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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선 Mar 22. 2023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기 전

현대 사회와 요가

지난 계절이었다. 문학잡지 속 요가와 관련된 원고 의뢰를 받고 어떻게 글을 풀어내야 할까 꽤 깊게 생각에 잠겨있었다. 접근하기에 따라 '요가'를 끌어와 쓸 수 있는 글은 꽤나 다양할 수도 있다. 더구나 팬데믹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요가'에 '힐링'을 입혀 만병 통치약쯤으로 예찬한다한들 뭐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전히 글감을 잡지 못한 채 창가를 보고 있는데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기 전'이라는 한 줄이 떠오르는 거였다. 그렇게 제목을 잡은 후 그날로 써 내려가게 되었다. 겨울의 일이었는데, 새 봄에 잡지에 실려 받아 읽는다. 나누고 싶은 마음에 여기 소개해 본다.



어제저녁 뉴스에서 폭설을 예고하더니, 오늘 아침 창 밖 세상이 온통 하얗다. 눈 덮인 나무들은 성탄 카드 속 그림처럼 평화롭고, 아이들 발걸음 또한 신난 강아지들의 그것처럼 난만했다. 그곳은 결코 지금과 같은 풍경을 자랑할 만한 곳이 아니다. 누가 흘리고 갔는지도 모를 마스크가 희끗, 눈에 띄던 그저 그런 아파트 놀이터 옆길일 뿐이다.


지구촌의 어디쯤 전쟁으로 부서진 폐허 속이나 100살 된 나무들이 잘려나가는 무자비한 훼손의 개발 현장에도 이 정도 눈발이 뿌려준다면 순한 세상이 온 것처럼 보일까? 쓰레기조차 눈에 덮이면 비현실적이게 달라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현대 사회는 팬데믹(pandemic)*과 기후 위기의 시대다. 기후 온난화로 극 지대 빙하가 녹고 이로 인한 전조 증상들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코로나를 겪은 누구라도 이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며, 나는 그 이유를 자본주의의 폐해가 불러온 결과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어쨌거나 그날의 창 밖 풍경은 이렇듯 꼬리를 무는 상념을 불러왔다.


그러다 문득 어떤 이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멈추게 되었다. 무거운 바위를 등에 진 것처럼 잔뜩 웅크린 채 걸어가는 사람이었다. 이른 아침 그는 어딘가를 향해 바삐 걷고 있었다. ‘현대 사회와 요가’라는 주제의 글을 숙제로 받아 든 다음 날 아침 큰 눈이 내렸다. 어쩐지 나는 그 아침에 본 그 뒷모습으로부터 이 글을 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요가 선생을 오래(?) 하다 보니 사람을 볼 때 등과 어깨를 포함한 뒤태를 주의 깊게 보는 경향이 생겼다. 이를테면 간혹 산책로를 걷다가도 앞선 이의 뒷모습을 살피는 게 버릇이 된 경우가 그에 속한다고나 할까.


사람의 뒷모습에는 현재 그가 살고 있는 삶의 내력을 짐작케 하는 정보들이 숨어 있다. 마주 보는 관계에서는 미처 발견해내지 못했거나 하지 못할 성격의 것 일수도 있을 그런 것 말이다. 앞모습은 밝게 웃고 있지만 뒷모습은 그와 반대인 경우도 있다. 간혹 나와 상관없는 타인의 어떤 등은 너무 쓸쓸하거나 슬퍼 보여서 다가가 위로해주고 싶다는 어림없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에 반해 어떤 이의 뒷모습에선 당당한 아름다움이 느껴질 때도 있다.


내 요가원에서는 요가를 시작하는 수련생과의 첫 수련 전 상담시간을 꽤 비중 있게 다루곤 했다. 그 시간을 통해 알게 되는 한 사람의 내적 정보 또한 효과적 수련을 위해 꼭 필요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즉 그 수련생의 기질이 그의 자세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으로서 실제 사례들을 필자의 책에 소개한 바가 있다.

