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르 박물관에서 나와 자연스레 이어진 길들을 걷다 보면 센 강을 따라 걷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디를 보아도 저 멀리로 다리가 보였다. 파리는 서울에 비해 6분의 1 정도 크기의 도시임에도 센 강을 건너는 다리가 총 37개가 된다는 사실은 여행을 마치고 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한강을 건너는 다리가 서울에 총 31개라고 하니 루브르 근처 어디서나 다리가 보였던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나는 사실 그때 세느 강변의 다리라면 '퐁네프의 다리' 정도를 알고 있을 뿐이었다. 영화 '퐁네프의 다리'속에서 춤추던 주인공들, 그들 위로 보이던 밤하늘과 터지는 불꽃들. '쥴리엣 비노쉬'의 그 이해할 수 없는 정서와 영화 속에 흐르는 '허무'는 니힐리즘 미학을 작정하고 보여주려는 감독의 연출이었을 거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저 의식의 흐름을 따라 걷는 사람처럼 '예술가의 다리' 위를 걷기 시작했다. 석조 조각과 황금색 조형물이 화려하게 장식된 다리들과 달리 철제 난간과 나무 바닥으로 된 다리였다. 다리 중간쯤 버스킹을 하는 사람 몇이 있었던 것도 같다. 그러나 정작 내 눈길을 잡아 끈 건 난간 위에 걸려 반짝이고 있는 쇠 자물쇠들이었다. 저것들은 서울의 남산에도 있는 것들, 왜 저기 걸려있는지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것들이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철저히 무시한 채 발길 닿는 대로 걸어온 '예술가의 다리' 위에서 나는 온전히 혼자인 채로 모르는 이들의 한 때를 살펴보았다. 눈에 잘 띄는 '브라이언과 제니퍼'의 자물쇠를 보다 추측해 본다. 저들은 2012년 8월 15일에 저기 서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서로의 이름을 새긴 자물쇠를 걸었겠지? 영원히 깨지지 않을 사랑을 약속하며 센 강에 열쇠를 던져 버렸겠지?
파리의 여행자가 아니었다면 결코 생기지 않았을 모르는 연인들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하찮고 소소한 기억 속이지만 사람을 생각하며 슬며시 미소 짓던 기억의 단편이 꽤나 선명한 것도 신기하다. 2024년 현재는 너무 많이 걸린 자물쇠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난간이 쓰러지는 바람에 그 많은 자물쇠는 철거되고 유리로 바뀌었다고 한다. 영원할 것 같아도 모든 것은 변한다. 지금 이 순간을 아름답게 살아야 할 까닭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