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심리
얼마 전 인스타그램 돋보기를 눌렀다가 내 기준에 너무나도 이상한 섬네일을 보았다. 결코 궁금하지도 않았던 지루한 문장은 내내 기억에 선명하게 남았다.
“선생님이 좋아하는 학생의 행동, 딱 알려드립니다!”
“선생님은 이런 학생을 좋아합니다!”
맙소사. 왜지? 왜 학생은 선생님이 좋아할 만한 행동을 알아야 할까?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서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걸까?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서로 앞에 나다워지는 사람이 되는 일이다. 내 기준에서 보면 사랑해서 궁금한 게 아닌 건 확실하다.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다.
“어떤 애들이 예뻐요? 그래도 가르치다 보면 특히 예쁜 애들이 있지 않아요?”
“딱히 예쁘거나 그렇진 않아요. 어린이들은 매일이 다르거든요.”
물어보자마자 자판기에서 음료수가 나오듯 대수롭지 않게 답하는 내 태도가 문제일까. 아니면 내가 직업윤리 상 벽을 친다고 생각하는 걸까. 내 대답은 너무나 진심이고 진실인데 상대는 석연찮은 표정을 남긴다. 교사로서 이 질문을 피한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런데, 과연 알면 할 수 있나?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일 년을 함께 지내는 교실에서 학생은 교사가 좋아할 만한 행동을 하며 살 수 있을까? 내 답은 단호하다. 절대 못한다. 아니, 할 필요가 없다. 한 명의 어린이가 아름다운 이유는 자기만의 표정을 짓고 말하고 행동하는 그 어린이가 우주에 유일한 하나이기 때문이다. 모든 어린이는 the 어린이다. 한 명이 각각 고유하다. 따라서 이 질문은 필요가 없는 질문이다. 알아도 못할 텐데,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데 알아서 뭐 하나.
학생과 교사는 60제곱미터의 공간에서 190여 일의 일년살이를 한다. 서로 눈치를 보는 새 학기가 지나면 이제 교실엔 각각의 자기(self)들이 앞다투어 노랑! 초록! 파랑! 하고 제 색을 터트린다. 교실은 각자의 색으로 알록달록하고 각자의 이야기로 소란하다. 덕분에 웃기고, 서운하고, 기다려지는 게 교실의 오늘이다. 언제나 그 절정은 쉬는 시간이다.
“선생님, 제가 기분이 나쁜 일이 있었어요. 들어주세요. 쉬는 시간에 강낭콩 화분을 관찰하다가 제가 어깨에 메고 다니는 휴대폰 가방을 잠깐 창문 옆 책상에 놓았거든요. 근데 수연이랑 민우랑 도형이가 제 휴대폰 가방을 자기들끼리 돌려서 주고받으면서 놀았어요. 제 물건인데 허락도 안 받고 그랬어요. 그래서 기분이 나빠요.”
유원이는 자기가 본 상황과 제 기분을 차분하고 분명하게 말했다. 신고가 들어왔으니 이제 상황을 파악할 시간이다. 나머지 세 어린이를 불렀다.
“무슨 상황이에요?”
“제가 우유를 마시려고 창가 쪽 우유통으로 가고 있었거든요. 근데 휴대폰 가방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주인 찾아주려고 이거 누구 거야? 하고 물어봤거든요. 애들이 유원이 거라고 해서 가져다 주려는데 수연이가 줘보라고 했어요.”
주변에 관심도 하고 싶은 말도 많은 도형이가 먼저 말한다. 오지랖이 넓어 학급의 일에 먼저 손들고 이미 행동이 먼저인 도형이가 충분히 할만한 행동이었다.
“제가 도형이에게 받는 걸 보고 유원이가 달라고 했거든요. 근데 제가 장난으로 가지고 도망가면서 민우 줬어요. 선생님, 제가 끼어든 게 맞아요. 제 장난에 유원이 기분 나빴을 거 같아요.”
언제나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눈을 반짝이며 수업에 참여하는 수연이가 말한다. 제가 한 장난이 부끄러운지 붉어진 볼과 불안한 눈빛이지만 자신이 끼어든 게 맞다는 말을 분명하게 인정한다.
“제가 수연이에게 받아서 같이 도망쳤어요. 유원이가 기분 나빴을 거 같아요. 유원이에게 사과해야 될 거 같아요.”
늘 웃는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한 민우도 제 행동을 말끔히 말한다. 세 친구의 이야기에 유원이도 마음이 누그러진 모양새이다.
“유원아, 들어보니 어때? 도형이 성격 알지? 원래 평소에도 무슨 일이 생기면 먼저 나서서 해결하려고 하고 그러잖아. 도형이가 유원이에게 장난하려고 한 게 아닌 건 확실해 보여. 수연이랑 민우는 장난하려고 한 게 맞아. 그게 유원이 기분을 상하게 한 것, 다른 친구의 물건을 허락 없이 만진 것도 우리 반 규칙을 위반한 거 맞고. 근데 두 친구 모두 자기 행동을 인정하고 있고 사과하고 싶나 봐. 유원이는 어때?”
“네, 도형이 성격 알아요. 다른 친구 말도 들어보니 저를 괴롭히려고 한 게 아닌 걸 알게 되니 괜찮아졌어요.”
