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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찌네형 Jul 22. 2021

무지개다리 너머에

형은 영원히 너의 형이란다


20년 전이었다.

거실에 모여있던 나와 동생에게, 부랴부랴 집에 들어온 엄마는 앞치마의 앞주머니에서 조금한 강아지를 꺼냈다. 크기는 내 손크기만 해 이제 태어난 지 한두 달밖에 되어 보이지 않은 그런 아이였다.


엄마는 앞 동네 친한 지인의 집에 놀러 갔다 오는 길이였다. '글라라 아줌마가 한 마리 가져가라고 너무 그러는 거야. 근데,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가져왔다니깐..' 하며 호들갑인 엄마는 안중에도 없이, 그 꺼무룩꺼무룩하게 떠있는 큰 눈에, 입 찢어질 듯 크게 하품하는 귀엽고 소중한 아이와의 만남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손' '굴러' '빵!'과 같이, 먹이로 유인하며 시키는 하나하나의 동작들을 잘해가며, 여느 가정과 마찬가지로 그 아이는 우리 집에 녹아들었고,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우리 가족의 모든 귀여움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소복한 털에 둘러싸여 특유의 애교와 친화력을 보였으며, 이제 애완동물이라면 학을 떼는 아빠조차도 좋아하게 만드는데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아빠는 '뭐하러 가져왔어? 귀찮게... 너무 싫어..' 하며 쉬이 말을 뱉었지만, 있는 재롱 없는 재롱 펴가면서 달려드는 강아지에게 속수무책이었다.


사실 그 아이가 오기 5년 전, 원래 집에 로빈이라는 잡종견이 있었다. 내가 중학교 2학년이었던 어느 여름날, 아버지는 강아지 한 마리를 집에 데리고 왔고, 때마침 TV에서는 로빈후드라는 만화가 방영되고 있었기에, 우리는 로빈이라고 이름을 붙여줬었다. 잡종견임에도 집에서 기를 수 있을 만큼 참 영리한 개로 기억한다. 아쉽게도 로빈은 내 형이 사고로 떠나자마자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누군가에게 보내졌다. 데려올 때와 마찬가지로 떠날 때도 가족과의 상의는 없었고, 나는 로빈과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헤어졌다. 당시 자식을 잃은 아버지는 개가 있어 그런 험한 일이 벌어진 게 아닌가 하는 미신 같은 생각을 했고,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는 나로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당시 우리 집안은 매일매일이 암흑과 같았었기 때문이다. 집에서 멀어져 가는 로빈 이조차, 집안의 우울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별다른 반항이 없었다고 했다.


그 후로, 우리 집에서 애완견을 기를 거라곤 생각조차도 못했었다. 이따금 동생이 애완견을 보고 귀엽다 하면, 아버지는 '내 앞에서 개에 대해서 얘기하지 마라'라고 엄한 표정으로 혼내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온, 불현듯 온 아이가 하찌였다. 우린 아버지의 반응이 조마조마했지만, 이미 업지러진 물이었고, 의외로 아버지는 싫은 내색은 했지만, 쫓아내지는 않았다. 그날 이후로 이 아이는 우리의 가족이 되었다. 동생이 나에게 일본어로 1부터 세어보라고 했고, 8에서 하찌란 발음이 좋아, 그렇게 이름이 지어졌다. 내 브런치 아이디도 여기서 온 것이다.




하찌는 바람을 좋아했다. 살랑 부는 바람에 얼굴  털들이 휘날리는 느낌이 좋았나 보다. 차문을 조금 열어주면,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을 만끽하는  아이는 너무도 행복했다. , 다른 강아지와 마찬가지로 외출하는 것을 좋아했다.  앞에 산이 있어, 매일 정해진 시간에 산에 가지 않으면, 어쩔  몰라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하찌야. 산에 가자'하면, 어디서 튀어 나왔는지, 이미 현관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다.


작년 이맘때쯤



그런 하찌가 올해로 20살이 되었다. 나는 10 전에 결혼해 분가했지만, 아직 결혼    동생이, 마치 자기 동생처럼 돌봐주며  오랫동안 건강을 유지할  있었다. 끔씩 찾아가 봐도 풍성한 털에 왕성한 식욕, 걸음걸이는 다소 절뚝였지만, 겉보기에 아직은 10살도  안된 강아지로 보일 정도였다. 전담 병원에 주기적으로 검사를 했고,  여러 가지 약들과 영양제들을 먹었다. 국내에서 구하기 힘든  해외에서 직구를 해서라도 먹였다.


그랬던 하찌가 오늘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사실 3년 전부터 위태위태했지만, 정성에 정성을 더 한 동생의 손길로 생명연장을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찌 때문에 여행 한번 편하게 가보지 못한 동생이었다. 최근 며칠은 잠도 자지 않고 힘들어하는 하찌를 돌봤으며, 대소변을 받아내는 정성도 보였다. 그러다 하찌가 너무 힘들어하며 괴성을 내는 날이 잦아지자,  지난주에는 결국 마약성 패치도 받아왔다고 했다.


오전에 연락을 받고, 오후에 본가에 갔다. 동생은 이제 힘없이 축 쳐진 아이의 입과 코에서 나오는 분비물을 계속 닦아주며 울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옆에 앉아 이젠 반응 없는 몸을 쓰다듬어 본다.

심장이 뛰다 안 뛰다를 반복했다고 한다. 안 뛴다 싶으면, 손으로 심장 쪽을 마사지하면서 계속 뛰기를 바랬다고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떠나려는 아이를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며, 그냥 안아줬다고 했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짐작이 되었다. 동생에게 하찌는 가족이었다.


항상 많이 먹어 배가 불렀던 하찌의 몸은, 이미 가죽만 남았다. 내가 도착했을 때 약간의 온기가 남아있는 듯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몸은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나에게서 배운 '손'을 너무 잘 따라 하던 그 아이의 발은 이미 식을 대로 식어, 점점 굳어감을 느낄 수 있었다. 초점 잃은 눈은 아무리 감기려 해도 감겨지지가 않았다.


그 아이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 언젠가 분명히 헤어질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별은 참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하찌는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갔고, 내 동생은 마지막까지 그 아이를 지켜줬다.  


사람이 죽으면 반려동물이 마중 나온다는 얘기가 있다. 그때면 우리는 하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지 않을까. 그때, 당신들이 있어서 너무 행복했다고. 고마웠다고 말해주지 않을까.


고맙다. 하찌야. 너와 함께한 시간, 네가 우리 가족에게 준 사랑은 잊지 않을게.


하찌 : 2002년 10월 어느 날 - 2021년 7월 20일.

2002년 12월 어느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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