 탈권위주의 정책과 자유주의 노선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 사회의 기득권 층과 첨예하게 대립했고 그 과정에서 보수야당은 물론 집권 여당 내 보수세력과도 충돌과 대립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급기야 김대중 정권 하에서 있었던 정상회담 추진과정에서 불법 송금이 오간 정황이 드러나고 이를 수사하기 위한 대북송금 특검 요구에 노무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자 여당인 새천년민주당 내 보수세력의 불만은 폭발합니다.
기존의 보수야당의 틀로는 정치개혁이 불가능하다고 인식하는 개혁세력과 한나라당 탈당파, 개혁국민정당 등이 모여 2003. 11.11일 열린우리당을 창당하고 대통령은 이 신생 정당을 지지합니다. 2004. 1.24. 17대 총선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 신년 기자회견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열린우리당이 표를 얻을 수 있다면 합법적인 모든 것을 하고 싶다"며 열린우리당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여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의무를 위반했다는 비반을 받습니다. 새천년민주당은 이에 대통령이 선거법을 위반했다며 선관위의 조치를 요구했고, 중앙선관위는 대통령에게 공무원의 중립의무를 준수해달라는 요청을 공문으로 발송합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여기서 뜻을 굽히지 않고 야당의 사과 요구를 수용하지 않고 계속해서 열린우리당을 지지하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표명함으로써 3월 12일 마침내 새천년민주당,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에 의해 우리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됩니다.
탄핵의 역풍 속에 <열린우리당> 탄생하다
2004년 4월 15일 실시된 제17대 국회의원선거는 탄핵안 가결에 대한 역풍으로 오히려 신생정당이던 열린우리당이 152석을 차지하여 의석 과반을 확보했고, 탄핵을 주도한 1 야당 한나라당은 영남권에서 선거의 여왕으로 화려하게 등장한 박근혜 대표의 활약으로 121석을 차지하여 확고한 지역 지지 기반을 확보하였습니다. 선거전 초기만 해도 한나라당의 불법 대선자금 문제가 부각되며 한나라당은 막대한 불법자금을 수수한 '차떼기 정당'의 오명을 얻으며 선거 패배가 예측되었으나 천막으로 당사를 옮기며 박근혜 대표를 중심으로 한 당쇄신 노선이 일정 부분 국민적 지지를 얻으며 선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번 선거의 특색은 총선에서 처음 도입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로 한 사람이 2표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에 유리하게 작동했습니다. 민노당은 지역구에서는 2석을 얻는데 그쳤지만 정당별 비례대표 득표율 13%를 얻어 8석을 추가로 배정받아 총 10석의 의석을 획득했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5.16 군사정변 이후 우리 의회 역사상 최초로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이 이루어졌습니다. 민주당은 겨우 9석을 얻는데 그쳐 몰락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정당명부식 1인 2표 비례대표제
16년 만에 여대야소 정국이 부활된 이번 선거에서는 여성의원도 39명이 탄생하여 전체 의원 중 13%를 차지했고, 전체 299명의 의원 중에 초선의원이 188명에 이르러 전체 의원의 3분의 2에 달했고, 당선자 연령도 30~40대가 절반에 육박할 정도로 정치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는 변화를 보였습니다. 선거제도 측면에서는 무엇보다 국회의원 선거 사상 처음으로 1인당 2표를 행사하는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가 도입되었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밖에 고비용 선거를 유발하던 합동연설회와 정당 및 후보자 연설회가 폐지되었으며, 인터넷과 미디어를 이용한 선거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한 제도가 신설 또는 개정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기성 정치인에 비해 선거운동이 제한되어 있어 인지도 제고와 홍보에 불리했던 정치신인들이 유권자에게 자신을 미리 알릴 수 있는 예비후보자 제도가 도입된 것도 이번 선거가 처음이었습니다. 이렇게 제17대 총선이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압승으로 끝나자 헌법재판소는 5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에서 기각 결정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탄핵의 빌미가 된 대통령의 정치적 중립의무에 대해서는 정무직 공무원인 대통령도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공무원에 속한다고 판결했습니다.
아직 그의 시대가 아니었나?
노무현 정부는 민주주의와 정치적 자유의 폭을 한층 확대하였습니다. 권위주의적 제왕처럼 군림하는 대통령이기를 포기하고 탈권위와 자율성을 중시하는 정치노선을 펼쳤습니다. 여당과 국회, 사법부, 국가정보기관, 검찰과 경찰의 중립성과 자율성을 보장했으며 우리 사회의 투명성 증대, 잘못된 국가권력에 희생된 국민들의 명예와 진실을 규명하려는 과거사 청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탄핵 정국에 대한 반발로 총선에서 승리한 거대 여당 내 갈등 요소가 폭발하고, 노무현 대통령의 급격한 탈권위주의 정책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부족한 상태에서 불쑥불쑥 추진한 대연정, 개헌 제안, 행정수도 이전 문제 등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은 급락했습니다. 이에 더해 김대중 정권에서 추진한 신자유주의 노선을 폐기하지 못하고 추진한 정리해고 합법화, 파견근로제 도입 등 노동의 유연화 정책, 한미 FTA 체결 등으로 빈곤의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었고 급기야 걷잡을 수없이 치솟는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정권 말기에는 최악의 지지율을 기록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음 대통령으로는 정치적 이념보다는 물질적 풍요를 약속한 자가 등장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