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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Oct 31. 2024

가을엔 빨강 니트를 입겠어요.

  하루치 무게를 온몸에 묻히고 시동을 껐다. 에디트 피아프의 La Vie En Rose가 페이드아웃되며 차도 제 하루치 역할을 끝낸다. 보조석에 놓인 가방을 들고 옆차에 문이 닿지 않게 조심스레 내린다. 나름 명품인 내 가방을 채우고 있는 건 단무지, 김밥용 김, 당근, 그리고 대단한 시금치 두 다발이다.



  이 대단한 시금치로 말할 것 같으면 한 봉에 5-6뭉치가 무려 7,000 원이다. 무심결에 집은 시금치 가격에 놀란 마음은 이내 생활형 고민으로 흘러간다. 시금치를 살까 말까, 한번. 그래 아이 소풍 도시락인데 사야지. 하고 한 봉 집으니 또 고민이다.



  겨우 5-6 뭉치 들어있는 시금치를 데치면 김밥 2-3줄 겨우 쌀텐데. 열 살의 소풍 김밥에만 시금치 넣어 싸줄까? 내가 집에서 먹을 건 시금치 없이 먹을까? 아무리 소울푸드가 김밥인 어머니인 나도 비닐봉지 안이 홀랑홀랑한 시금치 한 봉지에 7,000원이면 시금치 넣은 김밥이 싫다고 하실지 모르니까. 어머니는 싫어하는 게 많으니까. 망고도 싫어하고, 한 겨울 뽀얗게 빨간 금딸기도 싫어하고, 한창땐 샤인머스켓도, 스테이크도, 어떻게 비싼 것만 다 골라서 싫어하니까.



  내 안의 어머니가 불쑥 튀어나와 시금치 앞에서 살까 말까 한참 동안 서성거렸지만, 에잇! 다른 거 아끼지 뭐. 하고 시금치를 한 봉 더 집었다. 어머니도 김밥은 놓칠 수 없는 소울푸드니까. 백 개쯤 집어먹어서 뇌에도 숨이 가쁠 만큼 먹을 수 있는 게 김밥이니까.




  겉은 명품 로고가 있지만 내용물은 울긋불긋한 생활만 가득한 가방을 들고 차를 내리는데 유난히 푸석한 손에 시선이 간다. 어머나, 맙소사. 손이 찌찌하게 회색이다. 중간고사 시험지를 채점매고 바로 퇴근한 흔적이다. 집에 가서 손을 씻으면 회색 거품에 기겁을 하겠지. 뭘 해도 흔적을 남기는 칠칠치 못한 나는 셜록에게 걸리면 바로 신상이 탈탈 털릴 게 분명하다. '흠, 이 사람은 키는 165cm 정도인데, 손은 키에 비해 작은 사이즈군요. 왼손 손톱 밑 손가락과 새끼손가락으로 이어지는 손날에 연필심이 오른손에는 빨간 펜이 뭍은 걸로 보아 방금까지 채점을 맨 게 분명해요.‘



  검은 차에서 내려 회색의 아스팔트를 걸으며 내 회색 손을 바라본다. 그래도 오늘 하루 편안했지. 하며 입술 양 끝에 힘을 주고 좌우로 당겨본다. 웃는 표정을 만들어 뇌를 속여봐야지. 속인다기보다는 그래도 오늘 하루 무탈했으니, 오늘은 좋은 날이 맞다.

  


   입술 스트레칭을 하니 눈도 좌우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회색 손에서 떨어져 나온 눈은 이제 아파트 정원수를 바라본다. 벌써 은행나무가 제법 노란 전구를 달았다. 부지런도 하지.



  어머나! 뭐야! 어? 이거 뭐지? 노오란 은행나무잎이 가을 햇살에 딸랑딸랑 빛나는 사이로 눈이 시리게 새파란 가을 하늘이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어깨를 으쓱이고 있다. 맙소사. 투명한 파랑이라니! 너무 가을이잖아! 아무래도 너그러운 누군가가 나 모르는 사이에 파랑 물감을 하늘에 아낌없이 뿌려놓은 게 틀림없다. 가을의 여린 수분과 더해진 파랑의 수채화는 제 아름다움을 알고 있음에도 틀림없다. 저 당당하고 군더더기 없이 한껏 반짝이는 파랑의 빛은 저 자신을 사랑하는 건강한 것들만이 뿜어낼 수 있는 진짜, 찐 파랑이다.




  자신감 넘치는 새파란 파랑의 가을은 밀당도 없이 직진한다.  내 어설픈 회색의 마음에 전속력으로 와 충돌한다. 이 박력이라니! 내 마음이 부서져라 안아주는 새파랑에 내 마음은 데어버릴 수밖에! 내 마음도 이내 투명한 가을의 샛파랑이 울려 퍼진다. 파랑파랑. 파랑파랑. 파파랑 파파랑.  가을의 충격에 몸 둘 바를 모르는 나는 그저 그 자리에 섰다. 좋아하면서. 가을에게 나를 맡겼다. 마음껏 나를 울리라고. 온몸 구석구석을 내어줄 준비가 되어있다고. 마음껏 내 안으로 들어오라고. 어쩌면 이미 내 마음에 네 자리가 있었다고.



