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떠난 첫 일본 여행 - 4월의 도쿄 (3)
어제부터 스멀스멀 일이 터지기 시작해,
노트북, 폰으로 일 처리하랴 나갈 준비하랴 분주했던 아침.
그래도 무사히 오전 11시쯤에는 숙소를 나올 수 있었고, 가마쿠라 역에도 잘 도착했다.
에노덴(전철)을 어떻게 타고, 어느 동네를 갈 지를 정하지 않고 와서 잠시 갈팡질팡 하기도 했지만,
일단 에노덴을 타고 보기로 했다.ㅎ
급하게 인터넷을 찾아본 결과, 무조건 전철 맨 앞을 타는 것을 추천해서 역 끝 플랫폼에서 줄을 서서 기다렸으나,,
내가 서 있는 곳은 전철 맨 뒤칸 이었다. ㅎㅎ
바보다.
거꾸로 된 풍경을 보고 있지만 그래도 좋은 걸.
앞이든 뒤든 전철 양 끝칸만 타면 넓직한 창문 너머로 탁 트인 가마쿠라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오늘의 날씨는 행운의 요정이 찾아왔나봐!
지금 4월이야! 라고 외치는 듯한 풍경.
이렇게 좁은 골목길 사이로 다니는 전철을 타고 여러 동네를 누빌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 속의 한 장면 같았다.
에노덴을 타고 첫번째로 내릴 곳은 가마쿠라 코코마에역으로 결정.
슬램덩크 배경지라고 하는데.
블로그에서 본 사진들이 기억에 남아 들러야 겠다고 생각했다.
드넓은 바다가 보인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보이는 풍경.
여기서 사진 찍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럴만도.
에노덴이 지나갈 때를 맞춰 찍으려고 기다리는 사람들도 많다.
길을 건너 바다를 한 발짝 더 가까이에서.
모래사장은 맛보기 정도 했다.
아무래도 에노덴 지나갈 때 사진 건지기는 불가능할 것 같은데.
사람들 찍는건데..? ㅋㅋ
가마쿠라 코코마에 역에서는 위 사진들의 풍경을 본 게 거의 다였다.
벌써 에너지가 떨어져서 어디라도 들어가 앉아있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카페들이 많은 하세 역으로 바로 이동하기로 결정.
하지만, 극P인 나는 이나무라가사키 역에 내리게 된다..
왜냐하면 에노덴이 그 역에 너무 오래 정차해 있었고, 그래서 갑자기 내려서 좀 걸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그렇게 천천히 걸어가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빛나는 풍경들과 보물같은 장소를 만날 수 있었다.
하세역으로 향하는 어느 골목길의 풍경.
빼곡히 핀 라일락의 향이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너 뭐야,,인형이냐..
진짜 강아지다..
저기 바구니 같은 곳에 저렇게 앉아서 엉엉ㅠ
에노덴이 다니는 이 좁은 철도가 가마쿠라를 대표하는 풍경이 아닐까 싶다.
화분히 옹기종기 자리한 어느 카페.
이 날은 닫혀 있었지만.
안동의 우리 집과 엄마 아빠가 생각나는군!
식물을 키우는 기쁨은 생각보다 크다.
해준 것도 별로 없는데 어린 잎을 돋아낸 모습을 보면 그렇게 기특할 수 없다.
나도 누군가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다.
식물은 어떻게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걸까.
작은 생명이라도 그 힘은 대단하다.
에노덴!
색 조합도 어쩜 저리 예쁜지.
지금의 계절과 꼭 어울린다.
에노덴이 지나갈 때가 오면,
철도에 빨간 신호등이 켜지고,
달리던 차도, 자전거도, 걷던 사람도 모두 멈추고 전철이 다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앞에서 보면 이런 모습.
다시 이 풍경을 찍던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
내가 걸어온 길.
길가에 핀 꽃들에도 꼼꼼히 눈길이 갔다.
전철을 타고 이 길목을 통과할 때는 다른 시공간의 세계로 이동하는 기분이었다.
묘지가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나요.
얼마전에 알쓸신잡을 다시 봤는데, 여행지마다 묘지를 꼭 들른다는 김영하 작가님이 생각났다.
저 묘지에도 앉아서 쉬어가는 사람이 있었다.
아마도 저 자전거의 주인일 것 같았다.
사랑하는 빵집..
가마쿠라 빵집의 모습은 이렇다.
그 맞은 편에 빵을 굽는 공간과 운영 중인 카페가 있었는데 한번 슥 보고 가기라도 할까 해서
용기를 내 카페로 향하는 화살표를 따라 골목길로 들어갔다.
그리고 우연히, 바다로 향하는 길과 또다른 카페를 발견.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카페였다.
마침 도쿄에서 한 끼는 먹어보고 싶었던 브런치 메뉴가 있는 카페.
무려 팬케잌!ㅠㅠ
야외 테라스에 앉았다.
테라스에 앉아서 맛있는 것 먹으면 얼마나 행복하게.
앞 테이블에는 여자 세 분이서 이야기가 쉬지 않고 흘러나오는 듯 했다.
여유로운 오후 시간을 보내시고 계시는 군요.
이곳에 사시는 분들이라면 부럽습니다..많이요,,
이곳에서만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말차 팬케잌으로 주문.
