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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연 Jul 10. 2021

15장. 꽃이 피는 이유

#위대한 비행 <존-날지 못하는 새>

며칠 뒤 산티아고가 제니의 소식을 전해왔다. 

제니는 얼마 전 퇴원했다고 했다. 깊은 잠에서 잠깐 깨었을 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은 병원이 아니라 엄마 아빠와의 추억이 있는 집에서 보내고 싶어 했다고 한다. 그리곤 다시 잠들었다고 했다. 그게 제니의 마지막 말이었다고 했다.   


'아!...'


귓가에 째깍째깍 거리는 희미한 벽시계 소리가 마치 마지막을 향해 달리는 심장 고동처럼 들려왔다.           


'시간이 얼마 없어...'     


◇◇◇


몸이 회복되는 대로 비행훈련을 다시 시작할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늦을 것 같았다. 제니가 별이 되기 전에 비행을 하기에는. 반드시 지키겠다 했던 '즐거운 약속'을 지키기에는...


"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창으로는 은은한 달 빛이 새어들었고 별들의 반짝임이 나를 관통했다. 끊어졌다 다시 빛을 잇는 별빛은 내게 무엇을 말하려는 듯했다. 마치 모스 부호처럼!


'음...'     


나는 누웠던 몸을 일으켜 세워 앉았다. 아직 몸이 온전하지 않았지만 더 이상 지체할 순 없었다.


'후회 없어...'


한 동안 오른쪽 어깨를 바라보다 오른쪽 어깨를 감싸고 있는 붕대를 풀어 내렸다. 오랫동안 붕대 아래 눌려 있던 깃털들이 마침내 자유를 찾은 양 하나둘씩 일어섰다. 달빛에 비친 깃털들은 잔잔한 물 위를 스치고 지나는 별빛 같이 춤추듯 흔들렸다. 날개깃 하나하나의 미세한 움직임과 떨림이 느껴졌다. 어깨에는 약간의 고통이 느껴졌지만 이제 이 고통도 얼마 남지 않았다 생각하니 참을 만했다.         


"스스륵..."     


침대 옆 서랍 제일 아랫 칸에서 비행 슈트를 꺼냈다. 며칠 전 우연히 내 비행복이 거기 있음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할머니께서 고이 세탁해 개어 두신 듯했다. 비행복은 비행 마크와 이름이 잘 보이도록 잘 접혀 있었다. 두 번 다시는 비행을 꿈꿀 수 없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다시 비행복을 보는 순간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졌었다. '존 - 신의 선물'이란 이름이 새삼 새롭게 느껴졌다. 간절한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 절명의 사고에서 다시 돌아 온건 두 번째 선물이었다. 고이 접힌 비행복을 조심스레 펼쳐 창가로 새어드는 달빛을 거울 삼아 입었다.        

"주르륵."     


옆 침대에서 잠이든 빌리 아저씨가 깨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스레 자크를 올렸지만 지퍼 마찰 소리가 고요한 병실에 울렸다. 다행히 빌리 아저씨가 깬 것 같지는 않았다. 덮고 있던 담요는 다시 고이 접어 두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까 잘 정리해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동안 누워있던 침대를 잠시 바라봤다.


'이제 이 누웠던 자리도 마지막이겠지...'


마지막으로 삐뚤어진 베개를 다시 정돈하고 돌아섰다. 뒤꿈치를 들고 걷듯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열고 나가려는 찰나였다.  


"오늘은 바람이 높구나. 절벽에서 바람을 타려면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려야 할 거야. 널 태워줄 바람이 없으니... 으음..."     


"네? 네..."     


아저씨가 불쑥 내게 던지는 듯한 말에 나도 모르게 작게 대답했다.      


'잠꼬대인가?'      


여전히 아저씨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꿈을 꾸고 계신 듯했다. 병실을 서둘러 빠져나와 절벽을 향해 걸었다. 달빛이 은은하고 별들이 반짝이는 아름다운 밤이었다. 별 꽃이 핀 밤하늘. 어릴 때부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밤 풍경. 절벽까지 길처럼 이어진 별 빛 바다를 따라 걷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생각났다. 내겐 가장 소중하고 고마운 분들이다. 생각해보면 나를 거두어 주시고 근사한 이름을 지어주신 두 분이 가장 큰 선물이었다.


'할머니...'


할머니가 병실 서랍에 비행복을 고이 접어 넣어두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언젠가 다시 한번 운명에 맞서야 할 나에게 보내는 응원과 용기였을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절벽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을 조금 무겁게 하는 이유였다. 하지만 한편으론 절벽에 설 수 있는 큰 용기를 주고 계셨다. 돌아오지 못해도 나는 두 분을 위한 별이 될 참이다.


