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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Jun 01. 2024

시간강사의 종강_가볍게 안녕

  이름도 참 예쁜 유월, 초여름의 시작을 타고 15주간의 봄학기가 마무리된다. 살랑이는 방학은 쉽게 오지 않아서 학생들은 막바지 과제에 골몰하는 시기이다. 나 역시 고루한 시간강사로서 학기 마무리에 팀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한 학기 동안 배웠던 이론 중 하나를 선정해서 영상으로 만들어보는 과제가 그것이다.       


    

  쇼츠와 유튜브의 세계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영상은 삶의 일부가 된 지 오래다. 손바닥만 한 휴대폰을 들면 네모난 영상의 세계로 쏙 빨려 들어간다. 주로 구독하는 채널을 한번 쭉 돌리는 사이사이에 엄지손가락은 불쑥불쑥 다른 영상을 터치한다. 마음에 드는 영상을 보고 또 보기도 하고, 영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도 한다. 밥도 해야 하고, 아이 픽업도 가야 하고, 내일 출근도 해야 한다는 삶에 대한 책임감이 가까스로 휴대폰 화면을 끈다. 그러고는 이 휴대폰만 안 봤으면 운동을 했을 텐데, 책을 좀 더 봤을 텐데, 백미 쾌속이 아닌 잡곡밥으로 여유 있게 밥통 버튼을 눌렀을 수 있는데 하는 후회들이 밀려온다. 나 자신이 마음에 안 들어서 하는 행동이란 겨우 소파에 휴대폰을 던지는 일이다. 사실 휴대폰이 무슨 죄람. 내가 본걸. 나를 던져야 할 판에 괜히 화풀이를 한다.           



  유용한 쓰임도 있다. 요즘 강의자료는 유튜브에서 주로 찾는다. 수업이론을 잘 보여주는 질 좋은 영상들이 유튜브에 참 많다. 내 목소리는 작고 납작해서 하루의 피로를 끌어오는 게 틀림없다. 듣다 보면 편안한 낮잠에 빠져들기에 최적화되어 있다. 그럼에도 오후강의를 하는 걸 보면 이건 배짱장사하는 건가 싶다. 학생들이 펜을 놓고 책상 위에 팔짱을 끼기 시작한다. 허리를 곧추 세워 앉는다. 이제 곧 눈을 감겠다는 시그널이다. 그런 때 목석처럼 서 있던 나의 필살기는 하나이다.



  “관련 영상 보고 가겠습니다.”          

  글자만 있던 스크린에 아이가 등장한다. 피아제의 발달단계 중 4-6세에 해당하는 전조작기 아동들이 나온다. 복숭아의 볼을 가진 아이들이 웃는다. 숨바꼭질을 하는 아이는 엄마에게 숨었다! 하면서 투명 상자에 들어가고, 제 눈을 가리고 엄마 앞에 선다. 학생들의 얼굴에 미소가 담긴다. 왜 저렇게 바보 같지? 하면서도 그 시절 자신도 화면 속 귀여운 바보였을 그 시기를 떠올리는지도 모른다. 영상 덕분에 감기려는 학생 두어 명 정도의 눈꺼풀을 올려주었다. 나이스! 이렇게 공유되는 영상들을 보면 인류애를 느끼곤 한다. 내가 아는 것을 나누고 싶은 그 마음. 덕분에 우리는 지금까지 함께 다정하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학생 중 몇몇은 스크린을 자주 채웠던 텍스트보다 오늘 엄마 앞에 눈을 가리고 숨었다! 했던 아이를 통해 전조작기 아동을 더 잘 이해했을 수 있다. 다른 건 다 기억이 안나도 일부러 접시를 1개 깬 아이보다 모르고 10개를 깬 아이를 더 나쁜 아이라고 말했던 아이의 손가락을 기억할 수도 있다. 시각만을 자극하는 텍스트보다 시청각을 자극하는 영상은 머리에도, 마음에도 더 오래 남는다. 이는 영상이 유해한 이유인 동시에 유용한 이유가 된다. 그러면 유용성을 더 가까이 끌어당기는 게 진화라 배웠다. 그래서 제안한 과제가 영상제작이었다.           


  최첨단 MZ인 대학생들에게 개강날 오리엔테이션에 프로젝트 수업을 안내하면 머릿속으로 띄우는 물음표가 몇 개쯤 보인다. 학생들의 물음표를 볼 때마다 나도 물음표가 생긴다. 매일 영상을 보고, 영상으로 말하는 게 더 익숙한 대학생들이 왜 영상제작 과제에 거리감을 느끼는 걸까? 리포트를 쓰는 것보다 더 낫지 않나? 하며 논리적 사고 이전의 직관적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그러면 이젠 논리적 사고가 발휘할 차례.      


