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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선 May 14. 2024

보브아르의 파리도 식후경이지

비건 여행자의 식탁

  한 여름의 파리에 도착해 예약해 놓은 1인용 숙소에 도착했을 때 첫 느낌은 너무 덥다는 거였다. 비용에 걸맞은 시설이었으나, 에펠탑까지 걸어갈 수 있다는 것과 근처에 꽤 큰 식료품 마켓이 있다는 것은 좋은 점이었다. 작은 빵집과 향 좋은 커피 카페까지 발견해 냈으니 그 또한 수확이었다.


  첫 유럽에 첫 파리였지만 그간 그려온 파리지엔느의 낭만을 즐기기에 나는 현실적이고도 용의주도한 편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잘 모르는 비건 식당을 도착하자마자 탐색할 만큼의 의욕이 남아있지 않다는 얘기다. 대신에 짐을 풀고 바로 숙소를 나와 마트를 찾아냈다. 사흘 굶은 귀신이 들러붙기라도 한 것처럼 정말이지 신나게 장을 봤다. 식구들을 고려한 장보기가 아닌 순전히 내가 먹을 것, 그러니까 내가 내게 먹일 것들을 사들이는 먹부림이라 할 만했다.


   각종 과일과 샐러드 볼과 견과류, 꽤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발사믹 식초와 요기니들이 먹는다는 물까지. 굶을까 봐 한국에서 가져간 쌀과자에 햇반까지 펼쳐놓으니 작은 동양여자 여행자의 방에는 온통 먹을 것들로만 둘러싸이게 되었다. 그 방안의 풍경은 결코 낭만적이거나 지성적이지 않았다.

시몬느 드 보브아르 Simone de Beauvoir

  하지만 여기 오며 20세기 중반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가, 페미니즘 이론의 단초를 마련한 시몬느 드 보브아르 Simone de Beauvoir를 떠올리지 아니한 것도 아니다. 나 또한 '주체적 인간들의 아름다운 사랑'을 동경한 문학청년의 시기를 거쳐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시대를 앞서간 그의 진보성과 당당함이 참 좋았다. 동경했지만 내가 결코 갖지 못한 것들이었기에 그러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건 그렇고 21세기를 비교적 합리적으로 살고 있다 자부하는 나는 빵집을 찾아 거리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소심한 탓에 멀리까지는 안 나갔고 숙소로 다시 찾아들기 좋은 거리의 골목 끝 빵집에서  우선 먹을 바게트를 사들였다. 견과류까지 얹은 비건 샐러드볼을 끼니마다 먹고 나면  작은 동네를 어슬렁거렸다. 버스정류장도 알아냈고, 커피 카페도 알아냈다. 처음부터 커피 카페를 들어가진 않았고 마트에서 비건 라테 커피를 샀다. 잘 모르는 식당에 혼자 가 혹시 모를 바가지를 쓰게 되는 것보다는 매우 살뜰한 여행이었다.


  게다가 나의 식성은 떠나온 지 불과 하루 이틀 만에 고국의 밥과 김치찌개가 못 견디게 그리운 편도 아니다. 이게 장점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어찌 보면 해외여행에 특화된 식성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쨌거나 먹어야 힘이 나는 법. 나란 사람 겉보기엔 조금 먹고 한없이 비실비실 댈 것 같지만, 생각보다 많이 먹는 편이다. 게다가 제대로 마음먹으면 대찬 구석도 쏠쏠이 있는 편이기도 하다.  나는 이런 식으로  비건 에너지를 비축하기 시작했다.


  기왕에 보브아르를 떠올렸으니 잠시 딴 얘기를 해본다. 이 시대에 여성으로 살며 누구라도 한 번쯤 '페미니스트'가 되어 본 적 없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하물며 나의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 그 위 세대의 어머니들 모두 생물학적 '여자'가 아닌 '인간' 자체로서의 존재방식을 원했을 것이다. 결국 그들을 인내하게 한 최후의 그것은 바로 '모성'이라고 생각한다. '모성애'란 '인류애'의 또 다른 말일수도 있다는 걸, 나는 내 몸을 찢고 나온 나의 아이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서랍 속에서 꺼낸 여행기> 3편인 셈, 여행기스럽지 않지만 아무튼 여행기임에 분명한 여행의 기록을 이렇게 시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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