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심리 구성주의
아이 학교에서 학부모 에티켓 안내장이 왔다. 담임선생님과 상담을 원할 때 사전 예약 절차, 아이가 미처 챙기지 못한 준비물을 학교에 가져다줄 때 행정실에 신원확인을 해야 한다는 것과 그 방법, 학교 방문 시 주차장에 주차 후 안전지킴이 선생님에게 신원을 밝혀야 한다는 것, 자가 등하교 시 학부모 차량 주정차 에티켓이 주요 내용이었다. 순간 학교 문턱이 이렇게 높았나 싶고, 까탈스럽다는 인상을 준다.
학부모가 되기 전 우리 모두는 학생이었다. 당연히 학교는 아침마다 거리낌 없이 들어가는 곳이 아니던가. 그만큼 학교는 내가 다녀봐서 잘 아는 곳이다. 물론 아이의 학교는 내가 다니던 학교와는 다르지만 그래도 학교는 학교다. 더군다나 입학식, 공개수업, 학예회 덕분에 몇 번 아이 학교에 와보았고, 무엇보다 내 아이가 매일 다니는 학교이기에 친밀감이 들던 차에 문득 새삼 학교 문턱이 이리 높았나 싶다. 나는 믿을만한 사람이고, 엄연히 이 학교의 학부모라서 학교에 스윽 입장할 수 있다고 여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신원을 확인하지 않고 어떤 성인이라도 들여보내는 문턱이 낮은 학교에 안전을 믿고 당신의 자녀를 보낼 수 있나요?”
학교를 방문하는 학부모는 엄연히 외부인이다. 정답은 내 안에 있다.
에티켓의 마지막 한 문단은 학업에 관한 내용이었다. 요즘 학생들이 학교 숙제와 과제를 해오지 않거나 그 정교함이 미흡한 정도라 우려스러운 상황이라고 하였다. 학생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니 방과 후에 학원을 다니고, 그 학원 숙제가 많아서 시간이 없다고 답했다고 한다. 학원을 안 다니면 뒤떨어질까 봐 스스로 불안하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방과 후에 학원을 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다만 숙제는 하기 싫은 정서에 레벨(level) 강급이라는 스스로의 압박과 부모와 선생님의 질책이라는 외부적 벌의 삼각형이 꽉 끼워진 완벽한 스트레스이다. 숙제를 하지 않으면 학원에서는 더 많은 숙제를 내주고, 부모님께 혼이 난다. 학원에서 월말이나 분기별로 평가를 보는데, 점수에 따라 레벨이 나뉘어 수업받는 반이 달라진다. 레벨이 떨어지면 스스로도 주변 친구들 보기에 창피할 뿐만 아니라 부모님의 실망과 비난이 섞인 화를 듣게 된단다. 이 안내장을 발송한 내 아이의 학교는 초등이다.
레벨을 나누어 수업하는 것은 효율적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교육기관은 대부분 레벨을 나눈다. 수영강습을 배울 때에도 발차기를 배우는 기초반, 자유형을 배우는 초급반, 평영을 배우는 중급반, 접영을 배우는 고급반으로 나뉜다. 수강생은 자신의 수영 실력에 따라 해당되는 반을 등록한다. 기초반에서는 발차기와 호흡을 충분히 연습하고 몸에 체득이 될 때 기초반에 들어가 팔을 돌리며 자유형을 배운다. 한 반에 접영을 배우는 사람과 발차기를 배우는 사람이 한 반에 있다면 수업은 어떻게 될까? 선생님은 이 사람에게는 발차기를, 다음 사람에게는 접영을, 다른 사람에게는 평영 발차기를 알려줘야 할 텐데 이 수업은 말 그대로 우왕좌왕, 이판사판, 아수라장이 될게 뻔하다. 선생님도 학생도 이런 수업은 원하지 않는다. 나의 작고 소중한 월급에서 빼낸 수강료의 가치에는 내가 원하는 수업을 선택한 값이 포함되어 있다.
한 달에 60,000원 남짓의 수영도 수강료의 가치를 위해 레벨에 따른 수업을 하는데 그보다 몇 배는 비싼 아이의 학원비는 그 가치가 더해져야만 한다. 현행 심화가 필요해서 등록한 학원에서는 보다 효율적으로 현행심화를 파고들어 줘야 하고, 선행이 필요해서 등록한 학원은 빠르게 앞을 향해 달려주어야 한다. 그게 작고 소중한 내 월급에서 꽤 많은 부담을 지고 투자한 사교육 수강료의 가치다. 2시간 동안 심도 있게 현행심화를 파고들어야 하는데 이 수업을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이 있어 수업 수준을 조정한다면? 컴플레인을 걸거나 학원을 옮기는 게 자연스러운 절차다. 시간과 비용의 효율성을 찾아 등록한 학원이므로 학원도 이에 응답하는 게 당연한 상호작용이다.
