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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영 Aug 12. 2020

님은 먼 곳에

셋넷 영화이야기 21 : 아버지


집으로 가는 길


아버지는 직업군인이었다. 갈라진 땅 최전방을 수색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아버지가 한국전쟁 때 설치되었던 부비츄렙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 나는 엄마 뱃속에서 처음으로 죽음을 만났다. 군 헬기로 긴급 이송된 수도통합병원에서 가망 없다고 흰 가운을 덮었다는데, 아버지는 기적처럼 살아나 월남(베트남)으로 향했다. 1965년 맹호부대 1진으로 전투 중대를 이끌고, 1년 6개월간 사망자와 행방불명자 명단에 바삐 오르며 맹활약하셨다. 덕분에 별 소득 없는 훈장들만 주렁주렁 매다셨지만, 4살이던 나는 또다시 죽음과 마주해야 했다.       


영화 <님은 먼 곳에>는 기억 저편 죽음을 넘나들던 아버지를 소환한다. 4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마장동터미널에서 철원 문혜리로 향하는 시외버스를 탔다. 철책선 지역으로 향하는 길들이 비포장이고 구불구불 엉망이라 5시간 가까이 가야만 했다. 대대장 관사에 도착하자마자 군 전화로 도착인사를 드렸는데, 대뜸 “불러봐.” 하셨다. 성적표에 한 과목 ‘우’라도 있을라치면 바로 전화를 끊으셨다. 그랬던 아버지가, 내 생일날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용돈과 함께 긴 손 편지를 써서 휴가 나오는 병사 편에 보냈다.    

  

베트남 전쟁은 강대국 탐욕에 굴하지 않는 약소국가의 깡과 의지를 전 세계에 보여준 상징적 대결이었다. 결국 강자가 일방적으로 결정한 정의와 평화가 얼마나 허구인지를 생생하게 드러낸 싸움이었다. 베트남 전쟁의 비극은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던 베트남 민중들의 애통한 죽음과 가족 파괴에 있다. 하지만 절대 강대국들의 깡패 짓거리가 지구 곳곳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베트남의 애끓는 슬픔은 전 지구적인 아픔으로 생생하게 이어져있다.   

   

노모의 간절한 성화에 못 이겨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한 3대 독자 남자는, 애인에게 버림받고 도피하듯 베트남 전쟁 파병부대에 지원한다. 그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전쟁터로 향했던 여자는 명분 없는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게 된다. 남편을 만나기 위해 급조된 한국군 위문공연단 여정에 끼게 되지만, 그 와중에 베트콩으로 불렸던 남베트남 독립 해방군에게 잡혀 심문을 당한다. 공연단 리더가 우린 돈 벌러 왔고 한국군은 평화를 위해 왔다고 답하자, 해방군 대장이 너희에게 평화가 뭐냐며 권총을 들이댄다. 삶과 죽음이 오가는 일촉즉발 살벌한 상황에서, 얼떨결에 공연단 싱어가 된 주인공 여자가 말도 통하지 않는 베트남 사람들에게 노래한다. ‘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랬지. 님이 아니면 못 산다 할 것을. 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랬지. 망설이다가 가버린 사랑...’ 그녀에게 평화는 머뭇거리다  놓쳐버린 애타는 사랑이었을 뿐이다. 그녀의 평화는 거창하지도 거룩하지도 않았다.

    

50여 년 가까이 몸속에 숨어있던 부비츄렙 조각들이 낡은 아버지를 갑자기 쓰러뜨렸다. 아버지 사진첩 흑백사진에는 전투 후 노획한 베트콩 깃발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건장한 장교가 있었다. 사진의 뒷면에는 ‘내 사랑하는 반의 반쪽 상영에게’, 어쩌면 마지막 유언이 되었을지도 모를 글씨가 적혀있었다. 아버지는 역사적 흐름을 꿰뚫고 월남에 갔던 건 아닐 것이다. 그저 용병으로 가서, 자신과 가족을 위해 죽음의 경계들을 넘나들며 생존의 시간을 본능적으로 견뎌냈을 것이다. 1965년 베트남 정글을 헤매던 아버지의 평화와, 1944년 핀란드 숲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아버지 병사들(영화 언노운 솔저)의 평화와, 남편을 찾아 머나먼 땅에서 수지큐를 불렀던 그녀의 평화와, 돈도 없고 빽도 없어서 전쟁 소모품이 된 대니보이들의 평화는, 먼 곳에 있는 님에게 돌아가기 위한 간절한 전투였다. 세상 모든 아버지들이 자신의 반쪽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 몸부림쳤던 정의로운 싸움이 전쟁의 참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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