여러 얘기를 나누다 보면 이 세계를 보는 그의 눈과 감정 상태를 짐작하게 된다. 완벽주의자적 성격의 소유자들은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슴을 여는 자세들이 편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생애 첫 요가 수련에서 단번에 비둘기 자세로 발목에 손을 걸기도 하지만, 전굴 수련에서는 뻣뻣한 채 상체를 숙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와 반대로 전굴은 쉽게 되지만 후굴은 시도조차 못할 때도 있다. 따라서 자기 몸과 마음의 상태를 살피고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요가뿐 아니라 살아가는 일도 이와 비슷하지 않던가.         
      책 『감정 상하기 전 요가』 p84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시작하는 이형기시인의 ‘낙화’라는 시가 있다. 시인이 이 시에서 그려내는 ‘뒷모습’ 은 내가 느끼는 것 이상의 깊은 사유의 세계를 품고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요가인 이자 시인인 독자로서 나는 이 ‘시’에서의 ‘뒷모습’이 요가가 지향하는 ‘뒷모습’과 통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바로 ‘아름다움’을 향한 공통의 관점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사람들이 갖고 있는 오해 중에 요가 선생이라면 모든 요가 자세들을 완벽하게 해 낼 거라는 믿음이 있다. 대개의 요가 자세들은 ‘척추’를 중심으로 앞으로 숙이거나 젖히거나 좌. 우 양 옆으로 기울이는 것을 기반으로 한 의도적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즉 ‘전굴’이 몸을 앞으로 숙이는 일련의 자세들을 포함한다면 ‘후굴’은 그와 반대로 몸을 젖히는 자세를 말한다.


나는 늘 ‘후굴자세’를 어려워하는 요가 선생이었다. 즉 스스로 완벽함을 추구하지만 완벽하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하고 있기에 불안과 스트레스에 노출되곤 했다. 그것이 내가 가진 기질이었고 요가자세와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수련을 통해 알게 되었다. 현재는 어려워했던 자세들을 꽤 극복했지만, 게을러지거나 불안이 쌓이면 자세를 통해 즉각 나타나곤 한다.           

                            

오늘날 ‘요가’는 살 빼기를 위한 수단 정도로 여겨지는 게 일반적이다. 굳이 그 일반적 관점에 반기를 들 생각은 없으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이 있다. 수천 년 전 인도의 수행자들이 정신의 깨달음을 얻어가는 과정 속에서 수단으로 선택해 수련했던 ‘요가’ 이렇듯 ‘요가’의 지향점은 ‘몸’ 보다 ‘마음’, 즉 ‘정신의 건강’을 우선시했다는 것을 ‘요가철학’을 통해 알 수 있다.


  ‘불안’은 ‘스트레스’와 이웃사촌이다. 그날 아침 바위를 지고 가는 듯 힘겹게 걸어가던 이의 뒷모습에서 ‘불안과 스트레스’를 보았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계절은 겨울이지만, 이 글은 봄이 기다려지는 계절에 읽히게 될 것 같다. 봄의 새싹과도 같은 ‘희망’에 대해 쓰고 싶었지만 우리 앞의 미래 속에서 ‘불안’을 빼놓기란 쉽지가 않았다. 이런 나를 누가 ‘비관주의자’라고 부른다 해도 부정하지 못할 것도 같다. 그렇다고 또 마냥 불안한 미래를 비관하며 살아가고 싶지도 않다.


문득 ‘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이 글에 더하고 싶어 진다. 어쩌면 봄이 기다려진다는 것은 가벼워지고 싶다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요가 적으로 살 필요가 있는 때라는 생각이 든다. 이 생활방식이 지향하는 방향성은 ‘몸과 마음’ 모두가 가벼워진다는 것이며, 뒷모습을 가꾸는 일과 통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요가자세 움직임에 도움을 주는 가벼운 음식으로 가벼운 몸을 만들어보자. 가벼워진 몸으로 자신의 몸이 지어내는 자세에 집중해 보자. 무거워진 머리를 아래로 향하게 해 보자. 숙이고 젖히고 비틀어보자. 숨이 가빠질 때까지 집중해서 걸어보자.


만약 그래도 ‘불안과 스트레스’가 느껴진다면 아예 그런 단어와 느낌 자체들을 ‘나는 모른다, 모른다.라고 중얼거려 보자. 그 조차 어렵게 느껴진다면 그냥 거기 그대로 내버려 둬 보는 거다. 어느덧 등에 실린 무게가 가벼워지고 어깨에 잔뜩 실린 긴장이 풀려 부드러운 어깨의 선을 유지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은 틀림없이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거나, 그렇게 될 것이다. 뒷모습의 완성. 불안이 영혼을 잠식해 오기 전 어쩌면 당신도 나도 부단히 그것을 위해 살아가는 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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