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말
탄생의 반의어는 상실? 정도가 될 일이다. 문득 하늘에 아직 색을 매달고 있는 단풍을 보면서 소멸과 가장 잘 어울리는 계절은 언제일까?라는 말이 스쳐갔다.
봄은 따스한 기운에 싹을 틔우니 부합된 단어는 아니겠다.
여름은 한층 파릇한 초록의 잎들이 무성한 계절 탓에 사라지는 것들은 잘 보일 수 없을지 모르겠다.
결실을 맺어 가는 계절인 가을은 풍족함과 퇴색되어가는 색의 향연이 창연하고 아름다움으로 마지막을 장식해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세상과 이별하는 날의 하얀 눈송이는 아쉬움을 가득 담은 더 이상은 존재할 수 없는 이들의 영혼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건널목에 가빈의 눈에 들어온 베이지색을 입은 토들러. 뒤뚱뒤뚱 넘어질 듯 하지만 , 바닥을 딛고 제법 잘 서서 걷고 있다. 평평한 곳을 지나니 조금은 울퉁불퉁한 길에 서 있는 토들러는 살짝 기우는 듯하더니 이내 손을 뻗어 하늘만큼 높이 있는 토들러의 엄마에게 손을 내뻗는다. 하늘에서 내려온 눈송이 꽃 하나가 아이의 눈썹 위로 살포시 내려앉는다. 차가움에 화들짝 놀란 아이는 눈을 찡그린다. 어서 손을 내어달라는 듯 토들러는 휘젓는다. 이내 엄마의 따스한 손길을 받은 아이는 온갖 험한 것들이 만연한 곳에서부터 무균과 안전함 만이 가득한 곳으로 안착한다.
태어남의 첫 만남이 엄마와 아빠라는 사실을 알아가고, 계절마다의 온도를 느끼고 사랑이 어떤 색인지 조금 알게 되는 나이가 될 때 즘이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게 될 시간들을 마주 하는 듯하다. 토들러를 보는 순간 엄마의 죽음이 연상되었던 것은 왜인지.
결정의 힘은 단순한 뇌에서 기반하지 않는 듯하다. 자라온 환경. 행동양식. 방식은 인간의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여성으로서의 희생이 삶이 요구되던 시대에 태어났지만, 어머니의 어머니 또한 해외수학을 다녀올 만큼의 안정적 집안에서 그녀의 어머니를 보고 자랐다. 가빈의 할머님은 일찍이 독일파견 간호사로 일하신 분이었다. 자그마한 체구에 가느다란 입술. 가빈의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있던 할머니의 얼굴이다. 작고 가느다란 손가락 은 어쩌면 하얗던지, 말씀은 어찌나 부드러웠던지. 할머니의 이미지는 간결 하지만, 힘이 있고, 포근함이 존재한다고 믿어 왔다. 가끔, 아주 가끔 엄마는 회환과 원망이 묻어나는 말을 되뇌 이곤 했다. 그 빈도 탓에 엄마가 가졌을 마음의 덩어리가 어느 정도 인지 어린 가빈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자주 되뇌진 않았다. 무게감 있게 아주 가끔 아주 천천히 말씀을 띄우곤 하셨으니
인간의 행동 양식, 지식, 그리고 생활 방식이 경험이나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다는 것
1. 경험론 (Empiricism)
생활과의 연관성: 인간의 정신은 태어날 때 **'타불라 라사(Tabula Rasa, 백지상태)'**와 같으며, 이후 행동반경과 생활을 통해 감각하고 인식하는 모든 것이 학습되어 지식으로 채워진다고 설명한다.
2. 행동주의 (Behaviorism)
생활과의 연관성: 일상생활에서의 모든 행동과 습관은 **보상(강화)**과 처벌을 포함한 외부 환경과의 상호작용, 즉 생활에서 터득되는 반복적인 경험을 통해 형성되고 유지된다고 본다.
3. 사회학습이론 (Social Learning Theory)
생활과의 연관성: 인간은 행동반경 내에서 **타인의 생활양식이나 행동 결과(보상/처벌)**를 관찰함으로써 학습한다. 특히 주변 환경(가족, 학교, 사회)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윤리적 기준, 태도, 다양한 기술을 습득한다.
할머니와 그녀 , 가빈의 엄마, 사이는 아주 살갑게 보이진 않았었다. 앞서 깨어 있는 여성의 역할의 다 했던 할머니였지만, 집안의 겪여 내어야만 했던 일이 엄마였음에 늘 미안해하던 느낌이었다. 부모란 언제나 뒤 서 있음을 회상해 보곤 한다. 격조 있는 가정에서 자란 엄마이지만, 참을 수 있는 것들은 견뎌 보고, 참지 못 한 것들은 가슴에 담아두었던 가빈의 어머니
눈이 하얗게 쏟아지던 어느 날. 가빈은 엄마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많은 하고픈 말을 두고도 그저 지켜 주고 손길이 필요로 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고 ,
모든 옷을 다려서 입혀 주고
배달음식의 자장면 그릇은 반드시 잘 씻어 내어 두고
아버지의 다정한 눈길을 받지 못했던 겉절이는 매번 상에 올려 두었던 여인
가빈의 자식들은 커다란 화환에 둘러싸인 여인에게 조용히 이야기들을 전했다
곁에 두고 한 평생을 같이 하지 못 했던 타국의 이민행을 택한 아들들에게 엄마는 무어라고 전했을까?
눈물을 훔칠 사이도 없이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 날아온 오빠들은 이미 반 실신 인 채로 엄마를 마주 했고, 가빈을 제일 안타까워 했었다.
소리 내어 울지 않던 엄마.
장례식에 함께 한 가빈의 이모는 말씀하셨다.
'가빈아. 크게 울어도 돼...'
때론 죽이 잘 맞는 언니와 같고 , 가끔은 무섭게 혼을 내는 큰 언니와 같기도 했던 세상에 둘 도 없던 가빈과 엄마 사이. 그 후로 꽤나 오랫동안 가빈은 평소보다 더 많은 말을 하지 못했고, 시간은 그리움을 더욱 짙게 만들었고, 어딘지도 모르는, 아는 이도 하나 없는 , 남루한 차림이 되어버린 자신이 너무 안타깝고 애처로움으로 자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세상에 혼자 온갖 모래. 바람. 먼지를 맞이하는 듯 한 기분. 모두들 웃고 있지만, 혼자서만 웃지 않고 있는 일.
굳게 다문 입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때까지 기운을 얻어 주었던 이들을 잊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름 다운 여인
아름 다운 사람
닮고 픈여인
이제는 볼 수 없는
겉절이 사랑을 알려 준
어머니
가빈은 글을 쓰기로 맘을 정한다.
어차피 찾아올 시간 에게 재미 있고 심심한 이야기를 들려 주려고 말이다.
폴폴 눈 꽃 하나가 손 위로 내려 앉는다.
간질 간질 눈 말이 나에게 말을 걸어 오니까
잘 지내 느냐고. 아픈 곳은 없느냐고
조금 힘들면 아주 좋아하는 것을 한 번쯤 생각 없이 저질 러 봐도 된다고
충분히 그럴 만큼 견뎌 왔다고
또 보자 하며 날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