'아. 그럼 제니는? 후훗...'        


별이 된다고 생각하니 별빛 되어 비추고 싶은 이들이 참 많았다. 그건 이 땅에서 나를 아끼고 품어 주었던 이들이 참 많았던 이유였다. 사랑하는 사람들! 그게 내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이었다. 비행학교 입학 날 산티아고와 나누었던 첫 악수도 떠올랐다. 그리고 귀여운 제니와의 만남도 약속도... 한쪽 다리의 은밀한 비밀을 가진 빌리 아저씨도... 희미한 기억 속의 엄마가 생각났다. 분명 엄마는 나를 응원해 주리라 믿었다.


'잘 자라 우리 아가. 하늘의 별도 잠이 든다네...'


엄마의 자장가가 귓가에 들리는 듯 낮은 소리로 따라 불렀다. 누구에게도 - 심지어 할아버지 할머니께도 - 말하지 않았지만 어릴 때는 가끔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보통의 새들과는 달랐던, 아니 달라야만 했던 내 운명은 유난히도 무겁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정말 모든 걸 잃은 어린 새였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 보니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더 많았다. 내 날개가 온전했다면 여느 보통의 새들처럼 - 조금은 지루하고 특별할 게 없는 - 평범한 일상을 살았을 것이다. 지금껏 경험했던 모든 것들은 한쪽 날개를 잃으면서 시작됐다. 그리고 황금 깃털... 나는 어쩌면 이 세상에서 천국의 비밀을 알고 있는 유일한 새일 지도 모른다. 꿈을 포기하지 않은 새에게 주어지는 상! 황금 깃털 이야기는 천하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빌리 아저씨도 모를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늘어놓으며 또 발바닥에 닿는 이슬 젖은 마른 잎사귀들 소리를 들으며 걷고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내 빌리 아저씨의 '은밀한 장소'에 도착했다. 적막하리 만큼 고요한 절벽. 대낮에 이곳에 섰다면 아마 두 다리가 후들거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히려 너무 환하지 않은 달 빛 조명이 다행스러웠다. 절벽 건너편 너머로는 저 멀리 밤안개가 둘러싼 산봉우리들이 보였고 그 바로 위에는 이제 막 그들만의 이른 아침을 시작한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절벽 아래로 시선을 내려 보았지만 그 끝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곳까지는 비쭉 빼죽한 칼바위들이 중간중간 튀어나와 있었다. 강하 도중 저런 칼바위에 스치기만 해도 치명적일 것이다. 다시 시선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너무도 평안한 구름 몇 점 없는 하늘. 바람의 흔적만 남은 고요...

 

'아저씨는 오늘 바람을 어떻게 알고 계셨을까? 내가 이곳으로 올 것까지도...'


분명 나는 밤이 되기까지 잠들지 않았고 나보다 늦게 잠이든 아저씨는 한 번 도 병실을 나가지 않았었다. 그런데 '오늘은 바람이 높구나.'라고 하셨던 말씀은 정말 우연이었을까? 끝까지 내겐 수수께끼 같은 아저씨다.


'새들은 죽으면 영혼이 날아올라 하늘의 별이 된다.'


어릴 땐 그 말을 온전히 믿지 않았었다. 새들이 그렇게 믿고 싶어 그런 믿음을 만들어 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이 세상 너머의 비밀을. 그건 사실이었다.  


'... 그리고 안녕. 제니!'


마지막으로 제니에게 인사했다. 끝내 제니를 못 본 것은 아쉽지만 그렇다고 슬프진 않았다. 우린 곧 별이 되어 만날 테니까.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아이가 말했던 '운명'으로 말이다.  


'후우...'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나서 마지막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모든 게 좋았다!'


눈을 감고 마지막 말을 속으로 툭! 던졌다. 그리고 그 말처럼 가볍게 공중으로 힘껏 도약했다. 머리가 숙여지면서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점점 속도가 붙더니 총알처럼 바닥으로 돌진했다. 온몸에 느껴지는 공기의 저항과 귓가를 스치는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훈련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엄청난 속도감이었다. 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아직은 아니야!'


빌리 아저씨의 말이 맞았다. 바람이 없었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려야 했다.


'흡!'


직감적으로 절벽 아래 지면이 가까워졌다는 게 느껴질 때쯤 마지막 순간을 위해 눈을 떴다.


'10미터!'


