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심리
아이가 일곱 살 때 노란 유치원 버스에서 한 걸음씩 폴짝 내렸다. 이마 위로 반듯하게 자른 머리카락을 움직이며 졸망졸망 걸어 현관 앞까지 왔다. 늘 아이의 유치원 가방을 먼저 건네받아 한쪽 어깨에 메던 나는 일곱 살이 그 작고 통통한 손가락으로 어깨에 맨 노란 유치원 가방을 쥔 손이 귀여워서 그저 보고만 있었다. 아이를 키우는 기쁨 중 하나는 낯선 순간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간질간질해지는 마음은 덤이다.
마음에 귀여운 동시가 내려앉은 내 마음과 달리 일곱 살의 얼굴이 흐리다. 버스에서 내리면 화단을 총총총 뛰어 잡기놀이 한번 하고, 나무 뒤에 숨는 숨바꼭질 여러 번을 해야 집에 갈 수 있는데 오늘은 다르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도 내 두 팔에 안긴 걸음이 무겁고 느렸다. 버스에서 집까지 걸어오며 “엄마 있잖아요. 엄마 그거 알아요?”하며 나에게 제 신기했던 일을 특유의 리듬과 음률에 담아 신나게 말해야 하는데 오늘은 말없이 현관 앞으로 바로 난 길을 향해 걷는다. 그저 클레이처럼 볼록한 열 손가락은 노랑 유치원 가방만 꾹 잡고 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오늘 유치원에서 어땠어? 기분이 안 좋아?"
"가방에 연산 숙제가 있단 말이에요."
숙제. 학교를 떠올리면 뙤약 볕에 짐을 이고 지고 황량한 모래만 가득한 사막을 터덜터덜 지나는 낙타의 걸음이 되는 모든 이유의 시작과 끝이 분명한 녀석이다. 물론 시험의 무게감도 상당하지만 시험기간에 집에 가는 길, 피곤한 깊은 밤과 나른한 주말 아침에 ‘공부해야 하는데’하며 마음에 묵직한 안개를 바닥에 깔아 넣는 것은 스스로 숙제를 부과한 것이기에 시험도 숙제의 연장선일 것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숙제(宿題)는 1) 복습이나 예습 따위를 위하여 방과 후에 학생들에게 내주는 과제, 2) 두고 생각해 보거나 해결해야 할 문제를 뜻한다. 학생들에게 주는 과제와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뜻에서 결국 숙제는 ‘해야 할 일’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하고 싶은 일, 내가 선택한 일이 아닌 해결‘해야’하고 ‘해야 할 일’이라는 의무와 책임의 문제가 된다. ‘해야 할 일’ 앞에서 나는 어떠한가?
학교에서 집에 돌아와 책가방을 놓고 우리는 철학적 질문을 던지곤 한다. 해야 할 일을 먼저 하고 하고 싶은 일을 나중에 하기 vs 하고 싶은 일 먼저 하고 해야 할 일 먼저 하기. 아마도 책상에 앉기 전, 전 인류가 한 번쯤은 되뇌어본 질문이 아닐까? 한 뇌과학자는 컴퓨터 게임을 먼저 하고 숙제를 하는 게 낫다고 한다. 숙제는 중요한 일인데 먼저 하게 되면 숙제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컴퓨터 게임을 못하니 숙제 이 녀석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인식되는 동시에 숙제를 해치워야 하는 일로 여기면서 온전한 학습이 되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게임을 충분히 하면 그나마 이후 과제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럴듯한 설명이면서도 한 가지 의구심이 든다. 좋아하는 일엔 끝이 없잖아요, 박사님. 해도 해도 또 해도 재미있는데 중간에 끊을 수 있나요?
한 번은 컴퓨터 게임이 재미있다는 학생에게 낡은 교사이자 성인인 나는 내겐 맑지만 어린이에겐 참 어리석은 질문 하나를 했다.
“컴퓨터 게임 그렇게 많이 하면 질리지 않니? 눈도 아프고, 계속하고 싶어?”
“선생님, 선생님은 쇼핑을 하면 할수록 지겨우세요?”
“아...!”
