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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선 Jun 05. 2023

새와 고양이

절벽을 향해 날아오르는 새

반려 고양이 메르씨와 함께 Jay 방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아 창 밖을 본다. 메르씨도 나도 편안한 시간, 흔들의자에 깊숙이 몸을 찔러 넣고 앉은 내 무릎 위에 엉덩이를 붙인 채 '갸르릉' 거리기 시작한다. 예민하기로 치면 저나 나나 거의 비슷한 수준이기에 온전히 편안해야 내는 골골송을 부른다는 것은 진심 기분 좋은 상태라는 걸 알 수 있다.


메르씨는 아기 고양이 때부터 창 밖을 통해 보이는 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지금도 가끔씩 발코니에 날아와 구구거리는 비둘기 소리를 들으면 창이 뚫어져라 바라보곤 한다.


문득 종일 창 밖을 내다보는 고양이의 습성이 바깥세상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것인 줄 알고 내 보냈다는 얘기가 생각이 난다. 집에서 생활하던 고양이에게 갑자기 닥쳐온 길 위의 삶이라니, 아연실색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일 의도적 유기의 목적이 아닌 무지로부터 비롯된 일이라면 절대 그래서는 안된다는 걸 반려인이라면 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

메르씨와 함께 바라보는 창 밖의 풍경

그날의 새는 30층 아파트들이 들어찬 우리 단지 안을 마치 고공비행 묘기라도 하듯 날아오르고 있었다. 잘 날기 위해 발달한 신체구조를 가진 속도가 붙은 새가 제어를 하지 못할 때 어떤 일이 생길 것인가? 그런 새들이 투명 유리벽에 부딪혀서 충돌 사고를 당하는 일이 많다는 걸 알고 난 이후부터 도시를 나는 새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새들의 안구 구조는 대부분 양쪽 측면에 위치해 있기에 정면으로 마주하는 투명창을 미리 발견하고 속도를 조절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일단 날아오른 새들의 비행 속도는 30~70km를 유지한다. 무수히 죽어나가는 새들의 죽음을 안타까이 여긴 시민들의 연대와 움직임이 있어 '조류충돌방지스티커'를 붙이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이렇듯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개인의 마음속에 자리한 '자비심'일 것이라는 어리숙하고도 순한 생각을 해보는 평일 오후다.


도로를 달리다가도 로드킬 당한 동물의 실루엣이 보이면 얼른 외면하고 싶다. 어서 빨리 그 길을 벗어나 파랗게 개인 하늘만을 보며 달리고 싶다. 잊고 싶다.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먹고 좋은 길만 달리고 싶다. 하지만 길을 걷다 무심결에 내려다본 수풀길에 놓여있는 수상한 실루엣은 애잔하고도 참혹한 작은 사체 들이곤 했다. 때로는 그 작은 몸을 가려줄 만한 나뭇잎을 주워 덮어주고 간 적도 있다. 그도 저도 없을 땐 되도록 빨리 그곳을 벗어나려고 애썼다.


공존이란 무엇인가? 윤리적 비건인 나는 진정 공존을 꿈꾸는 사람 맞는가? 동물과 그것을 착취해서 만들어진 것들을 선택하지도 취하지도 않는다는 것 이외에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지금의 나는 그저 고갈된 마음인 채로 말도 생각도 다 잊은 백지처럼 공허해진다.  


나는 가만히 르릉 대기를 멈춘 인간 나이 환갑 진갑 다 지났다는 14년 차 고양이 메르씨의 배에 귀를 대어 본다. 심장 뛰는 소리의 파동이 깊은 계곡의 물에 작은 돌을 던질 때 생겨나는 파문과도 같다.


인간 외 존재와의 공존이 반려고양이 메르씨가 유일하다 할지라도 자주 가책을 하지는 말아야겠다. 어느새 4년 전 먼저 떠난 초원이 이후 지금 내 곁의 메르씨에게 절대 소홀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그것이 아마도 초원이가 바라는 일일 것이라며 애써 슬픔을 이겨냈었다.


인간에게 소용되는 것들에 비해 고양이도 새도 참 바라는 게 없는 존재들이다.


울창한 밀림을 밀어 대규모 사육장을 짓거나 수백 년을 지켜온 나무숲을 밀어내고 새로운 길을 만들지도 않는다. 케이블 카를 만들어 그곳에 원래 살던 생명들의 보금자리를 허물거나 죽이지도 않는다. 돌고래 관광을 하겠다고 동력선을 타고 그들의 곁에 바싹 붙어 위험에 빠트리지도 않는다.


'새'들에게 필요한 건 원래 그들이 마땅히 날아다녀도 괜찮을 하늘이며 숲이다. 그저 안전한 허공이다. '고양이'에게 필요한 건 최소한의 먹을거리와 기분 전환을 위한 캣글라스, 그리고 반려인의 '사랑'이면 족하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의 새들은 기막히게도 이 지형을 파악하고 있는 듯싶다. 1층에서 3층 높이의 나무 위에서 아파트 10층 혹은 20층까지 날아 올라가 좁은 창 틀에 내려앉는 모습은 거의 묘기에 가깝다.


비가 오는 날엔 에어컨 실외기에서 구구거리며 비를 피하다가도 가는 새들을 고양이와 나는 가만히 바라볼 뿐이다. 누가 이걸 소극적인 공존의 태도라고 해도 별도리가 없이 메르씨와 나는 무럭무럭 늙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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