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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영 Aug 05. 2020

춤추는 숲

셋넷 영화이야기 20 : 공동체


사람들 사이에 숲이 있다그 숲에 가고 싶다.


이제는 문득문득 지난 시절들을 돌아보게 된다. 몸도 예전 같지 않고, 흰머리도 언뜻 비추고, 술 마시면 금세 비틀거린다. 괜스레 서럽고, 사소함에도 노여움을 탄다. 아차 싶은데 시간은 나를 주저 없이 앞지르며 저만치 제 멋대로 달아난다. 보고 싶고 그리운 이들이 자주 떠올라, 이유 모를 서러움에 젖어들곤 한다.  

    

잠깐씩 돌이켜 보는 짧지 않던 삶의 기억들은, 돈의 그물망을 뚫고 사람의 마을을 찾아 헤맨 유쾌한 길 여행이었다. 관계의 섬들 속에 이런저런 대안의 이상향을 궁리했던 몸부림이었다. 살아가노라면, 자신이 원하지 않고 기대하지 못했던 뜻밖의 운명들로 이끌리는 게 아닌가 싶다. 그 삶이 자신이 선택한 사람의 마을이든, 어쩔 수 없는 체념으로 얽힌 돈의 그물망이라 할지라도 고단하고 낯선 길은 분명하다. 그럴 때 위로받고 서로 보듬어 주는 자기만의 숨겨진 숲을 찾게 된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택했던 세속의 직업에서 가까스로 탈출하여, 90년대 이후 꾸몄던 따또 난나 똘배 셋넷 학교들이 나의 숲들이었다. 내게 대책 없는 용기를 주었고, 자본주의 시장 밖에서 세우려 했던 황당한 꿈에 믿음을 심었고, 지칠 때면 재충전과 쉼을 허락하던 나만의 숲이었다. 그 숲들 속에서 수많은 빛의 사람들과 만나 성스러운 춤들을 걸지게 추면서 어둡고 질긴 삶의 터널들을 견딜 수 있었다.   

   

셋넷 아이들과 함께 보았던 영화 속 ‘성미산 마을 사람들’에게, 도시 속 보잘것없는 외딴섬 성미산 숲이 바로 그런 존재가 아닐까 싶다. 메마른 도시 속에서 착한 마을을 꾸리고 순한 공동체를 엮어가던 이들에게 개발의 유령이 도적처럼 덮치자 어쩔 수 없이 미친 고래와의 싸움을 시작한다. 하지만 도시화와 현대화에 갇혀 옴짝달싹 못한 채 초라해진 성미 동산처럼, 예정된 패배의 수순을 감당해야만 한다.    

  

홍익재단이 사학의 이름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사들인 성미산 땅에 학교를 짓겠다며 꼼수로 서울시의 허가를 따내고, 내 땅이라며 무작정 불도저와 엔진 톱을 들이댄다. 성미산 공동체 사람들은 한 사람씩 나무를 부여잡고, 교대로 숲을 지켜보지만 세상은 이들의 간절함을 외면하고, 숲은 속수무책 무너져간다. 결국 150일간의 싸움은 법원 판결로 마무리되고, 공동체는 다시 회색빛 일상으로 돌아간다. 생명으로 그득했던 성미산 자락이 허물어지고, 뿌리를 드러낸 나무 한 그루에 흙을 뿌리는 성미산 공동체 아이의 모습은 인간의 헛된 탐욕을 사죄하는 고해성사 의식처럼 아프게 다가온다.      


“생명에는 주인이 없잖아요?” 그들의 패배는 이상하게도 슬프지 않고 우울하지 않다. 풀빛 같은 성미산 공동체 아이들과, 동물농장 별명을 지닌 부모들과, 동네 노인들이 뒤섞여, 웃고 수다 떨고 손뼉 치며 명랑하게 노래한다. 무모하고 대책 없는 성미산 숲의 합창이 마포의 하늘 길을 뚫고 온 지구의 숲들로 향한다. 비틀즈의 노래 [렛잇비]를 개사한 유쾌한 노랫말이 사람들 사이로 그물망처럼 이어진 숲길을 따라 슬픔 없이 행진한다. ‘좋은 말로 할 때 냅 도유!’ 숲이 춤춘다. 그 숲에 가고 싶다. 



*제목 사진 : 2020년 2월, 7차 한반도 평화원정대 치앙라이 소수민족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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