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밤중의 100미터 달리기
파리에서, 에펠탑이 바로 코앞에 보이는 숙소라니!
설렁설렁 저녁의 바람을 맞으며 산책길에 나섰다. 이 시간에 파리를 산책하다니, 비로소 '파리'의 중심에 들어와 있다는 실감이 났다. 시설은 그저 그랬지만 걸어서 에펠탑까지 갈 수 있다는 점이 좋아서 선택하게 된 숙소였기에, 혜택을 누려 보기로 한 날이었다.
나는 사실 웬만해선 여행지에서 모험을 하는 편이 아닌데 해가 떨어진 후에 숙소를 벗어나다니, 내 사전엔 결코 없던 일이었다. 어쨌거나 다소 들뜬 마음이 이끄는 대로, 집을 나섰던 것이다. 여행자가 아닌 현지인처럼 짐 없이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나선 발걸음이 상쾌했다.
그 사이로 저녁빛은 더욱 짙어졌고, 어둠이 한층 가까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 순간이 비현실적인 느낌이 든다는 것 외에 경계심이 들지는 않았다.
밤의 에펠탑 광장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낮에도 많았을 것으로 예상되는)로 붐볐다. 낮에 도착했더라면 광장에서 에펠탑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좋았겠지만 어둠에 가려 보이지가 않았다. 에펠탑의 내부로 들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망대에 오르기 위한 대기줄은 꽤나 길었다. 마침내 긴 기다림 (그러나 낮에 비해선 짧은 시간이었다고 함) 끝에 거대한 에펠탑의 철구조물 속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커플, 혹은 가족 단위의 관광객들이 대부분이었다. 혼자서 가는 미술관 관람의 충만함과는 다른 소외의 기분이 들었다. 아찔하게 올라선 첫 번째 전망대에 도착하자 허공의 바람은 더 세차게 불었다. 어둠 속이지만 벽 없이 사방으로 트인 높은 공간에 서자 잊고 있던 고소공포증이 생길 것만 같았다. 까마득한 저 아래의 먼 어둠 속에 반짝이는 불빛의 군락지가 파리 시내라고 누군가 감탄하며 외쳤다.
소문난 잔치
어쩌면 게을러서 생긴 버릇일 수도 있는데 나는 사실 소문난 잔치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그러니까 베스트셀러 소설이나, 흥행 1위의 영화들을 비롯 너무 유명해진 장소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잠잠해질 때를 기다렸다 찾아본다거나, 어느 날 문득 다가온 것들이 주는 우연한 감동의 여운을 즐기는 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였을까? 그토록 유명한 그 밤의 에펠탑은 '과장' 된 관광지의 실체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서워'를 연발하며 연인의 팔에 매달려있는 커플들, 자녀를 보호하는 부모들 사이에서 고독한 자세로 가만히 먼 곳을 바라보다 마침내 지상으로 다시 내려왔다. 여길 올라와 보겠다고 기다렸던 긴 시간에 비하면 너무도 순식간에 내려온 셈이었다. 그 밤에 고공 전망대 투어까지 올라가는 이들도 있었지만 나는 포기했다.
신기했던 건 에펠탑을 이루고 있는 철골 구조물이 흡사 살아있는 유기물체처럼 느껴졌다는 거다. 그것은 마치 어둑어둑한 간접 조명 아래서 자신의 속을 드러내고 싶지 않지만 드러내며 살 수밖에 없는 동물과도 같았다. 자본주의 사회가 만든 거대한 공룡의 척추뼈를 타고 올라가는 것처럼 나를 포함한 작고 하찮은 인간들의 감탄은 소란스러웠다.
한 밤중의 100미터 달리기
관람시간의 마지막 관람객으로서 자정이 지났을 게 분명한 시간 땅에 내려오자 그제야 숙소로 돌아갈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불안함을 지우려 애쓰며 에펠탑을 내려와 광장을 지나는데 들어설 때 보지 못했던 몇 무리의 젊은 남자(청소년들일 수도 있을)들이 보였다. 그들은 발광하는 작은 공 같은 놀이기구를 높이 던졌다가 다시 받는 놀이를 하며 시끌벅적했다. 혼자인 나는 왠지 모를 위협감이 느껴져 서둘러 사람들이 나가는 쪽을 따라 걸으며 어서 그곳을 빠져나갈 궁리만 했다.
지레짐작이었는지 사실이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무리 중에 유심히 나를 보고 있는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순간적으로 앞서 가고 있던 서 너 명의 가족 사이들 사이로 슬며시 끼어들었다. 마치 그들 가족과 함께 온 사람처럼 바짝 뒤에 붙어 걷기 시작했다. 깊은 밤이었고, 나는 혼자온 동양 여성 관광객이었기에 표적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들은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나를 따라 걸으며 발광하는 공을 주고받는 놀이를 이어갔다.
그러다 어느 모퉁이에 다다르자, 모르는 그 가족은 방향을 틀어 그들의 집을 향해 가버렸다. 혼자 남은 나는 질주의 본능이 살아난 치타처럼 듯 무작정 앞만 보고 달렸다. 얼마를 그렇게 달렸는지, 하도 조용해서 뒤를 돌아다보니 텅 빈 거리에 나 혼자뿐이었다. 따라오는 사람도 없었고, 행인들도 없었다. 밤의 허공 속, 붉은 가로등 사이로 검은 가로수 그림자들만 또렷한 실루엣을 남기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숙소의 건물이 가까이 보였다. 나는 그제야 멈추어 선 채 가뿐 숨을 가다듬었다.
실제인가, 환상인가
'에펠탑'은 이 탑의 설계자인 'Gustave 에펠'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파리에서 열린 1889년 만국 박람회(세계 박람회) 준비의 일환으로 구상되었다고 한다. '파리에 가면 에펠탑이지'라는 여러 여행객들의 느낌과 달리 내가 본 에펠탑의 느낌은 시니컬하기만 했다.
그나저나 그날밤, 거기 에펠탑 광장에서 누군가 나를 따라오고 있던 것은 실제인가? 환상인가? 착시인가? 나는 여전히 아직도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