     

  우리는 텍스트의 세계에 산다. 어려서부터 ㄱ, ㄴ, ㄷ의 세계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내 이름을 쓰면 칭찬을 받았다. 나이가 들며 더 길어지는 텍스트를 읽었고, 지금도 매일 텍스트를 읽는다. 난 아닌데, 하는 사람도 교과서는 읽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들께서는 책을 세워서 모서리를 책상에 대고 양손으로 교과서 양쪽을 잡고는 바른 자세로 소리 내어 읽기를 시키셨으니까. 그때부터 선생님께서는 늘 글자가 가득한 교과서와 프린트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지금은 계약서 읽기, 약 복용법 읽기, 아이 학교 알림장까지 모두 텍스트로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우리는 노출되어 있다. 덕분에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게시물을 읽느라 휴대폰을 손에서 놓질 못한다. 잘 그렇다면 매일 그리고 매 순간 텍스트를 읽는 나는 글을 잘 쓰는가?        


   

  답은 쉬워졌다. 글자를 자주 읽는다고 해서 좋은 글을 쓰는 것과 별개이듯, 영상을 자주 접하는 것이 영상을 만드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은 아니다. 읽는 것이 쓰기에 영향을 줄 수는 있다. 하지만 쓰기는 자신의 생각을 구조화하고 이를 적절한 단어와 어구를 골라 문장을 지어낸 후, 여러 문장의 연결을 통해 생각을 눈에 드러내보여야 하는 별개의 기능이 요구된다. 영상도 마찬가지이다. 창작자의 생각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는 장소, 인물, 오브제, 사건을 구성하여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감각을 자극하는 일, 타인에게 내 생각을 시청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다. 창작자의 좋은 글과 영상은 타인의 생각에 전달되고 마음에 남는다. 창작자의 일은 소비자와는 질적으로 다른 일이다.           



  내게 필요한 지식을 검색하고 유목화하여 폴더에 잘 저장해 놓는 일은 자주 유용하다. 주제별, 시기별, 또는 나만의 기준으로 정리해 둔 자료는 내 적금통장처럼 마음도 든든하고 필요한 순간 나를 전심으로 돕는다. 이때 필요한 순간이란, 내가 이 자료를 활용해서 내 생각을 내 필터에 걸러 내 목소리를 내고, 내 글을 쓰는 일이었다. 여기에 최근에 한 가지가 추가된 것 같다. 내 영상을 만들어보는 일. 글만큼 영상도 힘이 세다. 글이 시각을 이용한다면 시청각을 자극하는 영상은 마음이 더 잘 남는 것 같기도 하다. 이해도 더 잘 된다. 책을 읽는 것보다 선생님의 설명이 있으면 더 이해가 잘 되듯, 같은 내용도 영상에서 설명해 주면 글보다 더 빠르게 내용이 정리됨을 나는 경험한다. 무엇보다 글에 비해 소비자의 문턱이 더 낮다. 시각보다 시청각을 자극하는 건 사실 더 재미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지식의 개념이 재정립되는 시대이다. 기존에 지식이란 외부에 있는 객관적 대상이었다. 지식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구별되던 시대에서 방송국에서 검증된 사람들이 사회적 이슈에 대해 논평하고, 드라마를 송출하고, 출판사에서 검증한 사람들이 책을 냈다. 지식은 외부에 있으니 소비자는 이를 잘 이해하면 되었다.   


        

  요즘은 객관적 지식에 개인의 서사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인간은 객관적 지식을 잘 이해하여 필요한 순간 정확하게 인출해 내는 블루투스 스피커가 아니다. 세상의 객관적 사태를 개인의 필터로 걸러서 내 목소리를 내야 지식인이 되는 시대이다. 각 개인이 자신의 채널을 개설하여 제 목소리를 내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객관적 정보를 잘 조직화하고 정교화하여 내 인지구조에, 컴퓨터의 파일에 잘 정리하는 일. 그 일을 내 필터로 걸러 내 생각을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생산해 내는 일. 이 두 일이 모두 중요해졌다. 정보를 아는 것이 목적이 될 수 없는 세상이다. 내가 정보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일은 내 목소리를 더 잘 내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작용한다. 레퍼런스가 없는 목소리는 힘이 없고, 목소리가 없는 레퍼런스는 흔한 종이조각에 불과하다.           


  성실한 학생들은 수업시간에 객관적 지식을 전달하는 스피커인 내 목소리를 잠을 깨 가며 들어준다. 고마운 일이다. 객관적 지식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내 일이기에 학생들의 성실함에 부응하고자 나도 성실히 강의를 준비한다. 전달력을 높이고, 이해를 높이는 일은 재미없는 사람인 나에게 언제나 어려운 일이기에 나만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려 노력한다. 정확한 명칭을 각인시키기 위해 시험 때 단답형 문제에서는 ‘본교재 273쪽에 기재된 용어만 정답으로 처리합니다.’와 같이 해당 용어가 나온 페이지를 제시하며 깍쟁이처럼 다른 답은 다 오답처리하는 아량 없는 시험을 내는 선생도 나다.           



