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읽은 책 P. 62 첫 문단을 읽고 느낀 점이나 관련된 이야기 쓰기
4권의 책을 펴 봤다. 사실 지난달 안 읽은 책, 읽은 채 구분 없이 알라딘에 팔 수 있는 책은 죄 팔아서 책장이 많이 널찍해진 상태였다. 마감 날짜가 다가오면서 슬슬 걱정됐다. 이번 주제에 적합한 책이 집에 남아 있을까? 아니나 다를까, 첫 번째로 펼쳐본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의 62 페이지는 백지였다. 당황 당황;; 이 기회에 무라카미 책 좀 읽어볼까 했더니.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라 소개해도 손색없을 무라카미의 작품을 읽은 적이 없다. 원체 일본 소설을 안 좋아하기도 하고, 소설 자체를 잘 안 읽기도 하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 유명한 <상실의 시대>, <해변의 카프카>, <1Q84> 등 제목만 알지 읽어 본 적은 없다. 심지어 우리 집에는 <상실의 시대>, <1Q84>, <기사단장 죽이기> 등 하루키의 책이 다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작가 좀 해보겠다고 비싼 돈 내고 아카데미 다니면서 필사 과제 할 때 <나는 여행기를 이렇게 쓴다>의 '우동 맛기행' 부분만 잠깐 봤었다. 그 과제 이후로 무라카미는 나에게 글만으로 음식을 질리게 한 사람으로 기억되었지. 이번 기회에 달라질까 했는데 아쉽게도 당분간 무라카미에 대한 인식이 바뀔 일은 없겠다.
두 번째 책은 고가 후미타케의 <미움받을 용기>. 이 책은 다행히 백지는 아니었으나 굉장히 인용하기 모호했다.
청년: 도대체 왜요?
아니, 차라리 "도대체 왜요?"라는 말로 시작하는 짧은 이야기도 괜찮을 거 같긴 한데. 딱히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없으니 일단 제외.
세 번째 책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이 책 역시 62 페이지 여백;; 여러 책을 뒤질 각오를 했지만, 여백 때문일지는 예상했던 바가 아니라 심히 당혹스러웠지.
이거 책 고르다 한 달 다 가는 거 아니야? 라는 걱정을 안고 펼쳐 본 네 번째 책. 한강의 <채식주의자>.
<채식주의자> P. 62
어둑한 새벽이었다. 나는 이상한 충동에 이끌려 아내가 덮은 담요를 걷어보았다. 캄캄한 어둠을 더듬어보았다. 흥건한 피도, 파헤쳐진 내장도 없었다. 옆 환자의 침대에서는 쌕쌕 거친 숨소리들이 들려왔는데, 아내는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나는 기이한 떨림을 느끼며 검지 손가락을 뻗어 아내의 인중에 대보았다. 살아 있었다.
드디어 쓸만한 문장이 나왔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금방 고민에 빠진다. 소설책에서 무작위로 정한 문단으로 시작하는 단편을 쓸 것인가, 저 문단과 관련된 이야기를 쓸 것인가. 둘 다 쓰고 싶어. 하지만 시간도 없고 내 머리가 그렇게 돌아갈까 걱정도 되고. 그래서 단순하게 저 문단을 읽고 떠오른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가끔 잠이 들지 않는 밤에 혹은 자다 깼을 때, 어둑한 밤에 혼자 있노라면 무서운 생각이 떠오르곤 했다. 천장에 매달린 귀신이 나를 쳐다보지 않을까 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는 범죄에 대한 두려움.
예전 우리 집은 복도식 아파트 맨 끝 집이었다. 가끔 거실에서 잠을 자면 부엌 창문이 바로 보였는데 밤중에 우리 집 앞을 어슬렁거리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그림자가,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당장이라도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을까, 문은 잘 잠겨 있을까 두려움에 한참을 긴장하다 잠들곤 했지.
간혹, 늦은 밤 언니나 엄마에게 연락이 닿지 않으면 불안은 귓가에 자꾸 몹쓸 이야기를 쏟아냈다. 비일비재해서 화제조차 되지 않는 여성 관련 범죄. 집에 가는 길에 죽고, 학교 가는 길에 죽고, 벌건 대낮에 납치당하고... 미디어를 통해 접한 수많은 범죄가 머릿속을 어지럽게 하다가도 에이, 그런 일이 나에게, 우리 가족에게 일어날 일 없다며 애써 환기했다. 안전 불감증일까 안전 민감증일까. 아니, 왜 범죄에 안전민감증이나 불감증을 달고 살아야 하지.
거기서 끝나는 것도 아니다. 처신을 똑바로 했었어야지, 왜 여지를 줬어, 그러게 누가 밤늦게 다니라고 했나 등 피해자를 탓하는 말이 얼마나 많은지.
그런 불안을 안고 산다고. 언제 피해자가 될지 모르고, 피해자가 된 후에도 걱정도 동정도 아닌 비난 받을 수 있다는 그런 불안을 안고 산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