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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영 Jul 29. 2020

이터널 선샤인

셋넷 영화이야기 19 : 다름


부디 잘 가라, 사라질 기억들아!     


별 볼일 없는 하루가 다시 시작된다. 아무런 느낌 없이 출근하던 남자는 자신의 차에 거친 흠을 낸 이웃에게 따지지도 못할 정도로 소심하다. 억울한 심정에 휩싸여 갑자기 출근길 반대 방향 열차를 탄다. 우울한 심정으로 겨울 바다를 서성이다 오렌지색 옷을 입고 현란한 머리 염색을 한 여자를 우연히 만난다. 좋아하는 심정을 드러내지도 못한 채 변변히 눈 한 번 맞추는 것도 어색해하는 남자와는 달리, 여자의 감정표현은 거침이 없고 옷차림은 당당하고 도드라진다.      


너무 다른 모습에 황급히 빠져들고 허기진 사랑에 허우적대지만, 어느새 아름다운 다름의 매력이 낯설어져서 당황스럽다. 여자와 남자는 원하지 않는 기억을 선별적으로 삭제해주는 회사를 통해 사랑의 기억을 지우고 서로의 존재를 기억 밖으로 내치지만, 집요한 기억의 경계에서 문득문득 서성거린다. 무너지는 기억의 낡은 조각을 움켜잡고 다시 화해하자고 간절하게 요청하는 남자에게 여자는 덤덤하다. 곧 다시 서로의 다름을 비웃고 거슬려할 것이고, 낯선 삶의 표정들을 한없이 지루해할 거라고 건조하게 말한다.   

   

우리 기쁜 젊은 날 사랑의 정체는 '나와 다름’이었다. 다름이 신선해서 금방 눈에 띄었고, 다름으로 뭔가 지리멸렬한 삶이 각성되곤 했다. 출구를 잃어버린 현실을 보다 고양된 곳으로 이끌어줄 것만 같아 은밀하게 빠져들었다. 관습과 시선에 갇힌 인간관계와 안전한 닮음들 속에서 감동 없이 살다가,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그 다름을 달콤한 휴식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다름은 햇살처럼 다가와 어느덧 사랑으로 거대한 장막을 치곤 했다.

      

하지만 햇살에 익숙해질 때면 서늘한 그늘을 그리워하듯, 다름이 지겨워지고 편안하던 다름 하나하나가 낯설어지고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사랑의 기억을 조작하고 왜곡시켜 벗어나려 하지만, 또 다른 다름에 빠져들고 후회하게 된다. 어쩔 도리가 없다. 사랑이란 게 어차피 햇살 같은 거다. 우리에겐 영원한 햇살이 필요하니 니 마음을 바꿔보라고 영화는 노래한다. '애달파하지 말아. 기도만 허락될 뿐이라잖아. 그러니 소망은 편하게 내려놓으라고.' 잘 가라, 사라질 사랑아! 따뜻한 기억들아!

.................

또 우울한 어떤 날

음 비마저 내리고

늘 우리가 듣던 노래가

라디오에서 나오면

나처럼 울고 싶은지

왜 자꾸만 후회되는지

나의 잘못했던 일과 너의 따뜻한 마음만 더 생각나

- 나와 같다면, 김장훈


* 제목 사진 : 2015년 독일 통일 25주년 기념 셋넷공연을 마친 뒤 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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