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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츠뎀 Aug 06. 2020

네거티브 전략이 판을 친 선거

2007년 12월 19일 실시 _ 제17대  대통령 선거

"선거만 끝나면 노예제가 시작된다. 뽑힌 자들은 민주를 잊고 언제나 국민들 위에 군림했다." 

- 애덤스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던 2007년 집권 말기 노무현 정부의 지지율은 거듭된 부동산 정책 실패와 빈곤의 양극화로 상당히 저조해 10%대로 바닥을 기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의 물질적, 상대적 박탈감은 극에 달했고 이런 사회분위기는 당시 유행하던 인사말 "대박 나세요."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17대 대선 직전 이런 사회 상황에서 '경제 대통령'을 표방하고 나선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손쉬운 당선은 이미 점쳐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더해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속절없이 떨어지는 지지율 속에서 탈당과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2007년 8월 5일 통합민주신당으로 집결했지만 야당 후보에 맞설 강력한 후보를 내세울 수 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2006년 실시된 제4회 지방선거에서도 야당인 한나라당이 호남과 제주를 제외한 12곳의 광역단체장 선거를 휩쓸어 대선 승리의 전망을 더욱 높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측은 이변 없이 적중합니다.



여당인 대통합민주신당은 경선 과정을 예비경선과 본경선으로 나눠 먼저 예비경선에서 5명의 후보자를 선출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국민경선을 실시하는 이른바 '컷오프' 방식을 채택하여 유시민, 한명숙, 손학규, 정동영, 이해찬 후보가 경합을 벌였으나 실제는 손학규 후보와 정동영 후보의 대립으로 압축되었습니다. 경선 절차에 대한 불복과 의혹 제기로 우여곡절이 많았으나 결국엔 정동영 의장이 여당의 대선 후보로 최종 선출됩니다.



17대 대선에 출마한 후보자들

야당인 한나라당은 50%을 웃도는 높은 정당 지지율에 비춰 볼 때 경선 승리가 본선 승리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경선 절차는 선거인단과 일반 여론조사를 8대 2의 비율로 반영해 최종 후보를 결정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당내에서는 '선거의 여왕'으로 불리며 연달아 선거 승리를 주도해온 박근혜 후보가 인기가 높았다면, 당 외부에서는 일반국민들에게는 대기업 현대건설 CEO 출신이자 서울시장으로 재임 당시 청계천 복원사업을 성공적으로 주도한 이명박 후보가 인기가 높았습니다. 경선 과정에서 이명박 후보의 취약점이었던 BBK 주가조작 문제와 부동산 투기 의혹, 도곡동 땅 문제 등이 붉거 졌지만 이명박 후보가 일반 여론조사에서 앞서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로 최종 결정됩니다.  그밖에 민주당의 이인제 후보, 민노당의 권영길 후보, 창조한국당의 권영길 후보를 비롯해 총 10명의 후보자가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나섰습니다. 무소속의 이회창 후보가 다시 한번 대선에 도전한 것도 눈길을 끄는 대목입니다.


17대 대선 투표용지와 기표기구


이번 선거는 87년 체제 수립 이후 노태우-김영삼의 보수정부 10년, 그 후 김대중-노무현의 진보정부 10년을 모두 경험한 국민들이 정권교체를 선택할 것인가, 정권연장을 선택할 것인가가 문제인 선거였습니다. 즉 이번 선거는 선거를 통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수준이 이제 절차적 민주화의 단계를 넘어 민주주의 제도가 순조롭게 작동하는 공고화의 단계로 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선거였습니다. 그리고 국민들은 결과적으로 진보정권에서 보수정부로 정권교체를 선택했습니다. 

 


선거전략은 마지막까지 네거티브 선거운동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이른바 BBK 주가 조작 의혹, 위장전입, 탈세 의혹, 부동산 투기 의혹, 자녀 병역문제와 비자금 의혹 등 후보자 간 상호비방과 의혹 제기가 잇달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 결과는 예측을 빗나가지 않고 야당 후보인 이명박 후보의 압승으로 끝났습니다. 최종 투표율은 63.0%로 나타나 역대 대통령 선거 사상 최저를 기록하였고,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48.67%를 획득하여 22.6%를 득표한 정동영 후보를 누르고 제17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역대 대선 투표율과 득표율



경제 대통령, 경제성장과 경제대국을 약속했던 이명박 정부의 실상은 공약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대통령 재임기간 중에 경제성장률 7% 달성, GDP 4만 달러 도달, 세계 7대 경제대국 입성이라는 이른바 '747'공약은 이륙도 못하고 추락하고 말았고, 토목사업 중심의 경기부양책으로 추진된 4대 강 개발 계획은 환경파괴와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을 뿐 경제의 파급효과는 미미했습니다. 결국 이명박 정권 하에서 비정규직과 청년실업률이 극대화됩니다. 


이명박 후보 선거유세


이명박 정권은 출범 초기부터  정부 각료 중에 부동산 투기로 재산을 증식한 부유층이 많이 국민적 위화감을 샀고 이른바 '강부자(강남땅부자)' 정권이라는 조롱을 받아야 했습니다. 2008년 총선 승리 후  미국과 체결한 쇠고기 협정이 광우병  파동을 불러일으켜 전국적으로 촛불시위가 전개되었습니다. 이 촛불 시위는 이명박 정부의 6월 민주항쟁 21주년을 맞이해 그 규모가 크게 늘었고, 시위 대처 과정에서 보여준 정부의 폭력 시위 진압과 소통 부재는 이명박 정권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광우병 파동과 이어진 촛불시위에서 표출된 국민적 반대 때문에 '한반도 대운하 사업'을  추진할 수 없게 되자 이명박 정부는 이를 축소하여 '4대강 개발사업'으로 추진했습니다. 잇단 실정과 비민주적 정부운영으로 지지도가 하락하자 이명박 정부는 검찰 등 공권력을 대거 동원해 노무현 전 대통령과 그 측근 비리에 대한 대대적 수사를 벌였고, 결국 굴욕적인 수사방식과 모욕주기를 견디지 못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9년 5월 고향 봉하 마을에서 투신자살하고 맙니다. 



인간 노무현의 죽음으로 국민들은 이명박이 제시한 성장제일주의의 허상에서 일정 부분 깨어났으며 곧바로 들이닥친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경제성장률은 답보하고 GDP도 노무현 정부 때와 비교해 나아진 것이 없었습니다. 성장률은 답보된 상태에서 가혹한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만 도입해 노동시장에서는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체감 실업률은 2011년 두 자릿수, 청년 실업률은 22%에 달하는 등 정부가 약속한 '747 정책'은 온 데 간데없고 양극화만 심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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