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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연 Nov 29. 2020

울지 마 아빠...

아홉 살 둘째가 울게 했다.  

우리는 다시 셋이다. 


이 팬데믹 난리 통에 아내가 불가피하게 카자흐스탄으로 해외 출장을 떠난 지 어느새 한 달여... 

나는 다시 열두 살 된 큰딸과 아홉 살 된 둘째 딸과 함께 긴 시간을 보내야만 하는 현실에 다시 직면했다. 슬픈 일이다. 아직 두어 달을 이렇게 지내야 한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미 올해 이 난데없는 팬데믹으로 6개월간 아내와 생이별하고 살았던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 우리 셋은 마치 앞니 빠진 아이처럼 어색하고, 중요한 것이 결핍된 불편한 일상을 나름 즐겁게 또 즐기려 하고 있다.     




"아빠, 난 오늘 할머니 댁에 가서 자고 올게."

"그래, 알았어. 그런데 혼자만? 동생은 같이 안 간데?"

"어. 예인인 안 간데."


큰 딸은 현관 앞에서 늘 그렇듯 잠시 헤어짐? 의 뽀뽀를 나누고, 무려 세 번이나 포옹을 하고서야 현관문을 나섰다. 마치 수년은 못 볼 것 같은 그런 과격한? 작별인사는 아빠의 곁을 아주 잠시 떠나는 그의 속 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것이 큰딸의 아빠 사랑의 표현이다. 정말 큰딸은 엄마보다 아빠가 더 좋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아이다. 


51:49!


이것이 큰딸이 말한 '아빠 : 엄마'의 호감도 비율. 왠지 아빠 기분 좋으라고 조작된? 숫자인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스코어다. 재밌는 건 그런 스코어에도 불구하고 엄마와 더 가까이 지낸다. 아무튼 그렇게 큰딸은 오늘 저녁, 밤은 우리 '삼총사'에서 잠시 휴가다.   


'음... 내일 갔으면 더 좋았을 텐데...'


조지에서 살다가 한국에 들어와 팬데믹이 지나가기까지 당분간 가족을 부양할 직장을 구했다. 주 6일, 새벽 4시 30분에 기상, 출근해서 집에 돌아오면 저녁 7시나 늦으면 9시에 퇴근하는 루틴. 간략하게 말하자면 아주 치열한 삶이다. 그러다 보니 평일에는 겨우 한두 시간 남짓 아이들을 볼 수 있다. 오로지 내가 기다리는 건 토요일 저녁! 우리 '삼총사'가 함께 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유일한 날이다. 그러다 보니 오늘 토요일 저녁, 큰 딸이 할머니 댁에 가서 자겠다니 이상하게도 조금 섭섭했다. 그래도 현관문을 나서기 전 큰 딸의 포옹과 제스처는 적잖은 위로가 되었다.     




큰딸이 현관을 나설 때 둘째는 벌써 잠옷으로 갈아입고 왠지 평소보다 조금은 무거운듯한 표정으로 조용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둘이 싸웠나? 싸우는 일이 거의 없는 아이들인데...'


"딸, 너는 언니랑 왜 같이 안 갔어?" 

"음... 그냥... 아빠가 외로울까 봐... 내가 언니랑 가면 아빠가 혼자 자야 하잖아. 아빠랑 같이 있어 주고 싶어." 

"그랬구나... 고마워! 그럼 오랜만에 우리 노트북으로 영화 볼까?"

"좋아! 그럼 난 어서 가서 이불깔께!" 


침대가 없는 우리는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잔다. 언제부턴가 이불을 깔고 개는 일은 막내가 도맡았다. 방바닥에 넓게 두 겹으로 두꺼운 겨울 이불을 까는 일은 아직 여린 아홉 살 딸아이에게는 힘에 부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 저녁으로 불평 없이 해 주는 아이가 너무 대견하다. (참고로 큰 딸은 청소, 둘째는 이불 펴고 개기, 나는 그 외의 빨래와 요리, 설거지 등을 담당한다. 그것이 우리 삼총사가 서로의 짐을 나누며 아름답게 공존하는 방법이다.)    



"아빠. 이불 다 깔아놨어, 이제 영화 보자!"

"그래, 그럼 무슨 영화를 볼까?"

