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에서 영원으로
근래 들어 텀블러를 챙겨 집 근처 커피집에 가는 일이 잦아졌다. 이례적인 일이다. 지금껏 커피집에 간다는 건 주로 글을 쓴다거나, 집중해서 작업할 일이 있을 때가 전부였는데 말이다. 게다가 나름 커피 취향도 확고한 편이다. '핸드드립' 커피가 아니고선 대부분 커피 맛이 거기서 거기라는 내 생각은 편견일까? 맛있는 커피를 마시려면 내 손으로 직접 원두를 갈고 직접 내려서 마실 때가 가장 맛이 좋더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건 그렇고 나는 오전에 마시는 오트 라테 한 잔을 참 좋아한다. 알맞은 농도의 에스프레소에 따끈한 오트유를 섞어서 마시는 '오트 라테'는 카페인에 민감한 편인 내게 아주 잘 맞는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트 라테를 마시려면 스**스에 가야만 가능했다. 자리값이 포함되었기에 상대적으로 비싼 커피 값이 아깝지 않으려면 노트북을 챙겨 가야만 했다. 오트 라테도 마시고, 작업도 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인 셈이었다. 사실 나의 글쓰기의 8할은 스**스에서 완성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산에 가다가 우연히 들려본 국내 체인을 갖추고 있는 커피 집에서 오트라테를 마시게 되었다. 아직은 소규모 체인점 형태라 그런지 주인의 실력에 따라 커피 맛도 더 좋아지는 것 같았다. 처음 마셔본 그 작은 커피집에서의 오트라테가 어찌나 좋았던지, 재방문을 하게 되었다. 한술 더 떠 산에 가는 길 그 커피집 보다 더 가까이에 있는 국내체인의 커피집에서도 오트라 떼는 물론 비건 도넛까지 주문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비건들에게 카페라테의 선택지가 생겨난 셈이다.
오늘은 햇빛이 가장 빛나는 정오가 되기 전 서둘러 텀블러를 가방에 챙겨 집을 나섰다. 밤색 플리스 점퍼에 겨울용 비니를 눌러쓰고 양쪽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 내 모습에서 한가한 아저씨의 분위기가 난다. 구겨 신어야 더 편한 운동화를 신은 채 천천히 천변을 걸어 길 하나를 건너 커피 한 잔을 받는다. 이제 주인아주머니는 한눈에 나를 알아본다. 텀블러를 갖고 오는 손님도 아마 내가 유일한지, 두 번째부터 기억을 하시는 것 같다.
" 안녕하세요!"
" 맛있게 드세요!"
커피를 받아 들고 햇빛이 가장 좋은 천변 벤치에 앉아보았다. 윤슬을 바라보다 한 모금, 날이 추워지자 한결 더 푸르고 높아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다 한 모금. 흐르는 물소리는 언제 들어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래서 물소리를 듣다가 한 모금, 그래도 넉넉히 남아있는 오트 라테의 시간이 참 좋다.
이러고 있노라면 세상 근심 하나 없이 평화롭기만 하다. 이런 날엔 글쓰기에 게으름을 피워도 괜찮다. '캣맘들 아파트 화단에 밥 주지 말라고, 정해놓은 날짜까지 안 치우면 관리소에서 알아서 하겠다는' 식의 심란해지는 협박(?)도 잊혀져 간다. '고양이가 무섭다고, 우는 소리가 싫다고, 그냥 놀이터에 지나가는 것도 보기 싫다고' 구구절절 매정한 경고성 글도 잊혀져 간다.
왠지 더 신경이 쓰이던 어제였다. 11월 30일 경고의 날인 까닭도 있었으리라. 가급적 눈에 안 띄고 싶어 저녁이면 주던 밥이었는데, 주변 정리도 할 겸 오전에 밥을 주다가 어떤 이에게 걸렸다. 가급적 늘어놓지 않으려 애쓰며 사료 사서 주는 게 뭐 그리 큰 죄라고, 쭈그러든 자세로 온갖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오늘은 다 잊었다. 별 거 아니다. 내가 만드는 소소한 이 시간들 속에서 인간이라서, 나도 같은 인간으로서 내는 소란한 감정들. 다 다 지나쳐가는 것들일 뿐이니까. 이 소소한 순간들이 흘러가는 쪽에 빛이 있으니까. 사랑하는 마음을 미워하는 마음은 결코 이길 수 없을 테니까. 오트 라테 한 잔을 마시며 충분히 나는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