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과 불행의 모순
책 <모순> - 양귀자
p.8 우리들은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납득할 수 없어한다.
p.22 인생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나의 인생에 있어 '나'는 당연히 행복해야 할 존재였다. 나라는 개체는 이다지도 나에게 소중한 것이었다. 내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해서 꼭 부끄러워할 일만은 아니라는 깨달음, 나는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그랬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내가 내 삶에 대해 졸렬했다는 것, 나는 이제 인정한다. 지금부터라도 나는 내 생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되어 가는 대로 놓아두지 않고 적절한 순간, 내 삶의 방향키를 과감하게 돌릴 것이다. 인생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를 걸고라도 탐구하면서 살아야 하는 무엇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p.42
아버지의 삶은 아버지의 것이고 어머니의 삶은 어머니의 것이다. 나는 한 번도 어머니에게 왜 이렇게 사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것은 아무리 어머니라 해도 예의에 벗어나는 질문임에 틀림없으니까.
p.82
해질 녘에는
절대 낯선 길에서 헤매면 안 돼.
그러다 하늘 저켠에서부터
푸른색으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프거든.......
p.98
나는 왜 갑자기,
어딘가에서 그 남자의 냄새나는 양말을
깨끗이 빨아놓고 잠들 수도 있다고,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까.......
p.122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p.173
삶은 그렇게 간단히 말해지는 것이 아님을 정녕 주리는 모르고 있는 것일까.
인생이란 때떄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리는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p.176
"세상은 네가 해석하는 것처럼 옳거나 나쁜 것만 있는 게 아냐.
옳으면서도 나쁘고, 나쁘면서도 옳은 것이 더 많은 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야.
네가 하는 박사 공부는 그렇게 단순한 지 모르겠지만, 내가 살아보는 삶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어. 나도 아직 잘 모르지만."
p.182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상처는 상처로밖에 위로할 수 없다.
p.208
사랑이란 그러므로 붉은 신호등이다.
켜지기만 하면 무조건 멈춰야 하는,
위험을 예고하면서 동시에 안전도 보장하는
붉은 신호등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에 관한 세 가지 메모.
사랑이란,
집에서나 회사에서나 거리에서나, 비어있는 모든 전화기 앞에서 절대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전화의 구속은 점령군의 그것보다 훨씬 집요하다. 사랑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전화란 단 두 가지 종류로 간단히 나눌 수 있다. 전화벨이 울리면 그 혹은 그녀일 것 같고, 오래도록 전화벨이 울리지 않으면 고장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이란,
버스에서나 거리에서 또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유행가의 가사에 시도 때도 없이 매료당하는 것이다. 특히 슬픈 유행가는 어김없이 사랑하는 마음에 감동의 무늬를 만든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의식적으로든 혹은 무의식적으로든 이별을, 그것도 아주 슬픈 이별을 동경한다. 슬픈 사랑의 노래들 중에 명작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유행가는 차마 이별하지는 못하지만 이별을 꿈꾸는 모든 연인들을 위해 수도 없는 이별을 대신해준다. 유행가는 한때 유행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을 시작한 사람들에게 되물림되는 우리의 유산이다.
사랑이란,
발견할 수 잇는 모든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지 않고 무심히 지나칠 수 없게 만드는 무엇이다. 자신의 얼굴에 대해 생애 처음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나. 자신의 눈과 코와 입을 그윽하게 들여다보는 나. 한없이 들여다보는 나. 그리고 결론을 래니다. 이렇게 생긴 사람을 사랑해준 그가 고맙다고. 사랑하지 않고 스쳐 갈 수도 있었는데,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걸음을 멈춰준 그 사람이 정녕 고맙다고.
p.212
솔직함보다
더 사랑에 위험한 극약은 없다.
죽는 날까지 사랑이 지속된다면
죽는 날까지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절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지 못한 채 살게 될 것이다.
사랑은 나를 미화시키고 왜곡시킨다.
사랑은 거짓말의 감정을
극대화시키는 무엇이다.
p.218
사랑은 그 혹은 그녀에게 보다 나은 '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으로 시작된다.
'있는 그대로의 나'보다 '이랬으면 좋았을 나'로 스스로를 향상시키는 노력과 함께 사랑은 시작된다.
솔직함보다 더 사랑에 위험한 극약은 없다. 죽는 날까지 사랑이 지속된다면 죽는 날까지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절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지 못하며 살게 될 것이다.