배움을 추구하는 학교에서는 배움에 무엇보다 효율적인 레벨별 수업을 왜 하지 않을까? 심지어 레벨별 수업을 했다가 없애기까지 한 게 학교교육이다. 실제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2000년대 초반까지는 심화반이라고 하는 수준별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고, 성적에 따라 기숙사에 들어가는 제도가 있었지만 지금 모교에서는 시행하고 있지 않다. 왜 학교는 수월성으로 가는 최단경로가 있다고 하는데 굳이 우회하여 돌아가는 걸까?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레벨(level), 혹은 수준은 사물의 가치나 질, 지위, 품질 따위의 일정한 표준이나 정도를 뜻한다. 그렇다면 교과영역에서 레벨은 학생의 수학, 국어, 영어 실력의 질에 따른 일정한 정도를 의미한다. 간혹 뭉뚱그려 말하면 학생을 점수로 줄을 세워 그에 따라 학생의 가치와 질을 결정짓는 것이 된다. 학교에서 학생을 그렇게 나눠주면 명찰 옆에 보이지 않는 레벨이 붙는다. 학생은 교실에서 같은 반 학생의 명찰 옆에 레벨을 함께 본다. 어쩌면 이름도 얼굴도 보이지 않는다. 레벨이 보일 뿐. 그렇게 학생들은 같은 반 학생을 레벨로 본다.
과연 다른 레벨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같은 레벨에서 해당 수준의 문제를 함께 풀던 학생들은 서로의 어려움을 겪는 과정에서 서로 이해가능한 대화를 나누며 균일한 삶을 공유하는 면적을 넓혀간다. 내 생각이 옆에 있는 친구의 생각과 통하는 삶은 안온하고 편안하다. 과연 이렇게 성장한 학생들은 다른 레벨 학생의 이야기가 궁금할까? 그렇게 되긴 힘들다. 얼마 전 ‘재벌집 막내아들’이라는 드라마에서 지독한 가난에 내몰렸던 현우는 재벌가 막내아들 진도준으로 회귀하는 삶을 살게 된다. 재벌집 고명딸로 자란 고모인 진화영은 진도준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게 되고 공금을 횡령하여 회사가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2달 동안 직원들과 하청업체 임금체불이 이루어질 상황에서 진도준은 진화영을 찾아가 노동자는 2달 동안 더 빠르게 가난해질 것이라며 백화점을 넘기라고 말한다. 하지만 진화영은 노동자의 가난은 2달도 참지 못하는 인내심이 없기 때문이라 말한다. 이에 가난을 겪어본 진도준은 분노한다. 사람은 자기가 경험한 만큼 슬퍼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고, 궁금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경험한 만큼 세상을 이해하는 면적을 넓힐 수 있다.
학교는 내 세상만 알고 내 세상만을 경험하는 사람을 키워내려는 곳이 아니다. 하나의 문제를 놓고 문제의 사실적인 면을 보는 학생, 직관적이고 감정적인 사고를 하는 학생, 긍정적인 면을 생각하는 학생, 부정적인 면을 생각하는 학생, 논리적인 사고를 하는 학생, 확산적인 사고를 하는 학생, 생각을 조정하고 통제하는 학생을 모두 만나는 곳이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한 변 길이의 제곱은 나머지 두 변 길이 제곱의 합과 같다.’와 같이 문장으로 정리하는 게 이해가 높은 학생, ‘c2 = a2 + b2’의 등식으로 표현해야 이해가 되는 학생, 피타고라스 정리에 대한 이해를 측정하는 검사문항을 만들어보는 학습을 통해 이해하는 학생, 피타고라스 정리를 활용한 건축물을 만들어보는 활동에 흥미를 느끼는 학생, 자신의 몸으로 직접 삼각형이 되어보는 활동이 기억에 남는 학생이 모두 한 교실에 있고, 알록달록한 이 생각들을 모두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곳이 학교이다.
