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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Jul 14. 2024

다정과 성실이 윤을 내는 교실

학교심리 교실의 낙관

  어린이들의 얼굴이 초롱초롱 빛이 난다. 물을 마시고 팽팽해진 연두의 잎이 간지러운 햇살을 받아 모든 방향으로 반짝인다. 동그랗게 열린 눈과 싱긋 오른 입꼬리에 동그랗게 부푼 볼을 담은 기대하는 어린이의 얼굴에는 주름이 닿을 새가 없다. 매일의 하루에 물 한 컵, 햇살 한 줌이면 여기저기에 앉은 어린이의 얼굴엔 기대와 낙관이 피어난다.



  기대하는 어린이의 표정은 가볍게 날아 내 마음에 내려앉는다. 내 마음의 마른땅이 촉촉해진다. 간질간질하더니 이내 작은 여린 녹색이 방긋하고 제 잎을 틔운다. 어린이의 기대하는 마음은 내 마음을 연둣빛을 심어준다. 턱을 괴고 나른한 미소로 음미하고 싶은 순간이지만, 이미 시간은 9시. 쇼는 시작되었다. 나는 교사의 얼굴을 하고 어린이들 앞에 선다.           



  “선생님, 언제 자리 바꿔요?”

  “지금 바꿔요!”

  “지금 바꾸면 안 돼요?”

  어린이들의 기대에 찬 아우성은 매월 1일 자리 바꾸기와 함께 왔다.           



  낙관은 양면이어서 앞으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뿐만 아니라 내가 보낸 지난 시간이 좋았다고 여기는 마음도 함께이다. 어린이는 이미 그 낙관을 알고 있는 듯하다. 지난달 자리와 모둠원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어린이도, 지난달 자리가 좋았던 어린이도 모두 이 시간을 기다린다.          



  오늘부터 시작될 한 달의 운명을 제 손에 담는다. 한 명씩 나와 제비 뽑기를 시작한다. 종이에 적힌 숫자를 보고 제 자리를 아는 것이 먼저이고 반 전체가 다 뽑고 나면 한 명씩 제 자리 숫자를 말한다. 짝과 모둠이 드러나는 순간! 더 이상 침착할 수 없는 요란한 마음들이 두더지처럼 튀어 오른다. 정현이와 성민이는 이미 둘이 얼싸안고 신이 났고, 남자 세 명에 혼자 여자인 서현이와 여자 세 명에 혼자 남자인 성현이는 그저 입을 앙당 물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어느 자리도 괜찮은 연서는 연서를 좋아하는 다솔이가 꽉 껴안고 있다.    


       

  세상의 모든 기쁨과 낙심들이 모두 튀어 오르는 사이 누군가 말한다.

  “야! 너무 좋아하는 티 내는 거 아니라고 하셨잖아.”

  흥분 속에서 차가운 이성이 발동한 해율이 덕에 나도 말할 기회가 생긴다.

  “기억하죠? 자리 바꿀 때의 매너 있는 자세. 같은 모둠이 된 친구를 반가워할 수는 있지만 주의할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대놓고 싫은 표정을 짓지 않는 태도. 4학년은 내 마음을 나와 상대가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조절하는 힘이 있잖아요. 그렇죠? 자 그러면 책상과 의자를 안전하게 천천히 새 자리로 이동합시다.”          



  새 달, 새 자리에는 새 모둠 친구만 생기는 게 아니다. 새 역할이 생긴다. 우리 반은 각 모둠이 각기 다른 활동을 맡게 된다. 한 달 동안 1모둠은 칠판관리, 2모둠은 환경관리, 3모둠은 교실관리, 4모둠은 놀이체육, 5모둠은 학습자료, 6모둠은 급식관리 역할을 한다.      



  자리를 막 바꾼 월 초에는 삐거덕거리는 게 자연스럽다. 새로운 1모둠은 쉬는 시간에 여느 때와 같이 노느라 2교시가 시작되어도 칠판엔 여전히 1교시 판서가 남아있고, 놀이체육부는 준비 체조의 순서를 알지 못해 맨 뒤에서 체조하는 나를 힐끔힐끔 보느라 반 박자씩 늦는다. 태블릿은 순서 없이 충전해 두어서 나눠줄 때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한다.



  나는 처음의 소란을 그저 지켜본다. 2교시가 시작되자 아무 말 없이 아직 남아있는 1교시 판서를 지우는 내 모습에 새로운 1모둠 학생들이 머쓱해한다. 2교시가 끝나자 1모둠 친구들은 삼사오오 모여 이제 요일별로 판서를 지우자며 나름의 회의를 통해 순서를 정한다. 체육시간 준비체조 순서를 외우지 못한 새 달의 4모둠 학생의 빨개진 볼과 어색한 팔 다리의 시선 끝엔 맨 뒤에서 준비체조를 하는 내가 있다. 새로운 4모둠 학생들은 자신들을 바라보는 친구들의 시선을 모른체 하고 저 뒤에서 체조를 하는 나를 따라하며 구령을 맞춘다.