비주얼 뭐야. ㅠㅠ
함께 주문한 커피도 곧 나와서 같이.
오트 크림이 올려진 커피였다.
너무 달지 않고 맛있었다.
팬케잌은 말차 맛이 적당히 진했다.
한국에서도 팔아 주세요..
팬케잌 좋아! 브런치 좋아!
주말에 아침과 점심 사이 즈음에 종종 브런치 메뉴 시켜 먹으면 행복해진다.
주말의 여유가 생생히 느껴지는 기분이랄까.
일상의 이런 소소한 행복들을 발견하고 실천할 때 나는 잘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잘 살고 있다는 건 그런 의미다.
대단한 성취나 결실 보다는,
내게 주어진 시간을 충실히 누리고 있다는 느낌.
나와 주변 사람들을 챙길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삶,
훗날 돌이켜 봤을 때 작은 행복들로 촘촘히 채워진 삶이면 좋겠다.
커피 한 모금.
생각보다 가마쿠라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졌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풍경.
거의 5시가 되어서야 가마쿠라를 떠날 수 있었다.
이제 기치조지로 이동.
아쉽게도 7시에 문 닫는 가게들이 많아, 가고 싶었던 곳들이 하나 둘 문을 닫고 있었다.
급한 대로 두 곳 정도만 둘러보고, 친구들에게 선물할 일러스트 포스트잇을 샀다.
지난 건축박물관에서 기념품을 샀어야 했어..계속 후회 중,,
순발력과 결정력이 부족하다. 역시 결정장애야.
팬케잌 먹은 지 많이 안 되었는데 왜 갑자기 또 힘이 빠지는 것인지 아는 사람,,
결국 근처 '미도리스시'에 갔다. 웨이팅 걸어 놓고. 백화점? 상가 안에 있었는데 한 바퀴 둘러보고 오니 들어갈 수 있었다.
여러모로 운 좋은 여행.
장어가 제일 맛있었다. 장어 왜 저렇게 큰가요.
익숙한 초밥들과 김말이는 야무지게 다 먹고, 계란도 빵처럼 맛있었다.
우니와 알이 올라간 초밥, 생소한 회가 올라간 초밥은 손을 대지 않았지만,
나름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이렇게 여행 마지막 날 일정도 마무리.
숙소 근처 지하철역에 내려 걸어가는 길에는 로손 편의점에 들러 마지막 날로 미뤄 두었던 청포도맛 호로요이와 아이스크림, 내일 아침에 간단히 챙겨 먹을 요거트를 샀다.
숙소에 돌아가서는 언니나 엄마와 보이스톡을 하고, 하루 동안 못했던 한국말들을 쏟아낸 후에 잠드는 게 이번 여행의 일과였다.
여행 둘째날과 셋째날에는 욕조에 숙소 어메니티로 제공된 히노끼 향과 말차 향의 입욕제를 풀어 놓고 휴대폰으로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 놓고 가져온 소설을 읽기도 했다.
노곤해진 몸으로 나와 다른 불은 모두 꺼두고 책상의 작은 스탠드를 켰다. 다이어리에서 오늘의 날짜를 펼쳐, 감기는 눈을 겨우 뜬 채 나만 알아볼 수 있는 글씨로 페이지 한 바닥을 빼곡히 채우고 나서야 배게에 머리를 뉘었다.
그러고도 잠깐 동안 휴대폰 화면은 꺼지지 않았다.
마지막 날 여행을 하면서 느낀 점은, 방향만 잃지 않으면 된다는 것.
정해진 길대로 가지 않아도 된다.
가다가 궁금한 곳이 있으면 잠시 다른 길로 빠졌다 가도 된다.
그리고 다시 원래 가려던 곳으로 가면 된다.
그러니까 열심히 흔들려도 된다.
더 열심히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고. 들어가 보고.
그러다 보면 여행 중에 우연히 발견하게 된 카페처럼 보물을 찾게 되기도 하고.
그곳에 잠시 머무르다 갈 수도 있고. 그럼 잊지 못할 추억이 하나 더 생기는 것이다.
계획대로 가지 않는 건 빼기가 아니라 더하기가 되는 일 아닐까.
계획에서 벗어날 때만 볼 수 있는 것들도 존재한다.
그럴 때 새로운 길, 나만의 길이 쓰여지기도 한다.
예측 불가능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 보면 나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삶의 목적지는 정해두되,
그 안에서 자유롭게 이곳저곳을 누비며 살 것이다.
느리게 가더라도 다양한 길을 품은 사람이 되고 싶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않고,
여행하는 사람으로 살다 가야지. 한낱 여행자로.
매일 새롭게 태어나는 삶을 살아가야지.
도쿄에서 돌아온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 벌써 다시 가고 싶다.
언제 갔다 오기라도 한 듯 친근한 도시였다.
다음엔 조금 더 오랫동안 여유롭게 머무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여행을 통해 넓은 세상과 다양한 사람들을 보며,
나는 굉장히 작은 존재임을 느낄 수 있었고,
그와 동시에 조금 더 자유로워졌다.
지금 발을 딛고 서 있는 여기, 일상에서도 그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혼자 떠나길 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