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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찌네형 May 26. 2021

(#2) 라떼는 말이지......

1980년도 국민학교 시절

우선 국민학교라 하겠다. 다소 촌스럽게 들리겠지만 여기서만큼은 그렇게 쓰련다.


나는 83년도에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지금은 나름 부촌으로 불리는 서초구의 한 국민학교를 다녔다.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닌게, 학교는 그때와 비교해 그러게 많이 달라지진 않아보인다.  신기하게도 그 당시 문방구가 아직도 있으니 말이다.


사실 국민학교때의 기억은 많지 않다. 뭐 그리 특별한 일도 없어서 일지 모르겠지만, 나이가 들어서인지, 학창시절의 몇 가지 이벤트만 떠오를 뿐, 많은 기억은 이미 20대 이후의 기억과 바꾼지 오래다. 그래서, 이글을 쓴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학교에서는 폐품을 걷었다.

당시에는 다들 신문을 종이로 보던 시절이라, 집집마다 신문지가 쌓여 있었다. 또한, 우유팩들도 많아 지정된 날에 한번에 모아 학교에 가져가곤 했었다. 문제는, 왜 폐품을 안가져오면 선생님에게 혼났는지 모르겠다. 개개인에게 할당량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안가져가면 혼났던 기억이 있어서, 많이 가져온 애들것을 나눠 가지기도 했었고, 없는 폐품을 모으러 동네를 두리번 거렸던 기억도 있다.


체육복은 하얀색이다. 위아래 하얀색. 다소 촌스러워 보이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그 체육복이 좋았다. 몇몇 사립초등학교를 다니던 주변 친구들은 왼쪽 가슴에 그 학교 마크가 붙어 있는, 나름 색깔있는 체육복을 입었던 기억이 있지만 말이다. 운동화에 딱히 규정은 없었지만, 학교앞에서 파는 런닝화라고, 천으로 만든 가벼운 운동화가 당시 2천원에 팔렸었다. 나도 너무나 그 신발이 신고 싶어, 엄마에게 졸랐던 기억이 있다. 다만, 천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운동장 흙바탁을 몇 번 뛰고 나면, 뜯어지기 일쑤였다.


지금의 급식과 달리, 당시에는 4학년부터 오후시간표가 있었고, 자연히 점심을 싸왔다. 도시락통은 코스모스라는 회사에서 만든 검은통의 국산도시락이 대다수였지만, 보온이 그리 좋진 않았다. 맨 밑에 국통이 있고, 스테인리스로 만든 밥통이 그 위로 올라온다. 그 위는 반찬통이다. 몇몇 잘나가는 아이들은 보따리상들이 일본에서 가져온 작은 코끼리 도시락을 가지고 다녔다. 당시 반포일대에 외국제품을 파는 가게가 많았는데, 분명 그곳에서 사왔을거다. 보온도시락중에서 유독 큰 게 있는데, 그건 도시락통 안에 유리가 들어있다고 했다. 워낙 크고 무거웠지만, 점심시간때 김이 솔솔나는 밥을 먹을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유리였기에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내구성이 너무 약해 자글자글 유리깨진 소리가 들렸다.


2째시간이 끝나고 였는지는 기억이 없지만, 우유당번이 초록색의 통에 담긴 우유를 가지러 갔다. 이 우유급식도 반마다 나름 할당이 있었는지,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이 우유를 신청했었다. 우유는 서울유유로 종이팩이다. 걔중에는 우유를 신청은 했지만, 마시지 않는 아이들이 더러 있어, 항상 남았던 기억이 있다.


겨울이 되면, 교실 가운데 난로를 피웠다. 석탄은 당번이 매일 가서 일정량을 받아오는 시스템이었다. 난로위에 올려진 주전자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던 기억과, 효과를 알 수는 없지만, 10원짜리 동전을 올려놨던 기억이 있다. 이것도 국민학교 초반이 아니었을까 싶다.




책상은 항상 반으로 선이 그어져 있었다. 또는 뭔가로 갈은 것 처럼 홈이 파져있기도 했다. 두명이 옆으로 기다란 나무 책상하나를 사용했는데, 보통 남녀가 같이 앉기에 그렇게 하는거다. 서로 으르렁대며, 여기 선을 넘지 말라고 했던 기억이 있다.

