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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세희 Feb 02. 2020

그대의 모양, <셰이프 오브 워터>

영화 셰이프 오브워터: 사랑의 모양 리뷰


 배우 김무열이 아내인 윤승아를 만나던 시절, SNS를 통해 그녀에게 개인적으로 보내려던 짤막한 고백을 실수로 공개로 게재했고 이 취중고백이 한동안 인터넷에서 큰 이슈가 됐던 적이 있다.


술 마신 깊어진 밤에 네가 자꾸 생각나고 네 말이 듣고 싶고 네 얼굴이 궁금해. 전화하고 싶지만 잘 까 봐 못하는 이 마음은 오늘도 이렇게 혼자 쓰는 메시지로 대신한다. 너라는 변수를 만난 나는 너무나도 내일이 불완전하고 어색하고 불안해. 반이었던 김무열의 내일을 그렇게 만드는 너는 정말로 이젠 날 하나로 만들 건가 봐. 잘 자요. 오늘은 괜히 어렵게 말만 늘어놓게. 보고 싶어. 이 한마디면 될 걸...


 나는 문뜩 생각나면 종종 보곤 할 정도로 이 글을 정말 좋아한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찾아오는 변화에 호기심을 가지고 두려워하지만 그를 통해 설렘이라는 감정을 느낀다. 김무열이 남긴 이 취중고백에서는 바로 그런 순간의 감정이 솔직하게 묻어난다. '너라는 변수'는 그 어떤 표현과 미사여구보다도 이러한 감정을 적절하게 담아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너라는 변수. <셰이프 오브 워터>는 누군가에게 어느 날 찾아온 변수, 그것도 조금 특별한 변수에 대한 이야기이다.



 <셰이프 오브 워터>의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의 작품 내 세계관은 대게 현실과 판타지가 경계 없이 아우르는 양상을 보인다. <셰이프 오브 워터>  또한 그러한 작품 중 하나다. 엘라이자의 목에는 깊은 흉터가 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말을 하지 못하는 언어장애인이다. 심지어 고아로 태어나 곁에 있는 사람이라곤 친구 젤다와 자일스가 전부인 엘라이자는 미국 정부 산하 연구소에서 청소부로 일하며 평범한 나날을 보낸다. 그런 그녀에게 찾아온 변수는, 남미에서 포획돼 연구소까지 끌려온 '어인'이었다.


 호기심이라는 자석에 이끌려 유리를 두고 서로 눈을 마주한 두 사람 사이에서는 알 수 없는 기류가 흐른다. 엘라이자는 자신을 경계하는 어인에게 달걀을 건네고 수화로 '달걀'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동진 평론가의 해석을 빌리자면, 영화 속에서 달걀은 지속적으로 로맨티시즘과 에로티시즘을 나타내는 오브제이다. 물속에 있는 달걀이 뜨겁게 가열되고 두 사람은 익힌 계란을 나눠 먹으며 가까워진다. 마지막 장면에서 엘라이자와 어인은 수중에서 서로를 껴안는다. 마치 물속에 있는 계란이 가열되며 고체 형태로 완전하게 원형의 모양을 이루는 것처럼, 두 사람은 마침내 하나의 형태를 이룬다.



 <셰이프 오브 워터>는 1960년대, 미국과 소련의 우주 경쟁을 주 배경으로 삼고 있으며 당시에 만연하던 각종 차별에 대해서도 잘 다루고 있다. 주인공인 엘라이자와 어인부터 '남 다른 존재'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그녀의 친구인 젤다, 자일스 모두 소수자에 해당한다. 게다가 반동 인물인 스트릭랜드의 인물상은 가부장제 사회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영화의 중반부에 들어서는 영화의 색감이 그런 분위기를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트릭랜드의 가족이 등장하는 장면은 영화 속 장면 중 가장 화려한 장면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시 유행하던 레트로 풍의 화려하고 다채로운 디자인과 색감이 눈을 가득 채운다. 이 연출을 제외하면 영화는 전반적으로 짙은 녹색의 배경이 주를 이룬다. 그래서인지 현실에 있으면서도, 동화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 속에는 가라앉을 것만 같은 무게감이 담겨있다. 때문에 짙은 녹색의 색감이 전달하는 분위기는 주인공 엘라이자의 아름답고 단조롭지만 보잘것없는 특유의 풍채를 가미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영화에 더욱 애착이 가는 거지만.



 아무 허울 없이 오로지 '나'라는 존재를 바라봐주는 누군가에 대한 경험은 판타지와 같은 이상적인 이야기이면서도 실제로 우리가 겪는 현실이기도 하다. 엘라이자와 어인이 사랑을 통해 하나의 형태를 이룬다. 이 형태를 이루기까지의 과정은 진부하지만 아름답다. 어쩌면 엘라이자의 목에 있던 흉터는 엘라이자 또한 양서류 인간이었지만 단지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니면 물속에서 어인과 함께 사랑을 나눈 경험에서 은연중에 발현된 그녀의 욕구가 어인의 능력 덕분에 목에 있는 흉터가 아가미로 변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일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간에, 그녀와 어인 서로의 사랑으로 이뤄낸 형태라는 게 중요한 대목이 아닐까.   


 이 영화의 국내판 정식 명칭은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으로 사랑의 모양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개봉 전, 대부분의 팬들은 '물의 형태'라고 언급하는 추세였지만 영화 자체가 상업보다는 예술에 가까워서인지 배급사 측은 흥행의 문제로 타이틀을 보다 직관적인 명칭으로 변경한 듯하다. 그렇지만 나는 이 부분이 굉장히 안타까웠다. 영화의 마지막에 나레이션으로 나오는 시가 이 영화의 대미를 장식한다고 볼 수 있는데, 시에서는 사랑을 언급하긴 하나 첫 행부터 '그대의 모양 무엇인지 알 수 없네,'(Unable to perceive the shape of you,)라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사랑은 두 사람을 하나의 형태를 이루게 하는 그 자체이지만, 그것이 모양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모양은 중요하지 않다.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모양 무엇인지 알 수 없네,
내 곁에는 온통 그대 뿐.
그대의 존재가 사랑으로 내 눈을 채우고
내 마음 겸허하게 하네,
그대가 모든 곳에 존재하기에...


 '형태가 없고 내 곁을 완전히 감싸고 모든 곳에 존재한다.'라는 시의 내용을 은유적으로 빗대어 표현한 것이 '물의 형태'(Shape of Water)이다. 그게 바로 이 영화의 제목이 물의 형태인 이유이다.


 나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작품을 정말 좋아해 왔던지라 제작 초기 단계부터 이 영화를 눈여겨보아왔기에 아카데미 상을 시상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기뻤다. 이민자로서의 삶에 대해서 언급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수상 소감을 생각 하면 이 작품의 상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잘 알기에 더욱 마음이 뭉클해지기도 했다. 또한 미국의 현 정권이 트럼프라는 생각하면 이 영화의 흥행이 참 시의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별과 혐오로 점철되는 세상 속에서 원론적이고 순수한 감정으로 누군가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 이 영화는 나에게 꽤 깊은 의미가 있다. 나에게 있던, 있는, 있을 너라는 변수는, 그대의 형태는 어떨까. 늦은 새벽 곰곰이 머리를 뒤적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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