  이론을 공부하며 레퍼런스를 모았다면 이제 학생의 몫이다. 개인적으로는 매 주차마다 매 챕터당 해당 이론이 자신에게 남긴 시사점을 한 문단으로 제출하는 것, 내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영상제작 팀 프로젝트가 그 마지막 과제이다. 참고작품과 평가기준을 제시하는 일은 영상제작에 관한 과제 앞에 물음표를 띄우는 학생들의 안전망이 되어준다.



  ‘자유롭게 하세요.’

이 말은 게으른 말이라 믿는다. 자유는 너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게 아니다. 빨간불에 차가 멈추는 세상에서 우리는 횡단보도를 자유롭게 건널 수 있다. 낭떠러지에 펜스가 쳐있는 풀밭에서 우리는 신나고 자유롭게 힘껏 달릴 수 있다.        


  

  14주 차 수업, 드디어 프로젝트를 발표한다. 한 학기 동안 서로를 모르던 학생들은 제 손으로 뽑은 팀원들과 몇 주간 고심하여 완성한 영상을 발표한다. 다른 전공과 학과, 또는 같은 학과의 팀원과 협업하고 의사소통하며 여러 번 마음에 안 맞는 순간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학생들도 하나의 제품을 위해 여러 사람이 협업할 수밖에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이젠 안다. 늘 떨어져 앉아 있던 학생들이 팀별로 함께 앉아 자신들의 영상이 발표될 때마다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더 호들갑스러워한다. 5분의 영상에 담긴 몇 주의 과정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때문이겠지 싶다.           



  영상을 통해 요즘 대학생들이 다시 무한도전을 본다는 것, 피식 쇼, 꼬꼬무같은 프로그램이 인기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 강의실에 있으면서 우리는 다른 문화 속에 살고 있음을 느낀다. 학생들이 직접 영상에 출연하는 드라마 형식이나 콩트는 보는 순간 너무 웃긴데, 웃을 수도 없다. 행여 내가 웃으면 동료평가에 영향을 줄까 싶어 웃음을 최대한 참는다. 웃음을 참느라 아마도 내 얼굴은 꽤나 못생겨졌을 게 분명하다. 고생스러웠던 프로젝트 과제가 끝나고 학생들은 후련한 듯 강의식을 나간다. 내 목소리를 내는 일이 그들에게 준 선물이지 싶다.           



  시험에서도 학생들의 생각이 궁금한 나는 이론을 삶에 적용하는 문제를 절반 정도 출제하곤 한다. 단답형과 객관식이 깍쟁이라면 서술형에서 나는 좀 더 너그러워진다. 수업시간에 다룬 프로이트의 방어기제를 모두 제시한 후, 내가 자주 쓰고 있거나 타인이 사용하는 것을 보았던 방어기제를 하나 고르고 그 사례를 쓰는 문제. 에릭슨의 심리사회적 발달에서 얻게 되는 덕목을 모두 제시한 후,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덕목과 그를 얻기 위해 나에게 어떤 일을 해줄지를 묻는 문제가 그것이다. 성숙한 사랑 또는 지혜라는 덕목을 빈번하게 고르는 걸 보면 사랑과 지혜에 대한 대학생들의 기대가 엿보여 마음이 간질거린다. 동시에 나도 멋진 노년이 되어 지혜를 담아야겠다는 생각은 덤이다.         


  

  이쯤 되면 과제가 너무 많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하지 싶다. 강의계획서에 과제를 모두 제시해 두었기에 알고 수강신청을 한 거겠지? 하고 나를 방어하곤 하는데 매 학기마다 과제를 조절해 볼까 하는 마음도 동시에 든다. 그럼에도 나는 객관적 지식을 제대로 아는 것과 이론을 제 필터로 걸러보는 일 양면을 놓칠 수 없다. 괜한 욕심을 여기에 부린다.       


   

  이 욕심의 이유는 아마도 내가 계약직 시간강사라는 직위 때문일지도 모른다. 매 학기마다 이게 마지막 학기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시작하고 아름다운 계절인 봄과 가을의 학기를 지낸다. 나와 학생의 삶에서 우리는 단 15주 동안 스쳐가는 사이로 나와 학생들 사이에 다음은 없다. 비단 시간강사여서만은 아니다. 학교에서도 학생과 교사는 길어야 일 년을 함께 배운다. 시간강사는 15주로 더 짧을 뿐이다.        


   

  부족한 선생인 나는 나라는 사람이 학생들에게 오래 기억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정서적 온기가 부족한 사람이다. 다만 우리가 함께 공부하는 동안의 배움과 태도가 변한 순간이 한 번이라도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나와 함께 공부하며 했던 내 말 한마디로 학생의 생각의 각도가 1도 정도 벌어졌던 순간이 있었기를. 생각의 창을 새로 내보았던 순간을 만났기를. 또는 나를 보며 저렇게는 하지 말아야지 하며 스스로가 더 좋은 태도를 갖는데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본다. 내 이름을, 나를 기억하지 않아도 매우 좋다. 나로 인해 변화의 순간을 만났기를 바란다.           



  올해의 아름다운 봄학기도 이렇게 뜨겁고 산뜻하게, 뒤돌아보지 않고 안녕. 우리는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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