학교에서의 놀이는 잘 생각이 안나지만, 지우개의 모서리를 손으로 눌러, 상대방에 올라타거나 걸치면서 지우개따먹기를 했다. 50원인가 했던 선생님 그림이 그려진 사각지우개가 가장 훌륭했지만, 무거워서 잘 넘어가지 않았다. 해서 점보지우개라고 잠자리가 그려진 지우개를 많이 사용했었다.


혼자서 놀 수 있는 건,  검지손가락과 주먹의 밑둥을 차례로 책상을 치면서 '딱딱퉁퉁'치면서 혼자 놀았던 기억, 그래서 누가 빨리 하는지 내기했던 것과, 엄지와 중지를 잡고 손을 위아래로 흔들면서 검지가 흔들려 엄지와 중지를 치며, '딱! 딱'소리내는 행동들을 했었다.


동그란 딱지도 유행했다. A3정도 되는 사이즈의 얇은 도화지에 유명 만화의 그림이 있고, 거기에 일렬로 지름 3cm정도의 동그랗게 구멍을 내, 그것을 뜯으면 약 60장정도의 딱지가 된다. 이걸 가지고 손뒤로 섞어, 많은쪽, 혹은 적은쪽을 맞추는 게임을 했다. 내가 건 만큼 맞추면 가져가고, 아니면 그걸 잃는 시스템이다.

독수리 오형제 딱지

손으로 하는 것 말고, 박카스등의 약국에서 얻을 수 있는 종이로 딱지를 만들어 치는 놀이도 있었다. 지금은 의문의 고무플라스틱으로 같은 놀이를 즐기고 있는 광경을 종종 보지만, 우리때는 종이로 만들어 했다. 4면을 땅에 갈거나, 잘 안넘어가게 발로 꾹꾹 눌러밟았었다. 딱지 놀이를 할때, 한손에 가지런히 나열시켜 쥐고있는 친구의 손이 부러움의 대상이였다.


팽이돌리기가 생각난다. 팽이와 국방색 끈을 사서, 우선 팽이의 윗부분을 한번 감은뒤, 빠짝땡겨서 밑둥의 기준이 되는 쇠를 중심으로 감아 올린다음, 손에 껴고 던진다. 부드럽게 좌에서 우로, 또는 우에서 좌로 던지기도 하고, 팽이에는 조금 부담되지만, 위에서 찍는 방법도 있다. 잘못 찍으면 팽이가 깨졌다. 팽이끈으로 돌고 있는 팽이의 밑둥을 퉁퉁 치며 상대 팽이를 치는 싸움을 하기도 하고,  팽이가 힘이 없어지면, 신고있는 신발로 옆면이 기술적으로 치면서 살리기에 들어간다. 슬리퍼로 치는게 효과가 컸다.


무엇보다도.....그때는 박남정의 ㄱㄴ춤이 최고였다. 소방차도 인기있었지만, 따라하기는 무리가 있었다.




교육과정은 당연히 기억이 안나지만, 체육시간은 기억난다. 학교마다 교장선생님이 훈화말씀을 하시던 연단이 있었는데, 그 밑은 항상 체육도구를 보관하던 장소였다. 해서, 체육시간에 그 안에 매트를 빼던 기억이 있다. 매트는 먼지가 풀풀나던 아주아주 불량한 상태였지만, 뜀틀등 꽤나 유용하게 그 위에서 놀던 기억이 있다.


가을운동회는 꽤 컸다. 부모들이 모두 들어와 같이 즐겼고, 엄마아빠들도 도시락을 싸와서 같이 참여하는 것도 있었다. 반대항 달리기가 있었는데, 1등을 하면 손에 도장을 찍어주고 나중에 공책이나 문구류와 바꿀 수 있었다.


하이라이트는 박터트리기였다. 청군백군으로 나눴는데, 그 박에 던지는 주머니는 개인이 두개씩 준비했던 기억이 있다. 보통 콩을 안에 넣어서 만들었었다. 나중에서 문방구에서도 팔았었다.




학교앞은 언제나 북적인다. 거의 모든 불량식품이 문방구앞에 깔려있다. 나름 신기한건, 그 당시 먹었던 아폴로나 쫀득이같은 불량식품이 아직도 있다. 아직도 버젓이 판매되는 걸 보면, 불량식품이 아닌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대부분은 50원~100원사이에서 판매되었다. 떡볶이는 100원이지만, 50원만큼만 달라고 하면 주는 맘씨좋은 할머니가 있었다. 그러면, 7~8개 정도 되는 떡을 녹색접시에 가지런히 담아 주곤 했다.