       

  점심시간이면 내 옆엔 급식 채소 반찬 검사를 하는 당번이 앉는다. 오늘의 채소를 정하는 것도, 어느 정도 선에서 불통과 통과를 하는 것도 6모둠의 몫이다. 요일별로 순서를 정해서 6모둠 친구 중 한 명씩 돌아가며 급식 채소를 검사하는데 나는 그저 옆에 앉아있다. 기준은 하나. 오늘의 채소 1번 이상은 먹어보기. 정말 못 먹겠으면 솔직하게 말하면 통과. 하지만 나를 위해서 한 번은 먹어보기. 하나의 기준 아래 검사하는 4명은 모두 각자의 판단이 다르다. 매일 달라지는 급식 메뉴만큼 각자 다른 판단을 내리는 어린이들을 보는 것은 점심시간에 내가 귀를 쫑긋 키워가며 므흣하게 갖는 재미이다.      



  시원시원한 성격을 가진 연제가 검사하는 날은 쉽게 가는 날이다. 식판을 들고 오는 친구들에게 똑같이 묻는다.

  “숙주나물 한 번이라도 먹었어?”

친구가 대답하려는데 연제의 다음 말이 더 빠르다.

   “응. 가.”

  “연제야 귀찮아?”

  “네, 선생님. 다 먹었겠지요”     



  오늘 연준이는 각오를 단단히 했다.

  “선생님, 친구들이 한 번씩 안 먹었으면서 다 먹었다고 거짓말해요. 오늘은 깐깐하게 볼 거예요.”

  “응, 그래. 연준이가 알아서 잘하겠지. 근데 알지? 연준아, 다음 달의 연준이를 위해 좀 살살해.”

  “진짜야, 한 번은 먹었어.”

  “응, 알았어. 근데 진짜 먹었어?”

  “진짜 먹었어. 수연이가 봤어.”

  “응, 가.”

  “선생님, 아무리 봐도 안 먹은 거 같은데 먹었다고 한다니까요.”

  “어떻게 하니. 믿어야지 뭐. 아마 주변 눈치가 있으니 한 번은 먹었겠지. 판단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야. 그렇지?”

  돌아오는 선생님의 말은 위로가 안 되겠지만 그래도 연준이는 푸념을 하고서 마음이 풀린다.



  “정말 못 먹겠어. 먹어보려고 했는데 이건 못 먹겠어.”

  “그래도 한 번은 먹어봐.”

  “진짜 못 먹어.”

  “그래, 그러면 그냥 가.”

단단히 다짐했던 첫 마음이 친구의 고백에 사르르 무너지는 연준이다.      

  평소 꼼꼼한 성격으로 시험지를 몇 번이나 검토하고 또 검토하고 나서야 제출하는 민율이가 검사하는 날은 나도 흠칫 놀란다. 새끼손톱 길이에 여름 비처럼 얇은 굵기의 새송이버섯까지 샅샅이 검사한다.

  ‘저것까지 본다고?’

돌아서는 선우는 한 마디 한다.

  “아, 다음 달에 내가 6모둠 되면...!!!”

워낙 작은 데다 미끄덩거려 몇 번의 젓가락에도 집어 지지 않아 그 작고 소중한 새송이버섯 한 가닥을 숟가락에 겨우 얹어 입에 넣으며 꺼낸 선우의 말에 민율이는 한번 싱긋 웃고 그만이다.  




  각자의 판단은 각자가 다른 모양으로 타인과 영향을 주고받는다. 기본은 지키되 재량의 영역에서 디테일이 달라진다. 연제를 만나면 평소보다 5분은 더 긴 점심시간을 만날 수 있고, 연준이를 만나면 꼬치꼬치 물어보지만 결국 못 먹겠다고 진심으로 말하면 통과다. 민율이가 선생님 옆에 앉아 있으면 작은 조각 하나 허투루 남으면 안 된다. 아이들은 그렇게 급식시간에도 환경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적절히 변형하며 적응한다.



  우리 반에는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일을 잘하기 위해 애쓰는 학생들이 있다. 쉬는 시간에 칠판을 지워주는 1모둠 덕분에 우리 반은 매 시간마다 나는 판서를 친구들은 노트정리를 하며 각자의 한 글자마다 수업의 의미를 채워간다. 첫 주에 익숙지 않은 손으로 지워진 얼룩덜룩한 칠판은 내가 아무 말하지 않아도 월말이 되면 정말 거미도 미끄러질 만큼 반질반질 윤이 난다. 1모둠 아윤이가 닦아둔 칠판은 천장 형광등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이 난다. 이 반질반질한 칠판에 하얀 글씨로 판서를 하는 내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인 것만 같아 미안할 지경이다. 나도 내가 쓸 수 있는 가장 반듯한 글씨로 판서를 하며 1모둠의 성실함에 혼자 화답한다.      