사랑은 나를 미화시키고 나를 왜곡시킨다. 사랑은 거짓말의 유혹을 극대화시키는 감정이다.
p.227
세상의 숨겨진 진실들을 배울 기회가 전혀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그것은 마치 평생 똑같은 식단으로 밥을 먹어야 하는 식이요법 환자의 불행과 같은 것일 수 있었다.
p.229
단조로운 삶은 역시 단조로운 행복만을 약속한다. 지난 늦여름 내가 만난 주리는 바로 이 진리의 표본이었다.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내게 가르쳐준 주리였다. 인간을 보고 배운다는 것은 언제라도 흥미가 있는 일이었다. 인간만큼 다양한 변주를 허락하는 주제가 또 어디 있으랴.
p.256
인생은 짧다. 그러나 삶 속의 온갖 괴로움이 인생을 길게 만든다.
p.269
너무 특별한 사랑은 위험한 법이었다. 너무 특별한 사랑을 감당할 수 없어서 그만 다른 길로 달아나버린 내 아버지처럼, 김장우에게도 알지 못하는 생의 다른 길이 운명적으로 예비되어 있을지 몰랐다. 지금은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알아도 어떻게 할 수 없겠지만, 사랑조차도 넘쳐버리면 차라리 모자란 것보다 못한 일인 것을.
p.295
인간에게는 행복만큼 불행도 필수적인 것이다. 할 수 있다면 늘 같은 분량의 행복과 불행을 누려야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라고 이모는 죽음으로 내게 가르쳐주었다.
p.296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느 그렇게 믿는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일 년쯤 전, 내가 한 말을 수정한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p.303
우리들 모두, 인간이란 이름의 일란성 쌍생아들이 아니었던가 하는 자각. 생김새와 성격은 다르지만, 한 번만 뒤집으면 얼마든지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일 수 있는 우리.
새삼스런 강조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란 누구나 각자 해석한 만큼의 인생을 살아낸다. 해석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사전적 정의에 만족하지 말고 그 반대어도 함께 들여다볼 일이다. 행복의 이면에 불행이 있고, 불행의 이면에 행복이 있다. 마찬가지다. 풍요의 뒷면을 들추면 반드시 빈곤이 있고, 빈곤의 뒷면에는 우리가 찾지 못한 풍요가 숨어있다. 하나의 표제어에 덧붙여진 반대어는 쌍둥이로 태어난 형제의 이름에 다름 아닌 것이다.
p.306
우리들 삶의 내면을 들여댜보면 모든 것이 모순투성이었다. 이론상의 진실과 마음속 진실은 언제나 한 방향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모순>은 무엇을 따라도 모순의 벽과 맞닥뜨려지는 인간과 삶에 관한 진술이었다. 세상의 일들이란 모순으로 짜여있으며 그 모순을 이해할 때 조금 더 삶의 본질 가까이로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p.307
모든 것이 너무 갑작스레 변해버린 요즘, 불안하고 당황스럽기만 한 시절에, 소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용기를 잃고 주저앉은 사람들에게 무언가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어 이 소설을 시작했으나, 모순으로 얽힌 이 삶은 여전히 어렵기만 하다.
1998년 여름
양귀자
친구가 추천해 준 책을 통해 양귀자 작가님을 알게 되었고, 그 책을 읽을까 했지만 서점에서 손이 끌린 건 바로 이 책이었다. 책 뒷 표지에 적힌 세 문장과 책을 얼핏 들춰 보았을 때 눈에 들어오는 몇몇 문장들이 있었다. 삶에 대한 깊이가 느껴졌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고, 이야기가 정말 탄탄했다. 쉽게 몰입했고, 인물의 설정과 사건들은 하나같이 모두 이 책의 제목을 가리키고 있었다. 모순.
삶이 모순적이라는 것은 삶은 곧 단편적이지 않다는 이야기로 생각된다. 우리 눈앞에 마주하는 일들과 내가 직접 겪는 일들과 감정들이 모두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이 모순을 이해하게 될 때 더 많은 삶의 이면들을 볼 수 있고, 그것이 진정으로 삶과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 아닐까. 이것은 곧 작가의 말처럼 얼마만큼의 인생을 살아낼 것인가로 귀결되는.
사랑에 있어서 안진진의 선택은 예상치 못했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결국은 살아봐야 인생이라는 것을 조금 더 알게 될 수 있을 것 같다.
22.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