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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영 Apr 07. 2021

자산어보

셋넷 영화이야기 55 : 설렘


벗을 깊이 사귀면 내가 더 깊어진다.


20년 넘게 공무원 생활을 한 수진이가 책(2050년 공원을 상상하다/한숲)을 냈다. 그의 업무에 대한 상상력과 창조력은 수동적이고 복지부동하는 철밥통의 늪에서 버텨야 한다. 200년 전 정조가 어찌 알았을까. 시대를 앞서는 신하에게 부디 버텨서 후일을 도모하라는 왕의 뜻을 몸으로 새긴 정약전은 배교를 해서라도 살아남아 뜻을 이루고자 했다.


오늘날 공무원은 국민을 위한 국가정책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공복이지만, 200년 전 공무원은 국민을 논밭 삼아 죽은 자와 갓난 아이에게서도 무자비하게 갈취를 하는 권력자로서 부와 명예와 권세를 몽땅 거머쥐고 한없이 군림했다. 그래서 흑산을 떠나 입신양명(立身揚名) 하고자 했던 어부 창대에게 약전은 일침을 놓는다. ‘공부 좀 했더니 권력도 얻고 싶고 재물도 탐이 나더냐?’


서학으로 불리던 천주교의 평등 교리에 감화되어 유배를 떠나는 형제는 남도의 갈림길에서 시를 나누며 애틋한 정과 막막한 심경을 어루만진다. 당시 한양에서 강진 유배는 땅 끝으로 밀려 잊히는 것이건만, 동생은 뭍에서조차 떠밀려 망망 바다 섬 흑산으로 유배 가는 형이 못내 안타깝다. 안개 자욱한 길로 흩어지는 형 약전은 무심하게 아우 약용을 위로한다. ‘낯선 곳으로 가니 설렙니다.’  

   

약전과 약용은 유배지에 갇혀 있지만 공부 글과 안부의 시로 오가며 형제의 우의는 맑고 푸르렀다. ‘벗을 깊이 사귀면 내가 더 깊어진다.’ 흑산의 낯섦에 대한 약전의 설렘은 미사여구가 아니었다, 양반이자 학자이면서도 천민인 어부들에게 궁금함을 감추지 않았다. 200년 전 단단했던 유교 질서를 떠올린다면 약전이 <자산어보>를 채워가는 과정은 가히 혁명적인 도전이었다.   

   

뭐땀시 냄새나는 생선에 쓰잘 데 없는 관심이 많냐고 핀잔을 주는 흑산의 청년 어부 창대에게 약전은 일갈한다. ‘질문이 공부다. 외우는 공부가 나라를 망쳤다.’ 영화는 단박에 200년의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우리의 뒤통수를 후려쳐서 정신이 번쩍 들게 한다. 질문이 사라진 나라에서 설렘은 먼 나라로 유배를 떠났고, 달달달 외워 입신양명하는 기술자들이 판치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    

  

약전이 흑산에서 어두워가는 조선의 미래를 예견한 것처럼, 질문과 설렘들이 거세당하고 닥치고 외워 가문의 영광을 위해 영혼을 끌어 매진하는 200년 뒤 조선땅 대한민국이, 구한말 초라하게 침몰하는 조선의 운명과 뭐가 다를까... 그럼에도 나의 밤 기도는 길고 한마디 말만 되풀이한다. ‘상관치 않으리라 저 문 아무리 좁고 명부에 어떤 형벌이 적혀있더라도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요 내 영혼의 선장일지니.(인빅터스)’

 

입신양명을 우습게 아는 공무원 아우 수진이가 건넨 책갈피에 길에서 만난 형에게 주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사라지기까지 쓸쓸하지 않기. 건강하게 푸르름을 즐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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