  친구들의 작품을 가지런히 전시하고 정리해 주는 2모둠 덕분에 사물함 위에는 학교폭력 예방과 안전활동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 담긴 소책자가 세워져 있고, 창가엔 24개의 스탠드형 작품철에 국어시간에 쓴 제안하는 글이, 창문엔 미술시간에 만든 스테인드글라스에 여름 햇살이 숨을 고르며 교실에 들어온다. 24명의 활동은 복도까지 넘쳐흘려서 복도 벽엔 사회시간에 만든 모둠별 공공기관 온라인 견학 보고서가 노란색 동그라미 자석에 각을 잡고 걸려있다. 창가에서 불어오는 반가운 바람에 사물함 뒤에 전시된 소책자 활동물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진다. 2모둠 친구들은 냉큼 가서 바닥에 떨어진 활동물을 다시 사물함 위에 전시한다. 사물함 쪽에서 놀던 아이들도 덩달아 함께 정리한다. 2모둠 덕분에 우리의 눈길 닿는 곳마다 우리가 배우고 펼친, 성장의 시간들이 쉽게 보인다. 우리가 배우고 있음이 선명하다.           



  청소시간에는 매의 눈으로 각 모둠의 청소를 점검하는 3모둠이 있어 깨끗한 교실과 책상줄 킬각이 유지된다.  체육시간마다 체조와 팀 조끼를 준비하고 한 달에 한 번 재미있는 놀이를 만들어 소개하는 4모둠 덕분에 체육시간은 활기찬 기대로 들썩인다. 4모둠 소윤이는 웅장해진 마음으로 말한다.

  “선생님! 드디어 준비 체조를 다 외웠어요!”

소윤이 덕분에 친구들은 팔과 다리를 쭉쭉 펴가며 준비 체조를 꼼꼼히 한다. 덕분에 체육 시간에 친구들은 다치지 않고 충분히 뛴다.                



  5모둠은 사회와 과학 시간에 조사학습을 위한 태블릿을 준비하고 사용 후 그때그때 충전을 해준 덕분에 충전되지 않아 사용하지 못했던 시간은 한 번도 없었다. 매일 오늘의 채소 한 가지를 정해서 채소를 한 번이라도 먹었는지 확인해 주는 6모둠이 있어 어린이들은 깻잎 김치 한 입, 머위대 나물, 참나물, 고구마대 나물 한 입의 경험을 제 입으로 겪는다. 콩나물과 시금치나물 말고도 드넓은 채소의 세계를 경험한다.    


       

  자기 일을 성실히 해내는 어린이들이 만드는 학급은 매일 나아질 수밖에 없다. 어린이들이 매달 경험하는 학급의 역할은 선택한 역할이 아니다. 어린이들의 서투른 처음들에는 거리를 두고 천천히 그냥 지켜보면 된다. 어린이들은 시간이 지나며 점차 정해진 역할과 기준에 자신의 판단을 저울질하며 제 모양으로 역할을 해낸다. 내 역할을 잘 해낼 때 매끄러워지는 수업시간, 급식시간, 깨끗한 교실을 만든다.



  어린이들은 제 역할을 해내며 마음에 단단한 생각이 자리 잡는다. 내가 움직이는 대로 내 교실이 달라진다는 것. 낯선 역할도 하루씩 해내면 능숙해질 수 있다는 것. 다음 달의 나를 위해 지금 친구들에게 너무 깐깐하게 대하지 않는 게 필요하다는 것. 이번 달의 내가 애썼듯이 다음 달 내 역할을 해낼 친구도 그렇게 하리라는 신뢰. 다음 달의 내가 어떤 역할을 할지 모르지만 각자가 제 역할을 해낼 때 우리 교실이 아무 일 없이 자연스럽게 일상적인 수업과 쉬는 시간과 급식시간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자연스러운 교실은 각자의 성실함과 애쓰는 마음들이 모였을 때 가능하다는 것을.


       

  그래서일까? 신기한 일은 어린이들은 매일씩 더 잘하기 위해 애쓴다. 월 말이 될수록 교실은 더욱 안정되고 구석구석 어린이들의 발걸음과 손길이 여러 번 닿은 교교실은 반질반질 윤기가 난다. 자신의 일을 잘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많은 세상은 윤이 난다. 그런 세상에서 살 때 오늘이 평화롭고 내일도 괜찮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긴다.    


       

“봐줘. 봐줘.”

“그럴 수도 있지.”

“4모둠이 알아서 잘하겠지.”

나의 말엔 단호한 기준선은 있지만 제 역할을 해낸 어린이들 덕분에 나는 명절날 할머니처럼 너그러워진다. 어린이들이 내어준 교실의 은은한 윤을 본다. 성실과 다정이 윤을 내는 교실에서 산다는 것은 오늘도 아름다운 세상 쪽으로 희망을 품을 수밖에 없는 확실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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