학교엔 학생 수만큼의 개별적 우주가 공존하는 곳이다. 책을 보고, 여행을 가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듯 학교에서 학생은 나와 다른 친구를 사귀면서 새로운 삶, 경험, 세상을 만난다. 비슷한 친구들 속에서 공감과 편안함을 얻음과 동시에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난다. 내 생각이 말과 행동으로 전해지고, 다른 생각이 내 귀와 눈을 통과할 때 내 머릿속에서 새로운 시냅스가 연결되고 쓰지 않던 영역에 반짝반짝 불이 들어온다. 그렇게 나는 새로운 생각을 가진 사람이 된다. 레벨에 따른 수업의 효율성을 알면서도 바보처럼 랜덤의 교실을 이루는 학교가 손에 쥐고 있는 가치는 여기에 있다.
또 하나의 이유. 학교를 졸업하고 세상에 나와보니 삶의 문제에는 정답이 없었다. 선다형 문제처럼 깔끔한 최적의 정답이 익숙한 나는 내가 선택한 답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자주 흔들렸다. 내 선택이 오답이면 어쩌나. 내 선택이 부분 점수에 불과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은 언제나 문제해결과정보다 결과를 미리 예측하고 전전긍긍하는 나를 만들었다. 20여 년을 학교에 다니고, 20여 년을 세상에서 살게 된 지금, 이제 나는 안다. 세상은 답이 하나가 아니다. 목적지까지 가는 길은 시간이 없으면 고속도로로 가면 되고, 여유가 있으면 국도로 풍경을 보며 우회해도 된다. 가까운 거리도 차로 갈 수도 있고, 내 두 다리에 힘을 보태며 걸어갈 수도 있다. 세상은 그리 납작하지 않다. 시간과 이야기를 가진 4D이다.
학교의 배움은 교과 지식만이 아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 역시 학교교육에서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 연산을 연습하고 수학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수학적 문제해결력을 높이듯, 세상을 살아가는 문제해결력도 연습할수록 는다. 조선시대 종묘의 역할과 의의를 알고 외우는 학습에 더해 현대 사회에서 종묘의 역할을 하는 대한민국의 정신적 이념과 가치를 현재 어느 건축물에서 찾을 수 있을까 하는 학습이 함께 이루어지는 곳이 학교이다. 학생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묘가 갖는 조선의 이념과 가치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이념을 살핀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건축물을 찾아보며 이를 대입해 본다. 여러 자료를 검색하고, 그중 나의 생각과 맞는 자료를 취합하고, 검토하고, 주변에 조언을 얻고, 같은 팀원들과 의견을 나눈다. 누군가는 국회, 누군가는 법원, 누군가에게는 한국은행일 수도 있겠다. 답은 하나가 아니니까. 그렇게 여러 생각을 만나며 내 생각과 선택을 만들어본다. 학생은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연습을 통해 세상에 대한 문제해결력을 기른다.
레벨 수업의 지름길을 두고도 랜덤 하게 학생을 구성하는 학교는 바보 같아 보인다. 학교에서 자고 학원에서 배운다는 말을 듣고도 이런다. 학교숙제는 안 해도 학원숙제는 꼬박꼬박 해간다는 말을 듣고도 초등학교는 정규시험을 안 보고, 중학교 1학년은 자유학기제를 해낸다. 이쯤 되면 학교는 바보 같아 보이는 게 아니라 바보가 맞다. 그것도 욕먹는 바보.
바보 학교도 순정은 있다. 첫 번째 마음은 학생들이 세상을 보는 생각의 면적이 넓고 울창했으면 하는 바람 하나. 두 번째 마음은 세상에서 만나는 문제 앞에서 정답에 나를 끼워 넣느라 전전긍긍하지 않기를. 그때는 하나만 생각하기를. 정답에 끼워넣기에 나(self)는 너무 나다운 사람이라는 것. 세상은 그렇게 납작하지 않다는 것. 내게 세팅된 나다움으로 여러 해결책을 알아보고, 나에게 가장 적절한 방법을 선택하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 두 번째 마음이 이루어질 때 첫 번째 마음인 넓고 울창한 세상이 이루어진다. 첫번째 마음이 이루어진 세상에서 두발 쭉 뻗고 나다움으로 살 수 있다. 학교는 이런 선순환을 바란다. 그리고 믿는다. 레벨이 아닌 나로 살아갈 때, 서로의 생각을 나눌 때 세상은 더 울창해진다.
오늘도 바보학교는 잘 안 보이는 순정을 키워간다. 어쩌면 학교가 너무 욕심이 많은지도 모르겠다. 바보가 욕심까지 많으면 답이 없다는 생각이 들겠으나 교실에 앉은 알록달록한 학생 한 명 한 명을 보면 이 욕심은 버릴 수가 없다. 어쩔 수 없다. 이 욕심 계속 부려보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