  이건 반칙이잖아요. 파랑 가을에 한 방 크게 맞고 서있는 지금, 내 눈앞에 샛노랑이 반짝이고 샛파랑이 파랑파랑 쨍쨍히 내려앉은 지금, 산들거리는 마른 가을바람을 타고 은은한 향이 내 코에 와 부딪힌다. 봄부터 출근할 때마다 가을을 기다리게 했던, 금목서. 지난봄, 아파트 조경 수목으로 금목서를 추가한다는 소식에 나는 얼마나 가을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금목서가 우리 집 가까이에 배치된 것을 보고 얼마나 행운이고, 다행이고, 얼마나 내가 운이 좋은 사람인 줄 모른다며 스스로를 축하했던 나였다. 그 금목서의 은은한 금빛 향이 울려 퍼진다. 난 그저 여기 서있었을 뿐인데 친절하게 나에게까지 와닿아 다정한 향을 살랑살랑 내어준다. 항복.




항복. 무장해제. 이 친절하고 아름다운 가을. 도무지 행복하지 않을 수 없는, 아름답지 않을 수 없는 가을의 오후에 사랑에 빠지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박력 있는 가을의 손을 덥석 잡으니 회색의 내 마음에 노랑노랑, 파랑파랑의 물감이 번진다. 내 일상의 회색들과도 잘 어우러지는 가을의 색이라 더 다행이다. 셋이 너무 동떨어지면 내 삶이 안쓰러워 보일 텐데, 가을이 내 회색과도 잘 놀아주는 걸 보니 같이 놀길 잘했다 싶다. 나도 괜찮은 회색의 삶이었지 싶다.



  내가 음미한 노랑! 파랑! 가을에 화답하고 싶다. 나도 멋들어진 컬러 하나쯤 내보이고 싶다. 내가 잘하는 걸로. 무엇? 쇼핑! 그래도 옷 쇼핑경력 어언 20여 년 차에, 내 몸 꾸미는 것에는 소질이 좀 있다. 쇼핑몰 앱을 열었다. 어제도 그제도 보았던 그 빨강 니트. 가을이 오는 냄새가 나자, 빨강 니트를 찾았다. 하늘 아래 같은 빨강은 없기에 여러 빨강 중에 장밋빛 빨강보다는 토마토 빛 빨강을 찾고 고르고 골랐다. 하얀기 섞인 빨강보다는 그윽하지만 맑은 느낌이 은은히 피어오르는 빨강 니트를 보는 순간, 너다! 하며 장바구니에 담아 두었다. 그리곤 몇 달간 만지작 거리며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자린고비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보기만 했던 빨강 니트였다.



  결재를 하기엔 명분이 없었다. 어머니는 싫어하는 게 원래 많아야만 하니까. 열 살을 위한 만화 삼국지는 보자마자 결재하고, 몇십만 원의 열 살 학원비는 일시불로 결제하느라 시금치 앞에서 서성거리는 게 어머니의 오늘이었으니까. 더욱이 빨강이어버리는 니트는 사치가 아닐까 하는 망설임은 시금치 앞에서보다 더 강했다. 하지만, 아니 드디어 나는 빨강 니트를 결재했다. 박력 있게 다가와준 가을에 대한 내 마음. 가을이 꼬셔주는데 당연히 빠져야지요. 이미 사랑에 빠진 나는 사치를 부려본다. 사랑은 찰나를 사는 거니까. 그리고 사랑은 빨.. 빨.. 빨강이니까.



  주말이 되면, 맑은 가을의 투명함을 담은 빨강빨강 니트를 입고 카페에 가야겠다. 장가에 앉으면 가을이 오는 그곳. 남편과 작년 가을에 갔다가 흠뻑 반해버린, 내가 좋아하는 그곳. 카페에 들어가기 전에 카페 앞을 먼저 걸어야지. 키가 큰 오래된 노랑노랑 은행나무가 반짝이고 파랑파랑 샛파랑 하늘이 찬란한 제 색을 밝히고 부지런한 몇몇 잎들 덕분에 희끗희끗해졌지만 여전히 폭신한 연둣빛 카펫이 깔린 잔디 위에 밝은 회색의 오래된 벽돌 건물이 고아하게 자리 잡은 그 선교사 자택 앞을 걸으며 투명한 가을 햇살에 내 빨강 니트를 대어 보아야지.



  노랑! 파랑! 가을 속에서 내 빨강! 빛도 가을에 가 닿기를. 가을의 색과 내 마음이 서로 만지작 거리며 불어오는 웃음에 은은한 황금빛 금목서 향이 울리는 가을을 감각하는 것. 부지런했던 내 회색의 오늘도 괜찮았지만 그 순간에 나는 사랑에 빠진 나른한 황홀함으로 가만히 서서 가을을 음미하리라. 가만히 있어도 다가오는 가을은 친절하고 다정도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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