어떤 영화를 볼지 '함께' 결정하는 과정은 아주 중요하다. 아빠와 딸이 함께 보아 즐거운 영화여야 한다. 아홉 살 딸과 마흔이 넘은 아빠, 또 서로의 취향에 너무 치우치지 않는 영화를 찾는 것은 분명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하지만 굳이 그런 인고의 과정을 거치는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서로가 만족스러운 영화를 함께 볼 때 우리는 함께하는 시간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의 엔딩에 다다를 때쯤엔 마치 여행을 마친 후 그 이야기를 나누는 것 못지않은 '공통의 추억'이 생긴다. 우리는 영화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영화 속 인상적인 장면들과 의미 있는 사건들을 되짚어 본다. 딱딱한 토론이라기 보단 서로의 느낌을 반대 없이 나누는 정도. 영화는 그래서 우리가 좋아하는 '안방 여행'이다.  


"음... 어린이 영화가 아빠한테 재미없으면 그냥 어른들이 보는 코미디 영화도 괜찮아."

"그래? 그럼, 오늘은 이걸 볼까?"

"음... 그래. 그걸로 보자. 아빠가 좋다면... 그런데 '트롤'로 참 재미있을 것 같아.. 이번에 새로 나왔데. 지난번 트롤도 재미있게 같이 봤잖아! 아니다... 그냥 아빠 보고 싶은 거 봐. 트롤은 너무 어린이 영화니까."


아빠를 배려하는 아이의 마음이 읽혔다. 그러면서도 자연스레 자신의 의견을 이어갔다.  

 

"그럼, 트롤 보자. 사실 아빠도 보고 싶었어!"

"괜찮겠어? 그냥 코미디 영화 봐도 되는데... 그런데 아빠도 좋다면 트롤이 좋을 것 같아. 사실 너무 보고 싶었거든..."

"그래. 그래..."




같이 오붓하게 영화를 보고 나서 둘째가 미리 펴둔 이부자리에 누웠다. 아직 화려한 애니메이션의 잔상이 남아 이런저런 얘길 나누었다. 나는 방이 좀 더운 것 같아 이불을 덮지 않고 누웠는데, 갑자기 딸이 이불을 내게 내 밀어 덮었다.


"아빠, 이불을 덮고 자야지!"

"어... 그래. 고마워..."


둘째는 아내가 했었던, 어쩌면 아내보다 더 아내 같은 역할을 해주고 있다. 언제 이렇게 커버렸을까 대견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너무 빨리 커버리는 건 아이가 아이로서 누려야 할 행복을 줄여버린 것 같아 마음이 짠하다. 




불을 끄고 자리에 누운 딸아이는 그동안 감추어 두었던 아픔을 꺼냈다. 

"아빠 사실 난 가끔 내가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

"응? 사라져 버려? 왜?"

놀랐다. 둘째에게서 이런 얘길 처음 듣기도 했거니와 '사라져 버린다'라는 표현이 가슴을 철렁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늘 밝고 유쾌한, 장난기 넘치는 둘째에게서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을 상상도 못 했다. 


"너무 많은 여행... 그러니까 우리가 여러 나라를 이사 다녔잖아... 좋기도 했지만 힘들었어. 그리고 친구도 학교도... 학교에서는 우리를 괴롭혔던 아이도 있었어..."


그리고 아이는 그 기억이 문득 생각나 서러웠는지 누운 채 눈물을 흘렸다. 불이 꺼진 어두운 방이었지만 아이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건 창 문으로 들어오는 별 빛이 눈물을 비추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코를 훌쩍이며 나 쪽으로 돌아누워 내 손을 잡았다. 딸아이의 손을 잡은 나도 눈물이 흘렀다. 괜히 미안했다. 뭐라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우리는 손을 잡고 또렷이 보이지 않는 서로를 바라보며 촉촉해진 얼굴을 더듬었다. 


"그래. 그랬구나... 우리 딸 많이 힘들었지..."

"지금은 괜찮아..."




"세월이 흘러가고 우리 앞에 생이 끝나갈 때..."

삶이 복잡하다 싶을 때 자주 듣는 또 아이들과 함께 부르는 노래가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왔다. 


"누군가 그대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면..."

자연스레 딸이 눈물에 목이 메인 낮은 목소리로 다음 소절을 이어갔다.

서로는 다시 손을 꼭 잡고 또 눈물이 흐른다. 

 

"대답할 수 있나. 지나간 세월에 후회는 없노라고... 그대여...."

마지막 소절은 함께 불렀다. 


이 짧은, 어지러운 그러나 가장 의미 있는 아름다운 생을 함께 살아가는 

아빠와 딸로서

서로의 기댈만한 위로자로서

그렇게 우리는 손을 꼭 잡은 채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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