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윤선 Jun 12. 2023

나비에게 하늘을

미치도록 열고 싶었다, 저 곤충 상자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없고,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는 게 살아가는 일이라는 걸 이제는 어느 정도 알 것도 같다. 나이 들어감이 그 사람의 인격과 비례해 성장해 나가는 거라면 세상에 그보다 더 이상적이고도 성숙한 노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둘 사이를 서성이는 채 어떤 연결점도 확신도 갖질 못하겠다. 아니 사실 나는 과연 지금 잘 살아가고 있는 걸까? 잦은 의심이 들기도 한다. 아직은 그렇다고 해두자. 언젠가 내가 더 나이가 들어 최소한 지금보다는 현명해질 수도 있을 테니 이렇게라도 내 앞에  도래할 노년의 날을 기약해 두기로 한다.

오늘 오전의 천변 풍경

며칠 전의 일이다.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을 참느라 입과 마음이 근질근질한 순간을 보냈다. 행동지수 10에 움직여야 한다면 거의 9까지 올랐을 정도로 참기가 힘들었다. 아니 사실은 오래전부터 참아온 일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기분 좋게 천변을 걷기 시작한 내 눈에 들어온 건 어린아이가 휘두르는 채를 필사적으로 피하고 있는 나비의 간절한 날갯짓이었다. 나풀거리는 아이의 원피스 자락이 하얀 나비의 날개를 닮았다. 아이는 노랗게 핀 들꽃과 연둣빛 풀이 늘어선 천변길 위에 선 어린 무사였다. 야물지 않은 칼날이었지만 일단 베이는 순간 나비의 일생은 끝이 나고 말 것이다.


일정한 거리에서 이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이는 아마도 아이의 아빠인 듯싶었다.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이 오갔다. 이맘때 천변을 산책하며 볼 수 있는 흔하고도 불편한 광경이다. 한 번은 아이들끼리 나와 나비며 잠자리며 닥치는 대로 잡아채는 현장을 보고 조심스레 다가가 말을 걸어본 적도 있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마음이 넓었다. 심지어 내 얘기를 듣고는 바로 놓아주겠다며 채집통 문을 내 앞에서 여는 아이도 있었다.


 사실은 재미로 잡았다가 놔주려고 했다는 얘기를 하는 아이도 흔한데, 그럴 경우에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너보다 힘이 센 그 누군가가 재미로 너를 잡아서 가두었다가 풀어주면 좋겠느냐고"

"채에 맞아 날개를 다치고, 좁은 통 안에 갇혀있을 때 얼마나 무섭겠냐고, 놀러 나왔다가 엄마를 잃어버린 나비는 얼마나 슬프겠냐고"

 

곤충들의 감옥 

아이들의 영혼 속에는 천사가 산다. 풍파에 닳고 닳은 어른들과 달리 단순하고도 순진한 심성이 들어있기에 진지한 천사의 얼굴로 경청하곤 했다. 간혹 인사로 악수를 나누며 헤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부모가 동반했을 경우는 다르다. 개인의 성격에 따라 다르지만 부모 자신의 가치관을 아이에게 물려주려는 경우가 흔하기에 그렇다. 머릿속에서 수만 가지 생각이 오가는 순간을 맞이할 때면 어김없이 나의 오지랖을 탓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곤 했다. 지나쳐서 오는 길, 아이가 타고 온 자전거 뒷자리의 채집통 안에는 이미 잡힌 나비가 몸부림치고 있었다. 나는 괴로웠다. 멈칫대며 아이와 아빠를 번갈아보다가 그냥 돌아오고 말았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 천변에 가득 들어차 오르는 생명력, 아름답지 아니한가? 이름 모를 보랏빛 들꽃이며 풀꽃, 꽃창포도 토끼풀도 애기똥풀도, 뫼꽃도 다 그렇게 어여쁘지 아니한가. 정확히 꾀꼬리의 소리를 구분하지는 못하겠지만 꾀꼬리 같은 고운 소리로 노래하는 새들이 천변 나무 위에 둥지를 틀고 살고 있다. 너구리도 산다. 하천에는 청둥오리가족이 살고 물살이들도 살고 있다. 천변에 사는 나비들 또한 거기 그렇게 살만한 까닭이 있어 살고 있을 것이다.


천변에는 그 생명력 넘치는 존재들에 대한 호기심과 사랑(?)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사람들도 자주 등장한다. 자신들이 던져주는 과자를 먹으려 모여드는 물속 존재들을 보려고  인간의 입맛에 맞는 과자들 즉 지나치게 자극적인 것들을 물살이와 오리들에게 던져주는 사람들을 보는 것도 힘들긴 마찬가지다. 먹이를 주지 말라는 경고문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재미를 위해 멈추지 않는다.(이걸 참견하다가 봉변 비슷한 걸 당한 이후로 그냥 지나치곤 한다.)


위인전 속 '파브르 곤충기'를 읽고 공부한 어린 시절을 보내온 우리에게 곤충이란 인간을 위해 희생시켜도 괜찮은 존재로 인식하는 게 당연했다. 그것을 위해 관찰하고 실험하는 건 일종의 학습행위라는 게 일반적이었다.  2023년 영국의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제공한 기사에 따르면 토지이용과 기후변화의 상호작용으로 고강도 농업과 기후 온난화가 겹치는 지역에서 곤충 개체 수가 49% 감소한 것으로 분석됐다고 한다.


복잡하지만 꼭 필요한 얘기는 이미 환경단체와 학자들이 다 해왔고, 조금이라도 '불편한 진실'에 가까운 기미가 느껴지면 우리 인간은 듣고 싶어 하질 않는다. 하여 나는 매우 단순하고도 단편적인 어조로 한 마디 하며 이 글을 맺을까 한다.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영역을 언제 그들이 내놓으라고 한 적 있었던가?

그들이 그러지 않았듯이 우리도 그들을 그냥 그대로 살다 가게 하면 안 되는 걸까?






매거진의 이전글 새와 고양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