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즈닝

헤메라와 닉스

by 여니

구름을 타 볼까?

8월의 그리움의 바람이 이토록 부드러웠던가?

우산이 필요했던 빗방울의 리듬이 나의 발걸음에 맞추어 춤을 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신뢰의 계절을 켜켜이 쌓여 어느덧 달이 바뀌고. 해를 넘기고..

둘의 롱디는 계속되어 가고 있었다.


'너무 잘 어울리네. 세상에 분홍 니트가 이렇게 잘 어울릴 줄.. '

‘Les Amants du Pont-Neuf ’ (퐁네프의 연인들)


영화를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사랑의 배경으로 이어지는 퐁네프의 다리

우체국 소인이 찍힌 편지 안에 담겨 있는 사진 한 장

퐁네프 다리를 배경으로 분홍 카디건을 입고 서 있는 롱디 남

롱디 남의 하얀색 피부는 여성에게도 쉽지 않은 분홍과 너무도 잘 어울렸다. 달려가고 싶었다. 훌쩍 공간을 이동하는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사진 속 쥴리엣비뇨쉬 가 되어 있는 상상으로 한 참을 들여다본 가빈은 편지를 써 내려갔다.

' 편지 잘 받았어. 자기가 얼마나 힘든 시간들을 지켜 내고 있는지 사연에 다 담겨있어. 지쳐 가는 자기 옆에 내가 잘 버티고 있으니까. 우리 조금만 더 기운 내보자. 응????. 며칠에 오는 거지? 우리 며칠 뒤 면 볼 수 있어?

진정한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첫 번째라 하면

기다림 이란 고통을 견뎌 야만 다음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시간 은 유독 나만을 통제할 수 있다는 거였단 걸.

기다림 이란 가진 힘을 다 써야 만 도래할 수 있다는 것을

맛 집의 기다린 줄을 기다리는 것조차도 마다 했던 가빈에게

롱디남과의 만남은 견. 더. 내. 어. 야 하는 일이었다


롱디남을 만나는 시간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낮엔 헤메라(Hemera) 여신이 되어서 빠르게 밤을 끌어 오고 싶었고, 밤이 되면 닉스(Nyx)가 되어 빠르게 해를 끌어다 앉혀 놓고 싶었다.


더디게 가고 있는 사무실의 시계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가빈.

롱디남이 오는 날이다. 비행기 탑승자 명단자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본다. 가슴이 뛴다. 기쁨의 눈물은 이미 저 가슴 한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처음 롱디를 만났던 그때를 떠올린다. 작열하는 여름밤도, 눈보라가 발을 묶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맘이 헤매었던 흔적도 다 잊는다. 보고픈 마음에 하염없이 흘리던 눈물도 어느새 사라진 채 헤메라의 기운을 머금으며 가빈은 차분 히 공항으로 발길을 옮겨 본다.

저기 멀리에서 그가 보인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 본다. 아.!!. 롱디남을 마중 나온 가족들이 보인다.

'그렇지. 그랬었구나..' 혼잣말의 가빈

가빈의 설 자리는 어디를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다. 뒤쳐진 채로 그의 가족과의 따스한 포옹을 나누는 롱 디남을 지켜 만 볼 수밖에 없었다.

'어디에서 기다 려 보지? 문자 라도 보내야 하는 건가? 기다리고 있다고? '

가빈은 고개를 저어 본다. 가빈의 사랑은 앞서질 못했고, 자리는 늘 뒤편이었다. 순간순간 , 문득문득, 마음을 파고들며, 뭉근하게 가슴 한편이 아려오는, 식탁의 주 메뉴로 자리 잡을 수 없었던 가빈 엄마의 겉절이 사랑과 많이 닮아 가고 있었다.




롱디 남 과의 사이를 알아챈 건 엄마였다.

‘뭐라고? 유학생? 지금 너 그 애랑 결 혼 한 다는 거야? 뭘 로 먹고 살 건데? ’

똑 부러지지 못했던, 늘 어설펐던 가빈이, 집안의 많은 눈길을 받지 못한 가빈이의 얘기는 가족들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이고 평온한 분위기를 예고 없던 폭풍의 한가운데로 몰아가고 있었다.

의례적인 호구 조사가 시작되었고, 롱디 남의 부모. 형제. 둘러싼 환경들이 연일 밥상의 주 요리로 오르고 있었다. 기품 있는 부모와 넉넉한 환경에서 자라 온 가빈의 엄마였지만, 장녀가 짊어져야 하는 시대적인 흐름을 벗어나지 못한 가빈의 엄마는 자신 스스로를 마땅치 못 하다고 말씀하곤 하였다. 자식이 더 잘 되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여럿의 동생들의 둔 가빈의 엄마는 이모들의 응원과 가빈의 오빠들의 염려를 더해 가빈의 이야기는 절대 식탁에는 오르지 못할 음식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가빈의 머릿속의 인자하고 평균의 선을 잘 긋던 엄마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자식을 위협하는 정글의 동물을 막아 보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눈빛과

연신 울어대는 아이에게 먹잇감을 찾아내려는 동물의 본능적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가빈은 달라진 엄마 앞에 너무나 당황스럽고 초라할 뿐이었다

‘엄마. 내가 잘 알아서 할게. 유학 다녀오면 바로 취직할 거야. 제발, 엄마...’

‘오늘부터 한 발짝 도 못 나가. 회사. 집 말고는. 네 오빠가 마중 나갈 거니. 그리 알아,’

시련 없는 감정은 존재하지 안 듯. 그 둘에게도 이상 곡선이 도래한 것이다.

잠시 한국을 들렀던 롱디남과의 애틋한 시간들. 절대 잊을 수 없이 피어났던 그 둘의 묶은 약속 들. 눈 빛의 언어들. 째깍째깍 과거를 향해 달려가는 시간들. 마치 더 이상의 하루조차도 존재하지 않을 듯 둘 의 열렬한 공간들. 마지막인 줄 모른 채...

다시 유학길에 오르는 롱디남을 배웅할 수 없었다.

타국길에 오르는 롱디남 에게 줄 수 있는 건 서로의 울음 섞인 목소리 들뿐이었다.


시즈닝(Seasoning) 소금. 설탕. 후추와 같은 재료들을 이용하여 맛 혹은 풍미를 더하기 위한 작업

시즈닝 중 인 롱디남과 가빈

마음이 타 들어갈 듯 힘겨움 에는 설탕 한 스푼

서운함이 물밑들이 가라앉은 곳 에는 소금 한 꼬집

개운치 못한 마음이 슬며시 발끝을 타고 들 때 면 후추 한 스프링클


맛은 시간의 변화를 말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둘 에게 주어진 공간

둘 에게 주어진 시간의 맛은

'애씀' 이란 시즈닝이 필요했음을 둘 은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