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해서 잘 살고 있는 장남이 새로 나온 비건 브랜드의 통조림 하나를 가져왔다. 이번이 두 번째 스팸 통조림인데 첫 번째는 여러 개들이 세트였고 이번 건 한 개. 지난번 것 보다 맛이 좋은 데다 가격도 비싸다며 가져온 것인데, 사실 나는 논 비건 시절에도 지금도 '스팸'을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니다.
냉장고에 넣어 둔 채로 잠시 잊고 있다가 캔을 따서 보니 말캉말캉해 보이는 게 오래전 기억 속의 그 스팸이 떠올랐다. 비건 스팸이라는 데도 이상한 기분이 들어 아주 조금만 떼어서 맛을 보았다. 굽지 않아서 그런지 별다른 큰 감흥을 느끼진 못했다.
일주일 만에 집에 온 Kez가,
"엄마 비건 스팸 어땠어요?" 하더니 불쑥 냉장고를 열어 스팸 뚜껑을 열어본다. 그러더니 갑자기 키득거리며 웃는 게 아닌가?
"왜 웃어?" 무뚝뚝하기로 치면 즈네 아버지 저리 가라급에다가 무게 잡기의 달인인 녀석의 웃음 버튼에 나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더니 우리 엄마가 하도 비건 생활 한지가 오래되어 '스팸'을 어떻게 먹는지조차 잊어버렸나 보다며 스팸 먹는 법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얘는 지금 내가 맛보려고 떠먹은 숟가락 자국을 보고 엄마가 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 엄마, 일단 스팸통을 뒤집어서 '탁' 두드리면 통에서 분리가 되어 나와요"
" 그런 다음 칼로 적당한 두께로 쓱 쓱 잘라서 팬에 구워서 먹으면 끝!"
' 그게 아니라, 나도 아는데 썩 당기지가 않아서 맛만 보려 한 거라고, 아무려면 내가 스팸을 먹을 줄 모르겠냐고' 설명하려다가 말았다. 뭐라 할 틈도 없이 어쩐 일로 그날따라 자상한 이 녀석의 설명을 그냥 들으며 모르는 척, 입을 다물고 있는 것도 나쁘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가 돌아가고 난 후 다음 날 나는 이 스팸을 살뜰히 먹어치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식이 엄마를 위해서 가져단 준 식재료니까 한 조각도 허투루 버릴 수는 없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나는 옛 기억(?)을 떠올려, 아니 녀석이 가르쳐준 대로 스팸 덩어리를 도마에 꺼낸 후 도톰하게 썰어놓았다. 그리고 팬에 기름을 두르지 않은 채로 굽기 시작했다.
지글거리며 구워지는 스팸은 100% 식물성 재료임에도 불구하고 착각을 할 만한 향과 모양을 낸 채 특유의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왼쪽 : 베러미트의 식물성 대체육 스팸, 오른 쪽 : 스팸
생명 존재 자체로서의 돼지로 살아가고 있는 '새벽이'
만약 이 스팸이 비건 Vegan스팸이 아니었다면 이건 조각조각 분리되고 갈려진 '돼지의 살'이었을 것이다. 또한 우리 모자가 '비건'이 아니었다면 그걸 먹는 것에 대해 어떤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플랜트 베이스드 Plant Based 스팸임에도 불구하고 익어가는 한 점의 스팸에서는 자꾸 살아 숨 쉬던 생명으로서의 '돼지'가 떠오른다. 도살장에서 구해내서 명대로 잘 살고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돼지 생츄어리'의 원조인 이름이 있는 돼지 '새벽이'가 떠오른다.
영어 단어'스팸 Spam'은 '쓰레기'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정기적으로 삭제하는'스팸 메일'의 '스팸'의 의미와도 통하는 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2차 세계대전중에 병사들에게 공급되기 시작하며 호황을 누렸다는 스팸은 순 살코기가 아닌 다량의 돼지 지방을 함께 갈아서 만들었다고 한다. 전쟁 후에는 다량의 지방과 다량의 소금이 첨가되어 건강에 좋지 않은 식품이라는 인식도 퍼져가기 시작했다.
'전투 식량'으로서의 역할을 톡톡이 해냈던 스팸이 사양길에 접어든 지는 외국에서는 이미 꽤 오래전의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명절에 선물세트로 쓰이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내 경우 어쩌다 아직도 스팸 종류가 선물로 들어올 경우 재활용 쓰레기 버리는 날 내다가 놓곤 한다. (필요한 사람이 가져가는지 몇 시간 후 보면 없어지는데, 괜히 미안해지곤 한다)
모름지기 다양성의 시대이다. 입맛에 잘 맞아서, 그게 있어야 밥 맛이 나니까 내 식생활에서 꼭 필요한 스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나는 존중한다. 하지만 누군가 만든 스팸의 CF속 그림처럼 흰쌀밥에 지글지글 구운 지방덩어리 스팸 한 조각의 영상에 현혹되는 일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도 든다. 짜고 기름진 데다가 알루미늄 캔에 담아내느라 온갖 가공의 과정이 들어간 그야말로 열일하는 '스팸'의 과정이 심히 염려스럽다.
다시 비건 스팸으로 돌아와 본다. 기름기가 싫은 나는 팬에 기름을 두르지 않은 채 비건 스팸에서 나오는 기름만으로 바짝 구워서 야채와 곁들여 샌드위치 속에 넣어 먹었다. 두부를 구워 넣을 때와는 다른 뭔가 인공의 고소한 맛이 났다. 나쁘지 않은 건 물론이고 포만감이 상당했다. 간단하게 해먹은 샌드위치 요리법은 추후 귀차니스트의 레시피북에 올려두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