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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선 Nov 20. 2022

11월을 견디는 법

조용히 숲에 누워보니

11월은 이렇게 또 시작되었다.


3년 전 10월은 어느 날 내 삶 속으로 문득 들어와 내 일부가 되어 함께 했던 나의 두 번째 반려 고양이 '초원이'가 '무지개 마을'로 돌아간 달이다. 나는 그해의 약 6개월간을 마치 무중력 상태에서의 삶은 이런 것일까?라고 생각될 만큼의 시간들을 보냈었다. 아직도 그 비통했던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아서, 문득 파란 가을 하늘의 구름을 보다가도 걸음이 멈춰지곤 한다. 초원이의 작은 분홍 코처럼 앙증맞은 들꽃을 보다가도 그리움에 몸서리치는 스스로를 본다. 하지만 지금 이 정도라면 모든 게 다 괜찮다 괜찮다 단속하는 나날들.


올해도 역시 조심해야 할 그 무렵이 돌아왔고 내색하거나 입 밖으로 내지 않은 채 살아가던 중, 10월 29일과 맞닥뜨렸다. 충격을 넘어서는 충격이었다.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동안 살며 그 골목에 직접 걸어 들어갈 인연은 없었으나, 이태원역과 녹사평역은 내 생활 속에서 그리 먼 곳이 아니었다. 찾아본 검색어에 이태원은 '이태원 비건 식당' '이태원 비건 맛집' 도 꽤 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태원 참사' 라니 시간이 지날수록 예상치 못한 참사에 슬픔과 충격이 가해지는 듯하다.


애도하는 마음이야 말할 것도 없고, 남겨진 이들이 감당해야 할 슬픔의 무게는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놀러 갔다가 죽음을 맞이할 줄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21세기의 국가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게다가 하나같이 꽃 같은 젊음들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 진짜야?' 믿을 수 없었던 8년 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가 데자뷔 되는 것 같았다. 길에서 마주치는 교복 입은 학생들을 보면 눈물 나고 미안하고 어쩔 줄 몰랐던 그때처럼, 마주치는 젊은이들을 보는 마음이 아릿해지곤 했다. 제발 이 같은 일은 더 이상 일어나면 안 될 일이다. 백 번 천 번이라도 이 참사의 원인 규명이 이뤄져야 하며, 이 억울하고도 가슴 아픔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왼쪽 : 부드러운 낙엽위에 누워봤다. 오른 쪽 : 잣나무 숲에서 올려다 본 나무 저 끝을 청설모들이 날아(?)다닌다.
숲에서도 숲이 그리웠다.


10월부터 시작된 내 산행은 11월 중순에 이르러 거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인연'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다. 이토록 가까운 곳에 이리도 좋은 숲을 두고도 여태 찾지 않았던 나의 무관심과 무지를 반성한다. 물론 코로나 이전에 나의 낮시간은 늘 요가원에 있었지만 말이다.


첫날은 잣나무 숲까지 걷는 것도 꽤 멀리 간다고 느꼈었는데 지금은 꽤 만만해졌다. 뾰족한 마른 잎새들이 덮인 숲 마른나무 등걸에 앉았다가 무심결에 툭 바닥을 향해 등을 던졌다(?) (그렇다 그것은 '눕는다' 보다는 '던진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오랫동안 잣나무 숲을 받치고 있던 땅의 기운이 점퍼를 타고 내 등으로 스며들어왔다. 그렇게 부드럽고도 서늘한 자연의 기운을 생전 처음으로 온몸으로 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 첫 순간의 느낌을 오래 기억할 것만 같다.


급격한 노화가 진행 중인 중년의 남자가 숲에서 생활하는 것을 다큐멘터리로 찍는 프로그램을 티브이에서 본 적이 있다. 그렇다 해도 우리 인간은 숲의 빛과 질서와 품격 넘치는 존재 방식을 결코 따라갈 수가 없을 것이다.  결코 개입할 수도 개입해도 안 될 것이다.라는 생각을 숲에 가면 갈 수록 하게 된다.


하여 내가 숲에서 존재하는 방식은 최대한의 존중과 존경을 담아 머물다 오곤 하는 방식을 지향하려 한다. 이를테면 숲에서 주운 도토리는 도토리가 내려오는 나무 아래 뿌려 주려 했다. (부디 인간보다 청설모가 먼저 주워가기를 바는 마음으로) 날마다는 아니지만 눈에 띄는 쓰레기는 일종의 간헐적 플로깅처럼 담아 오려했다.  


왼쪽 : 청설모가 내려와 떨어진 도토리를 까 먹는 것 목격, 오른 쪽 : 산행길 바위에서 올려다본 나무를 담는 나를 담아준 시선


숲에 자주 가다 보니 아침과 점심과 저녁마다의 숲의 풍경이 각각 다르게 보인다. 햇빛이 머무는 시간과 각도에 따라 숲의 빛과 바람과 잎사귀의 흔들림이 달라 보였다. 숲에 가서 한 번도 치유받지 못한 적이 없을 정도로 언제 어느 때의 숲도 다 마땅히 아름답고 충만했다. 산으로 오르는 길 목의 나무들은 숱한 인간들의 걸음을 돕느라 반질반질해졌다. 바위로 오르는 길목의 나무들은 뿌리가 드러난 채 역시 반질거렸다. 우리는 그 뿌리를 당연한 듯 계단 삼아 밟고 산으로 오른다.


고마워요, 미안해요


'고마워요', '미안해요'. 요즘 나는 잣나무 숲을 지나, 아담한 능선을 지나, 바위를 오르면서도 늘 이 말을 하며 걷는다. 산이 너무 좋아서 잊을까 봐 되뇌고 감사하려 한다. 그리고 조심스레  '위로의 마음'을 담아 당신에게 산행을 권해본다. 가급적 조용히 산에 올라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있다가 오라고 말해보고 싶다.


슬픔을 이기려고도, 삭히려고도, 없애려고도 하지 말고 그냥 지금 그대로의 자신을 내버려 둬 보라고 말이다. 짜고 슬픈 눈물이 다 씻겨나가고 난 후, 맑은 물이 채워질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언젠가 괜찮아질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10월 29일, 그날 이후 첫 포스팅을 합니다. 애도의 마음을 담아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아픔 없는 곳에서 영원히 자유롭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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