그 무언가 당시 떡볶이집의 냄새가 있다. 그 냄새가 지금, 이글을 쓰는 순간에도 난다. 지금은 그런 냄새가 나는 떡볶이집이 없다. 왜 그런 냄새가 났던 것일까..뭔가 달달한 냄새가 추억을 자극한다.


둘리 아이스크림과 쌍쌍바를 많이 먹었던 기억이 있다. 둘리아이스크림은 아이스크림 안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그냥 크리스탈바 같은 것이였다.


그러고보니, 지금과 달리 먹거리가 다양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냥 우리세대에 제일 맛있는건, 짜장면이 아니었을까 한다. 당시 1500원정도 했던것으로 기억한다. 내 앞에 앉은 엄마가 입에 짜장을 묻히지 않고 먹는게 신기해서 따라먹으려 했는데, 아무리 따라해도 안된다. 결국에 내 입은 짜장으로 가득 덮히고 만다. 엄마와 먹는 템포를 맞춰가며, 입에 안 묻게 먹으려고 노력하는 나의 모습이 생각난다.




마땅히 놀거리가 없었다. 지금처럼 핸드폰이 있던 시절도 아니고, 인터넷은 무엇인지도 모르는 세대이다. 아파트없이 대부분 단독주택에 살았기에, 친구를 불러내는 방법은 그냥 집앞에서, '영민아 노올자~'하고 부르곤 했었다. 초인종이 있었지만, 왠지 누르기 꺼려졌다. 그래서 모여서 하는건, 다방구나 짬뽕이였다.


당시에 학원은 지금과 같이 미술학원이나 피아노학원, 태권도학원이 있었지만, 누가 뭐래도 제일 많이 갔던 곳은 속셈학원, 주산학원....이 아니었을까 한다. 지금처럼 영어학원은 없었던 기억이 있다. 다만, 당시에도 몇명은 조기교육을 했던 모양이다. 국민학교 5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고, 내 친구가 영어를 배웠다면서, 자기가 과일이름을 전부 영어로 안다고 했다. 나에게 과일이름을 대 보라고 했지만, 내가 말할 수 있는건 사과, 귤, 수박이 전부였다. 뭐 그리 대단한것도 아니었던 기억이 난다.


오락실은 불법한 장소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하에 오락실이 많았다. 올림픽게임이 있었는데, 빨리 버튼을 누르기 위해, 엄지를 제외한 네손가락을 번갈아가며 누르는 신공과, 문방구앞에 있는 100원넣고 돌리는 뽑기에서 가져온 동그란 플라스틱으로 좌우를 비벼가며 누르는 방법이 일반적이였다. 자를 대고 튕기는 아이들도 있었는데 효과적이지 않았다. 양궁을 잘하려고 화면에 손가락을 대, 초첨을 맞췄던 기억이 있다. 다만, 오락실을 국민학교 학생들이 가면 안되는 곳이였다. 한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어, 부모들이 애들 찾으러 많이 왔었고, 오락하던 도중에 부모에게 끌려나가는 광경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갤러그의 적들이 움직일때 나는 소리....너구리가 바늘에 찔려 떨어지며 내는 소리가 정겹다. 이름은 잘 모르겠는데, 무슨 쿵후게임이 있었다. 뭔가 잘 생각나진 않지만, 꽤 많이 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내가 이글을 쓰는 이유는, 올해 칠순이 되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그때 어머니와의 추억을 되살리고자 했다. 근데 생각해보니, 기억이 너무 없다. 기억이 없다는 건, 별로 한게 없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지금은 영상기술도 발달하고 사진도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대로 수십장씩 기록, 저장할 수 있지만, 그 당시는 그런게 없었다. 해서, 기억나지 않는 나의 어린시적에 대해, 통째로 도둑맞은 느낌마져 든다.


그러나, 그 당시 우리 부모님 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들 힘들게 열심히 살던 1980년대가 아니었을까 한다.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반반한 여행한번 가지 못하고, 맛있는 것 맘대로 먹거나, 좋은 옷에 편한 물건들이 많던 시절도 아니었다. 너무 힘들게 살아오신 분들이다.


지금은 칠순을 넘은 아버지와 어머니께, 다른건 원하는게 없으니 그저 건강하게 오랫동안 있어달라고 말씀드리고자 한다.

엄마 칠순날에 ( 21년 5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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