이게 바로 좋아하는 일에 대한 우문현답이 아닐까. 좋아하는 일에 대한 진심은 해야 하는 일의 더미를 겨우 헤치고 나와 크게 숨 쉬었을 때 만나는 신선한 산소와 같다. 이 녀석은 즐거움을 내 삶에 딱풀로 찰싹 붙여주는 재주도 가졌다. 즐거움은 내 구태의연한 일상에 물을 주어 하루를 싱싱하게 해주는 확실한 행복이 아니던가. 어린이들에게, 그리고 대학생들에게 수업시간에 종종 쉬운 즐거움 하나 꽉 쥐고 사는 게 행복의 비결이라고 이야기했던 내가 오버랩되며 내 질문이 쪼그라들었다. 이런 천연의, 천년의 즐거움을 어떻게 숙제 따위가 끊어요, 박사님! 좋아하는 일의 푸른 바다에서 내 의지대로 팔과 다리를 휘휘 저으며 푸른 물장구치는 일 없이 어떻게 무더운 여름을 살아갈 수 있겠어요!
하고 싶은 일을 내 선택으로 할 때 나는 내 시간과 노력을 기꺼이 쓴다. 최근 목과 어깨 통증으로 고생한 이후 필라테스를 다시 시작하기로 한 나는 동네 필라테스 학원의 위치, 레슨시간, 운동스타일을 검색하느라 바빴다. 필라테스가 내게 필요한 운동이고 내 건강을 위해 도움이 되는 가치 있는 일이라 여긴다. 최대한 빨리 시작해서 계속하고 싶고, 운동할 때만 만날 수 있는 활력 있는 내가 뿌듯하다. 해냈다는 성취감도 대단하다. 내 의지대로 선택할 수 있다는 나의 존엄에 마음이 웅장해지며 일에 대한 책임감도 갖게 되기 마련이다. 내가 비로소 내 선택에 책임을 지는 어른이 된 느낌까지 든다. 운동 갈 시간이 되면 혹시나 운동해서 더 피곤할까 봐 내 몸을 극진히 아끼며 고민하지만 어떻게든 그 마음을 떨쳐내고 운동을 간다.
운동 이 녀석은 하고 싶어서 내가 선택한 일이면서도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늘 가기 전에 가기 싫다. 해야 할 일 앞에서 나는 주저하고, 최대한 늦게 시작하고 싶어 한다. 10분 먼저란 내게 없는 시간이다. 최대한 타이트하게 출발한 나는 겨우 제시간에 필라테스에 도착하거나 5분 정도 늦곤 한다. 동작을 할 때는 어떻게 하면 효율을 높일까 고민한다. 한마디로 어떻게 하면 좀 적게 노력해서 중간정도 가는 성과를 낼까 고민하는 것이다. 내 운동에 대한 기본값은 힘들기 전까지 운동하기다. 내 에너지는 한정적이기에 노력을 내가 선택한 일에 쓰는 게 좀 아깝다. 못한다 소리를 듣지 않을 정도 선으로 욕심내지 않는다.
운동할 때 나는 힘들다. 이제 매트에서 몸을 풀었는데 시계를 본다. 겨우 5분이 지났다니. 왕느림보 시계가 야속하다. 바렐 위에 올라가 하체를 붙이고 양팔을 머리 뒤에 대고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동작을 할 때 근육이란 찾아볼 수 없는 내 다리가 무참히 달달 떨린다. 이 굴욕. 내 존엄이 사라진 순간이다. 이 순간 내 생각은 하나다. 운동을 끝나고 집에 가자마자 맥주를 마실까, 씻고 마실까. 이 어려운 선택 앞에 번뇌하는 내게 선생님은 자극을 느껴보라고 하시며 내 옆날개 쪽을 지그시 누르신다.
새로운 동작 노노! 잘할 수 있는 것만 하고 싶다. 선생님, 제발 절 모른척해주시지 그러셨어요. 선생님의 손길에 어쩔 수 없이 어른의 사회적 얼굴을 하고 신음소리를 내지 않도록 양쪽 이를 지긋이 물었다. 그런데, 응? 이게 뭐지?
시원하다. 내가 알고 있는 내 몸의 가동범위는 약 10도~15도 정도였는데, 선생님께서 지그시 눌러주시니 30도쯤으로 내 몸의 움직임 면적이 넓어진다. 이게 가능한 거였어? 내 몸이? 내 몸도 실은 더 움직일 수 있었구나. 이제껏 몰라줬던 내 가능성을 오늘, 사십 년이 넘어 드디어 만났다. 내가 하기 싫던 운동을 해야 하니까 할 때, 할 수 있는 동작 말고 새로운 동작을 해볼 때, 선생님의 압력이 가해질 때 나는 내 몸이 그동안 뻗을 수 있는 면적 이상을 쭉 뻗고 나갈 수 있었다.
