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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선 Oct 23. 2022

천년만에 숲에 다녀온 사람

웬만하면 도토리 주워오지 맙시다


멀지 않은 곳에 그 정도의 숲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살았다. 흔한 등산복에 스틱을 장착한 중년들이 눈에 자주 띄어도 나와는 먼, 한가한 취미쯤으로 여겼었나 보다. 하지만 '인연의 시작'이 사람 사이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확인시켜주는 일이 일어났다. 코로나 이후 평일에도 주어진 자유로운(?) 시간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이 가을 내 발길은 저절로 산으로 향해 찬란한 순간들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가을산에 오를 수 있는 내 건강한 몸과 마음의 여유가 더없이 고마운 일이었다.


나는 비교적 어디에 쉽게 빠져드는 타입이 아니다. 그때는 운명인 줄 알았던 문학 동아리'시절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사랑'의 감정일까? 의심하느라 서로에게 싹튼 그 귀한 감정에 올인하지 못했다.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한 채 혼자 전전긍긍하다가 고백하려던 순간 첫사랑을 후배에게 빼앗겼던 기억. 나만 모르고 온 동아리가 다 알았던 나의 어설픈 연애가 이제와 생각하면 쫌 귀엽기도 하다.


결혼을 하고 시간이 꽤 흐른 후에도  어느 땐 가끔 그 친구가, 아니 그 상황들이 떠오를 때가 있었다. 노래 가사처럼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다면 불러 세워놓고 꼭 묻고 싶었다.

"그때는 왜 그렇게 못되게 굴었냐? 너는 진짜 나보다 그 애가 더 좋아서 그런 거냐? " 등등

아마도 그는 '네가 더 못되게 굴었었다'라고 말하려나. 아무튼 그 시답잖은 '연애'가 남긴 상흔이 꽤 깊었는지, 실패한 연애에 대한 내 태도가 자못 집요하다는 생각마저 들었었다. 다 지난 옛이야기를 새삼 늘어놓는 이유는 빠져들지 못하는 의심 많은 성격이 결국 실패한 첫사랑의 경험을 안겨주었다는 것이기도 하다.

첫 산행을 시작하던 날 잣나무를 안아보았다.


그런데 요즘 들어 나는 아무래도 산에 빠져들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한 번 다녀온 이후로 아무 때나 그 숲이 그리워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빠져듬은 스스로 권장하고 싶을 만큼 건강하고도 평화로운 기분을 선물해주기에 기어코 그렇게 되고 싶다. 2주 사이에 세 번을 다녀온 그 숲. 한 번은 혼자서 두 번은 동행과 함께 였다.


첫 산행, 해그늘을 지고 있는 키 큰 잣나무 숲에 들자 은은한 향기가 바람결에 느껴졌다. 바스락바스락 무언가 날쌔고 가벼운 물체가 낙엽을 밟으며 재빠르게 높은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것은 '청설모'였다. 대체 얼마 만에 보는 무해하고도 가벼운 움직임이었던가. 왜 '숲'을 지칭하며 '고요한' '아늑한'이라는 수식을 붙이는지 완전히 이해할 것만 같았다.



두 번째 산행, 우리는 본격적으로 오르기 전 나지막하고 둥근 평지를 만났다. 서둘러 올랐기에 시간을 정오를 넘겼고 햇빛은 우리의 정수리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 아담하고 아늑한 공간을 보자 요가 수련이 하고 싶어졌다. 매트도 없고 달랑 손수건 한 장. 맨땅에 헤딩이라고 해야 할까? 머리 서기 자세를 하는데 얇은 손수건을 통해서 전해져 오는 흙의 촉감과 온도가 부드럽고도 서늘했다. 순간 머리가 환해지는 것 같았다. 숲에서 마주치는 매 순간은 경이롭다. 작은 들꽃이며, 기울어진 나무의 각도며, 나무 사이로 보이는 하늘빛이며, 바람의 세기며 어느 것도 완벽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렇게 다 좋았는데, 늘 그렇듯 나 같은 사람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아니 그냥 굴러다니는 도토리 산에 있게 하면 안 되는 건지. 지퍼백이며 배낭이며에 '도토리'를 주워 채우는 사람들이 꽤 눈에 띄었다. 그 숲의 열매들은 분명 숲에 사는 생명들의 것일 텐데 그들은 아무 허락도 구하지 않은 채 도토리를 줍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하늘을 빽빽이 가리고도 남는 상수리나무 군락이었다. 가는 길에 굴러다니는 도토리들이 눈에 꽤 띄었다. 도토리를 줍느라 삼삼오오 흩어진 이들은 등산로를 벗어나 뒤지고 있었고, 나는 그 모습이 매우 거슬렸다. 그렇다고 겁 많은 내가 그들에게 아무리 좋게라도 한 마디 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저만치 '청설모' 하나가 바스락 거리며 도토리를 찾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차라리 '청설모'에게 말을 걸기로 했다. 아니 주의를 줬다. 상수리나무 길을 걸어 내려오며 주운 도토리를 청설모가 놀라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서 굴려주려던 참이었다.

" 청설모야, 사람들보다 더 빨리 도토리를 찾아야 해, 그래야 이 겨울을 날 수 있지"

" 안 그러면 사람들한테 다 빼앗기거든"


겁 많은 나는 혹시나 내 말을 들은 '도토리 줍던 이'가 나를 노려보기라도 할까 봐 살짝 눈치를 봤다. 도토리 줍기에 온 신경이 간 그들이 못 들었거나, 들었더라도 "뭔 신소리야" 하고 말았을지도 모를 테지만 말이다. 나도 중국산 도토리로 만든 도토리 묵보다는 우리나라에서 난 도토리로 만든 도토리 묵을 좋아한다. 하지만 말이지 숲 입구에 떡하니 쓰여있지 않나? 도토리 좀 그만 주워가라고, 숲의 동물들의 겨울 식량이 모자란다고.


숲에 가서 좋았던 것만 쓰고 싶은데, 그렇지 못했다. 손바닥으로 태양을 다 가릴 수 없고, 이것은 진실이니까 '불편한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하여 그것이 거짓은 아니니까. '불편한 진실'을 가린 채 좋았던 것만 말한다 해도 그 순간들은 존재하는 거니까. 누군가 무심코 했던 행동이었는데 '그럴 수도 있겠구나' 새삼 알아 굳이 숲의 식량을 집으로 까지 들여오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면 숲의 식구들이 겨울을 잘 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으니까 좋은 얘기만 말고, 이 얘기도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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