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에 살면서 배우는 것 중 하나는 이곳은 관용, 그중에서도 종교적 관용이 상당히 잘 실천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ISIS멤버도 적지는 않고, 무자헤딘도 있고, 잊을만하면 폭탄테러도 일어난다. 독립 이후 계속해서 세속국가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이슬람주의자들은 이슬람 국가 건설을 위한 기회를 노리고 있다. 그러나 국가, 그리고 이곳의 주류 무슬림들인 온건파 무슬림과 가톨릭 주교회의, 개신교 교회연합 등의 주류 종교기관들은 종교적 관용이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이러한 갈등의 요소들을 틀어막고 있다.
관용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내가 동의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참아낼 수 있는 능력, 혹은 덕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유럽의 종교개혁 시기 가톨릭과 개신교가 서로 자신들의 믿음이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던 것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 것이 바로 종교적 관용의 개념이다. 이곳 인도네시아가 1945년 독립 이후 세속국가로 설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정체성을 정하던 독립을 즈음한 시기에 이슬람주의 민족주의자들과 중립적인 (이슬람) 민족주의자들, 그리고 기독교 진영에서 유일하게 포함된 한 명의 대표가 Pancasila로 대표되는 인도네시아의 국가이념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낸 공헌이 크다. 중립적인 인사들 중에는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 같은 인물들이 포함된다. 이슬람 신앙을 가졌지만 이슬람 국가를 지향하지 않는 그들은 기독교인들의 신앙도 인정했다. 자신들의 신앙과는 다르지만 각자의 신앙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서구의 종교적 관용과는 약간 다른 모델로 인도네시아의 종교적 관용은 실천되고 있다. 개인의 종교적 자유로서의 모델보다는 국가의 안정을 위한 모델로 종교적 관용이 실천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 거주하지 않으면서 인터넷 매체나 유튜브 정도로만 한국의 모습을 보다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면에서 관용이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와 다르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이 있는 것이다. 개신교 목사로서 한국에서 경험하던 신학과 목회의 스펙트럼도 마찬가지다. 포스트모던이라는 사회적 트렌드는 "절대"라는 개념을 약화시키기에, 악한 개념으로 이해하는 어른들이 많았었다.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과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은 다른데 말이다. 나 역시도 내가 동의하지 않는 생각을 가진 이들과 싸우지 않으려면 그들과 만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나의 경우 주변에 있는 90% 이상의 사람은 무슬림이다. 나와 같은 개신교인은 명목상 이 도시에서 3%가 되지 않는다. 나와 다르다고 만나지 않거나 이야기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혼합주의와 같은 말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과 대화하는 것을 막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다분히 폭력적일 수 있다. 나와 다른 그들의 생각이나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믿을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관용, 혹은 종교적 관용의 개념이다. 평범하지만은 않은 나의 삶의 자리에서, 실천적으로 배우고 있는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