어린이들에게 주말 숙제를 내주었다. 수행평가 중 음악의 생활화 영역으로 가족 앞에서 노래나 악기 연주하기였다. 미리 학교에서는 ‘어린이 왈츠’ 동요로 가창 수행평가를 본 이후였고, 학생들에게 이 노래를 하거나 평소 다룰 수 있는 악기나 좋아하는 노래를 해도 된다는 설명을 했다. 수행평가 학습지에는 악곡, 표현방법(노래, 춤, 악기연주 중 택 1), 자기소개 멘트 그리고 음악활동 후 소감을 적도록 했다. 마지막 칸에는 공연을 본 가족들의 격려 한 말씀을 받아오는 칸이 있었다.
어린이들은 부끄러워했다.
“선생님, 가족 앞에서 너무 부끄러워요.”
“리코더 불어도 돼요?”
“동요 아니어도 돼요?”
모든 질문들 앞에 나는 다 괜찮다고 말했다. 호들갑을 떠는 아이들의 소란이 귀여웠다. 어린이들은 각자의 책가방에 수행평가 학습지를 넣은 채 서로의 주말에 안녕을 기원하며 하교했다.
“어릴 때도 귀여웠지만, 노래하는 유주의 모습이 참 귀여웠습니다.”
“리코더 연습을 할 때는 더듬더듬하는 소리가 고역이었지만, 실제 연주를 할 때 한 음 한 음 끝까지 연주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습니다.”
“핑크돼지가 노래하는 것 같아 웃겼지만 끝까지 해내는 모습이 대견했습니다.”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폰서트를 끝까지 불러주어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다음에도 또 부탁해.”
“이렇게 노래하다니, 용기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선우, 덕분에 즐거웠어요. 음정은 좀 맞춰야겠더라.”
월요일에 제출된 수행평가 학습지에는 주말 짧은 시간 동안 어린이들의 집에서 이루어졌을 부끄럽고 간질거리는 시간들이 담겨있었다. 평소 서로에게 짜증을 내기도 하고, 혼나기도 하고, 또는 오가는 대화의 격식 없는 사이인 가족 앞에 서서
“지금부터 어린이 왈츠 노래를 시작하겠습니다. 잘 봐주세요.”
하고 말하는 순간부터 어린이들은 부끄러웠을 것이다. 각 집의 익숙한 거실들이 순간 낯선 공간으로 변하며 어린이도 가족들도 낯선 시간과 공간의 어색함에 양 팔의 닭살을 문질문질했을지도 모르겠다.
이유는 하나이다. 숙제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이라면 절대 선택하지 않았을 일인 숙제 때문에 어린이들은 익숙한 곳에서 낯설었다. 덕분에 마음이 붉게 상기되고 간질간질 부끄러우면서도 서로에게 둥근 미소를 남기는 가족의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숙제가 아니었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 숙제 때문에 이루어진다. 해야 하니까.
일주일에 2시간의 강의가 끝나면 나는 대학의 e-클래스에 이론과 관련된 질문을 3-4개 정도 올린다. 학생들은 질문을 확인하고 해당 주차 안에 질문에 대한 답을 써야 한다. 다루었던 이론 중 메타인지에 관해 이렇게 묻기도 한다.
“메타인지는 초인지라고도 불리며, 나의 인지활동을 검토하고 파악하며 계획을 수립하고 점검할 수 있는 인지기능입니다. 예를 들면, 이 과목은 4시-6시에 운영되는 데다 내용이 많고 교수자의 목소리도 스테이블하므로 졸릴 위험이 있다. 따라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 들어가야겠다! 와 같이 미리 계획을 세우고 행동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죠. 여러분이 이 과목을 잘 이해하기 위하여 나만의 메타인지를 발휘하는 사례를 간단히 기술해 보시기 바랍니다.”
학생들은 해당 주차 안에 어떻게든 질문에 댓글을 적는다. 숙제이니까. 숙제를 하지 않으면 학점에 감점이 확실히 이루어지니까. 학생들은 어쩔 수 없이 낯선 이론들을 생각해야 하고, 그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평소에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하던 생각과는 장르가 다른 생각을 끄집어내며 생각의 가지를 뻗쳐야만 한다. 나도 그렇다. 숙제니까, 어쩔 수 없이.
