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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리 Jun 09. 2019

내가 선택하지 않은 정체성

이름을 부여받는다는 것

한때 이름을 바꾸고 싶어 했다. 내 이름 두 글자 모두가 한국에서는 여성에게 주로 사용하는 글자라는 사실이 못마땅했다. 내 이름이 너무나 ‘여성스럽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할 수 없는 이름으로 바꾸리라 다짐했다. 그럼에도 내가 날 때부터 썼던 이름이 무엇이라는 사실은 바꿀 수 없었다.


이름은 신체처럼 완벽하게 선천적인 요소가 아니었다. 사람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했다. 그런 이름조차 다른 이가 지어준 이름,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이름으로 유년기를 보내야 했다는 게 불만스러웠다. 난우남을 알기 전까지는 그랬다.


난우남은 난우 파출소에서 발견된 남자 아기라는 뜻이다. 난우남은 2015년 서울의 어느 베이비박스에서 발견됐다. 당시 파상풍 감염 위험이 컸기 때문에 병원으로 보내졌다. 뇌병변장애가 발견되었으므로 다시 다른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 동안 아기는 이름 대신 ‘무명 난우남’으로 불렸다.


가족이 없기 때문에 성을 창설해야 출생 등록을 할 수 있었다. 복잡한 행정절차를 거치는 몇 개월 간 아기는 나라에 등록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복지 지원을 받지 못했다. 아기는 3살이 되어서야 이우민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중앙일보 특별취재팀, 「이름 없는 3살 아기, ‘난우남’을 아시나요」, 2018.01.11.)


이름이 없다면 타인들이 나를 식별할 수 없다. 국가에서 나를 국민 데이터베이스에 등록해 관리하고 지원할 수 없다. 학교에 입학할 때, 회사에 취직할 때, 병원에서 치료받을 때, 자격증 시험에 응시할 때, 심지어 도서관 대출증을 만들 때조차 나는 신분증을 제시해야 한다.


날 때부터 성과 이름과 주민번호가 있었던 나는 내 존재를 증명하는 일이 곤란했던 적이 없다. 갓난아기인 내게 부모가 이름을 지어준 덕분이었다. 내가 한때 불만을 가졌던 그 사실 덕분에 나는 문제없이 살아올 수 있었다.


이름은 곧 내가 선택한 적 없는 정체성이다. 이름에는 나름의 의미와 어감이 존재한다. 어떤 이들은 이름에 따라 운명마저 바뀐다고 믿는다. 나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은 진정 자유로운 삶을 방해할 뿐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때로 남이 정해준 것 덕분에 나는 무사히 생존해 올 수 있었다. 내가 인간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가족이 누구인지, 어디에 소속되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정체불명의 인간은 공동체에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유년 시기가 긴 종(種)인 한, 공동체에서 거부당하는 무명의 상태는 곧 생존의 위협이다.


난우남 아기와 수많은 무명인의 삶은, 때로 타인에게 부여받은 정체성 덕분에 살아갈 수도 있다는 역설을 알려준다. 이름 외의 다른 정체성도 정해진 삶은 어떨까 생각해 본다. 내가 무엇이 되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면, 예를 들면 이어받을 가업이 있거나 나의 신분 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정해져 있다면 어떨까.


사실 전근대 사회가 그렇지 않았던가. 옛사람들은 모두의 역할이 정해진 구조를 ‘질서’라 불렀다. 현대 사회는 인류가 ‘운명이 정해진 삶’과 ‘운명을 만들어가는 삶’ 사이에서 부단히 고민해 온 결과다. 우리는 속박당하는 삶을 거부한 대신, 삶은 각자 알아서 만들어가야 할 뿐이라는 허무 속에 살아간다. 어쩌면 아직 이름이나마 타인이 지어준다는 건 다행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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