'5미터!'


'3미터!'


'바로 지금!'


온 힘을 다해 두 날개를 펼쳤다. 다행히 오른 날개도 활짝 펼쳐졌다.(아마도 엄청난 바람이 날개를 파고들면서 스스로 활짝 펼쳐지게 도왔던 것 같다.) 극심한 고통이 있었겠지만 엄청난 속도 탓인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날개깃 전체를 이용해 플랩을 모양을 만들었다. 마침내 떨어지는 속도만큼이나 큰 양력이 나를 아래에서 떠 받치기 시작했다. 그 충격에 두 날개는 떨어져 나가는 듯했고, 겁 없이 중력을 거스른 내 심장은 터질 듯했다. 그리고 드러난 땅바닥!


"스으윽!"


뱃깃털이 땅바닥을 스치면서 낙하의 정점을 찍고 로켓처럼 다시 하늘로 솟아올랐다.


'날아올랐어! 날아올랐어!!!'


내 온몸이 엄청난 속도로 하늘을 향해 솟구치고 있었다. 엄청난 속도에 눈물이 바람에 묻어 떨어져 나갔다. 떨어지는 속도만큼 빠르게 절벽 위까지 치솟아 올랐다. 순간 바람이 없는 날 나비가 날 수 있었던 것이, 날수 없는 날 스스로 바람을 만들어 냈다는 것을 완벽하게 이해됐다. 내가 절벽에서 뛰어내리기 전까지 바람은 없었다. 내가 자유 낙하한 순간부터 멈추어있는 공기를 가르면서 서서히 바람이 만들어졌다. 속도가 더해질수록 바람은 더욱 일었고 마침내 날개를 펼쳤을 때 내 몸을 띄울 만큼 큰 바람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나를 날개 할 만큼의 완벽한 바람이!     


중력에 다시 끌려 속도가 정점에 이르고 가속도가 줄어들 때쯤 날개 짓을 더했다. 그리고 날아오르고 또 날아올랐다. 기쁘고 또 기뻤다. 날 수 있는 새로 태어난 순간! 이 기쁨은 어떤 말로도 형언할 수 없었다. 심장이 터져도 좋을 만큼 흥분된 나는 이대로 별이 되어도 좋을 것 같았다. 이대로 저 반짝이는 별까지 날아가도 좋을 것 같았다. 엄마가 있는 곳으로. 어쩌면 아빠가 있는 곳으로...


'휘오잇!'


밤하늘을 가득 담은 눈을 스치는 빛의 소리! 절벽 위를 한 참 올라섰을 때 하늘에는 꼬리를 길게 끄는 별똥별이 하나 떨어졌다. 환상적이고 아름다웠다. 오늘 밤하늘은 땅에서 보던 보통의 하늘이 아니었다. 날개 아래로는 달 빛 아래 고요한 숲과 마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 이 비행은 아무도 믿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조차도 믿을 수 없을 테니까! 힘찬 날갯짓으로 마을을 몇 번이나 돌고서 병원 근처 공터에 조심스럽게 착지했다.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고 있었고, 첫 비행의 감격과 희열이 터져 올라왔다.


'됐어! 존. 됐어!'     


◇◇◇


여전히 떨리는 마음과 흥분을 애써 가라 앉히며 병실로 돌이켰다.


'후우... 후우...'


쉽사리 진정되지 않은 마음을 심호흡으로 한 번 달래곤 병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아직은 누구에도 말하지 않을 거야. 제일 먼저 제니에게 전하기 전까지는...'


병실에 들어서면서 제니에게 제일 먼저 이 기쁜 소식을 전하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빌리 아저씨가 깰까 봐 창가 쪽 내 침대로 조심조심 걸어갔다.


'응?'


조금 허전한 기분이 들어 병실 문쪽에 있는 아저씨 침대를 보니 아저씨가 자리에 없었다.


'엥? 혹시 몰래 비행을 나가신 건가?'


아저씨의 잘 펼쳐둔 침대보 아래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웬 빛이 침대보 아래서?...'


조심스레 아저씨의 침대로 가 침대보를 들춰 보았다.


'아! 이건...'


황금 깃털이었다. 꿈에 봤던 그 황금 깃털!


'그런데 황금 깃털이 어떻게 여기에...'


혹시 하는 마음에 여전히 달빛 드리운 창가를 바라보았다. 화분에 오랫동안 봉우리 져 있던 꽃, 그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활짝 핀 꽃을 바라보았다. 황금 깃털을 손에 쥔 채... 활짝 핀 빨간 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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