유원이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친구여도 서운한 일에 대해서는 꼭 말을 하는 행동을 보인다. 오늘도 그렇다. 지난주부터 수연이와 민우는 쉬는 시간마다 유원이 책상에 모여 사회교과서에 나온 유적지 답사를 계획하고 주말에 시간을 맞추어 함께 답사를 다녀온 사이다. 쉬는 시간마다 답사 다녀온 이야기를 하며 날씨가 더웠어요, 쓰레기가 있어서 줍기도 했어요, 하며 답사 다녀온 이야기를 호들갑스럽게 웃으며 하던 친구들이다. 하지만 유원이에게 답사는 답사고 서운한 건 서운한 거다. 나도 친구들도 유원이의 이런 면을 안다. 도형이의 넓은 오지랖도 알고, 장난스러운 민우도 옳고 그름을 자신의 행동에도 적용하여 실수를 용기 있게 인정하는 수연이도 우리는 안다. 서로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규칙의 테두리 안에서 유원이는 유원스럽게, 수연이는 수연스럽게, 민우는 민우스럽게, 도형이는 도형스럽게 각자의 모습으로 교실에서 산다.
수업시간에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열의가 담긴 눈빛으로 수업에 참여했어도 쉬는 시간에 장난으로 주의를 받는 게 어린이다. 주사위를 굴려 곱셈과 나눗셈 문제를 풀며 도착점에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이기는 짝 활동을 하다가 서로 규칙을 안 지켰다고 절대 안 볼 것처럼 매 쉬는 시간마다 언성을 높이며 싸운 정후와 현민이는 다음 날 수업 시간에 서로 낄낄대며 대화하다가 주의를 받는다. 수업시간에 엉덩이를 의자에 겨우 걸쳐 앉아 제 손톱을 보는 태도로 주의를 받은 효원이는 이어진 체육시간에 한 손으로 옆돌기를 할 수 있다고 신나서 내게 자랑을 한다. 민선이랑 친한 게 인생의 오점이라고 내게 흉을 봤던 민효는 주말을 지내고 와서 민선이랑 팔짱을 끼고 다닌다. 작년에 서로를 모르던 새 학기에 맨 앞에 앉아서 지우개 한번 만지고, 3색 볼펜의 색을 계속 바꾸는 소리를 내어 주의를 받고는 교과서에 ‘짜증 나네’하고 쓰던 형서는 저 멀리서 나를 보면 선생님! 하며 내게 달려와서 나를 와락 안고는 투바투 새 앨범을 들었는지, 올해 6학년 생활은 어떤지 이야기하고 간다.
나는 매일 다른 어린이들과 일 년을 산다. 오늘을 알아도 내일이 다르고, 수업시간과 쉬는 시간이 다르고, 수학시간과 체육시간이 다른 게 어린이다. 같은 나이여도 각 어린이들은 각자의 가정의 역사와 이야기를 등 뒤에 매달고 온다. 서로 다른 이름과 생김새만큼 서로의 강점이 다르고 약점이 다르다. 세상의 모든 색이 고유한 이름과 가치를 갖고 있듯 어린이도 그렇다. 나는 이 다름의 알록달록한 모습을 보기만 할 뿐 감히 평가하지 못한다. 어린이들은 매 순간 다르게 흐르기 때문이다.
잘한다. 잘하지 못한다. 미흡하다. 최고다. 대단하다. 이런 모호한 칭찬은 속이 비어있는 게으른 칭찬이기때문에 난 싫다. 잘한다는 것은 칭찬이 아니다. 나의 주관적인 판단과 평가일 뿐이다. 어린이의 행동에 대한 평가적 칭찬을 하는 어른은 어린이를 믿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 의도가 있든 없든 이런 쉬운 칭찬은 어른의 칭찬이라는 벽으로 어린이의 행동을 몰아가게 한다. 평가적 칭찬에 익숙한 어린이는 결국 어른이나 상사의 칭찬에 따라 제 행동을 평가받으며 권위에 쩔쩔매는 사람이 된다. 나는 지금의 완전한 어린이가 어른의 비위에 맞게 자라길 원하지 않는다.
어린이는 저마다 가진 강점과 약점을 발휘하며 살아가면 된다. 교실에서 어른인 내 역할은 어린이들이 제 자기(self)대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타인과 안전하고 신뢰롭게 살아가도록 명확한 규칙이라는 안전망을 쳐주는 일이다. 서로의 몸과 마음이 다치지 않는 규칙이 보이는 편안하고 안전한 교실에서 어린이는 저대로 배우고 놀 수 있다.
또 하나의 내 일은, 어린이를 평가하지 않는 일이다. 그저 어린이의 행동을 읽어주는 일이 내 일이다. “와! 그림 잘 그렸다! 최고다!”가 아닌 에서 “연우는 츄파춥스 도안에 라임오렌지 맛을 그려 넣었구나.”, “지연이는 빨간색을 많이 썼네. 매운맛이야?” 하고 어린이의 행동을 읽어주거나 궁금한 걸 물어보면 된다. 그러면 어린이와 나 사이에 대화가 시작된다. 어린이는 제 이야기를 시작한다. “오늘 더웠나 봐요. 라임이랑 오렌지랑 만나면 완전 새콤할 것 같아요. 실은 신거 안 좋아하는데 한번 그려봤어요. 색이 예쁠 거 같아서요. 저는 먹을지는 고민해 봐야겠어요.”
제 이야기에 관심을 받아본 어린이는 제 삶에서 제 이야기를 하며 살 수 있다.
나다운 모습으로 사는 게 잘 삶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다움은 평생의 과업이다. 나는 60제곱미터의 교실에서 스무 명 남짓의 어린이가 각자의 모습으로 살기를 바란다. 나는 특정한 누가 예쁘지 않다. 특정 행동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각자의 어린이들이 각자의 모습을 안전하고 매너 있게 발휘하는 그 알록달록한 말과 행동이 나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