그 어쩔 수 없는 외부의 압력 덕분에 우리는 낯선 세상을 만날 기회를 얻는 것은 아닐까. 나에게 선택권을 주었으면 절대 가지 않았을 그 영역을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을 들여놓는 순간, 나는 새로운 세상을 만난다. 낯선 나를 만난다. 낯선 필라테스의 세계에서 팔을 뻗는 순간 내 몸의 가동범위를 알게 된다. 선생님이라는 위력이 지그시 눌러주었을 때 내 몸의 가동범위가 더 넓어진다. 매일의 삶이 뭍은 거실 중앙에 서서 소파에 앉은 가족들 앞에서 리코더를 부는 순간 거실은 낯설어진다. 서로의 마음이 분홍빛으로 부끄러워지며 간질거리는 낯선 기운이 거실을 맴돈다. 일상의 거실에 즐거운 기억과 이야기가 쌓인다. 전공필수여서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했던 강의에서 숙제 때문에 질문을 읽는다. 내 삶에 오늘 만난 이론을 적용해 보느라 내 하루를, 내 태도를 다시 살핀다. 그렇게 이미 메타인지를 발휘했던 나를 발견한다.
고백하건데, 나역시 그렇다. 나의 자율성으로 나는 존엄과 즐거움을 얻었고, 타율적 숙제 덕분에 나는 성장했다. 새로움은 익숙한 생각이 낯선 생각을 만났을 때 이루어진다. 나라면 하지 않았을 노래를 하고, 글을 쓰고, 1챕터만 읽을 책을 숙제때문에 2챕터까지 읽어야할 때 낯선 경험의 기회를 얻는다. 이는 자율성에만 나를 맡기면 안되는 확실한 이유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할 때, 나를 알게 된다.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내가 좋아하는 마음의 방향을 알게 된다. 하고 싶은 일을 꼭 해야 하는 이유이다. 해야 할 일을 할 때는 내가 싫어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내가 싫어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는 것 역시 내가 어떤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 가를 파악하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다.
동시에, 해야 할 일을 할 때 나는 낯선 나를 발견한다. 퀴블러 로스가 죽음에 적응할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으로 밝혔듯 숙제에 적응할 때 나는 부정-불평-타협을 지나 ‘으잉?’ 포인트를 만난다. 이때다. 나도 몰랐던 내 가능성을 발견하는 순간. 독후감을 쓰기 싫었지만 글을 쓸 때 수다쟁이가 되는 나를 발견한다. 밑그림을 그린 그림을 망칠까 봐 채색하기가 두려웠지만 채색을 하며 그림의 작은 귀퉁이에 채색한 부분이 마음에 들며 예상치 못한 재미와 뿌듯함을 느낀다. 선생님이 지켜보고 계시기에 쉬지 않고 또 한 레인을 어쩔 수 없이 돌았지만 돌아오는 레인에서 비로소 자유형 호흡과 좌우 밸런스가 맞는 순간을 만난다.
언제 어디서 만날지 모르는 그 기쁨의 순간은 무언가를 할 때 온다. 하고 싶은 일을 할 때도 오고, 하기 싫은 일을 어쩔 수 없이 할 때도 온다. 하고 싶은 일만 한다면, 하기 싫은 일을 할 때 만날 수 있는 낯선 나, 낯선 기쁨을 만날 기회조차 버리는 일이다. 그건 너무 가성비가 떨어지는 삶이다.
다양한 종이 어우러진 숲이 그렇듯 하고 싶은 일과 숙제 같은 일이 함께일 때 내 삶이 울창해진다. 해야만 하는 일 앞에서 나는 소파에서 일어서고, 침대에서 겨우 일어나 머리를 감고 출근을 한다. 어린이들은 학생들은 겨우 눈을 뜨고 학교에 온다. 나의 일곱 살도 연산 숙제 때문에 1+1의 세계를 알게 된다. 그 숙제 같은 일이 기지개를 시키며 일으켜 세운다. 숙제 때문에 일을 하고 생각을 하고 내 생각과 행동의 가지를 넓게 쭉 펼친다.
숙제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면 기특한 구석도 있다. 늘 찌푸린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숙제가 가엾기도 하다. 삶의 악역을 기꺼이 도맡으면서도 가열하게 나를 부릅뜨고 보고 있는 숙제덕을 보고 있음을 이제야 알아챈다. 내 삶에 텐션과 긴장감을 가져다주는 녀석. 나의 나약함을 숙제에 기대보는 순간도 필요하지 싶다.
숙제를 지어가는 삶이 나를 데려가는 곳이 어딘지 궁금해진다. 가끔은 숙제에 낑낑대고, 숙제를 만들어가며 사는 삶. 어쩌면 숙제는 나도 궁금한 곳으로 내 삶을 데려다놓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