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심리 공부법 교육 심리 청소년
고등학교 때 영어 시간의 시작은 단어시험이었습니다. 수업 10분 전에 최대한 집중해서 외웠어요. 늘 단어장을 덮자마자 시험은 시작되었고, 결과가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단어시험을 잘 넘기며 벼락치기의 위대함을 몸소 체험했고,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문제는 시간입니다. 흐르는 시간은 제 편이 아니었어요. 하루하루의 단어시험은 잘 넘어갔는지만, 그 하루들이 쌓이지는 않았나 봅니다. 분명 어디서 봤던 단어인데 정확한 뜻이 기억나지 않더군요. 심지어 처음 보는 단어네! 했던 단어가 이미 한 달 전 단어시험에서 제 손으로 써서 심지어 맞았던 단어였던 적도 있어요. 벼락치기는 임시방편은 되어주었지만, 저에겐 잘한다는 착각만 남기고 장기기억은 남기지 못했습니다. 수능은 오늘 벼락치기로 공부해서 내일 보는 시험이 아니었거든요.
어떻게 공부해야 학습내용이 장기기억에 저장되어 오랫동안 나를 도울 수 있을까요? 앞서 만나본 던로스키와 연구진은 학습자의 역량을 크게 요구하지 않고, 같은 시간을 썼을 때 더 많은 기억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2가지 공부법을 효과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분산학습(distributed practice)입니다.
분산학습이란
분산학습은 같은 양의 공부를 한 번에 벼락치기로 공부하는 것이 아닌 시간을 나누어 공부하는 학습법입니다.
Rohrer와 Taylor는 100개의 수학문제를 5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풀어낸 그룹과 하루에 1시간씩 5일에 나누어 공부했던 그룹의 시험 성적을 비교했습니다. 학습이 끝난 직후에 본 평가에서 두 그룹은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시간은 분산학습 편이었습니다. 30여 일 후 같은 유형의 시험을 본 결과, 매일 1시간씩 공부했던 학생은 직전 시험과 비슷한 수준의 성적을 보였지만 5시간 동안 몰아서 공부했던 그룹의 성적은 크게 하락했습니다. Cepeda와 동료들이 분산학습과 벼락치기에 관한 200여 개의 연구를 분석한 결과도 비슷합니다. 시간이 흐른 후 분산학습 학습자가 47%의 회상률을 보일 때 벼락치기 학습자의 회상률은 단 37%에 불과했습니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공부했는데 기억에 남아있지 않는다는 건 너무나 가성비가 떨어지는 일입니다. 공부는 누적되었을 때 힘이 세집니다. 벼락치기는 발등에 떨어진 급한 불을 끄는 데는 어느 정도 도움은 되겠지만 공부라는 장기레이스에 적절한 공부법은 아닌 게 확실합니다.
분산학습이 유리한 이유
분산학습이 유리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첫째, 분산학습은 뇌의 특성에 잘 맞는 학습법입니다. 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공부하는 뇌는 한꺼번에 많은 학습량을 쏟아붓는 학습보다 적절한 양을 적절한 간격으로 나누어 반복 학습할 때 뉴런 간 연결이 더욱 잘 되고, 보다 견고한 연결을 만들어 냅니다. 뉴런 간의 견고한 연결이 장기기억에 유리합니다.
둘째, 잠이 비결이고 보약입니다. 혹시 어제 공부했던 내용이 다음날 좀 더 이해가 잘 되었거나 전날 풀리지 않던 문제가 다음날 풀렸던 경험을 해보았나요? 왜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최근 뇌과학 연구에서는 뇌는 잠자는 동안 청소를 한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깨어있을 때는 뇌는 분주합니다. 많은 자극들을 받아들여야 하고, 생각도 해야 하고, 공부한 내용을 정리해서 저장하느라 바쁘죠. 이 과정에서 뇌 안에서는 노폐물이 생깁니다. 이 노폐물이 청소되지 않으면 독소가 생기게 되고 알츠하이머와 같은 신경 질환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뇌에 쌓인 노폐물과 독소를 배출시켜 줘야겠죠. 뇌척수액은 뉴런 사이를 지나가며 노폐물과 독소를 씻어주고 정맥을 따라 뇌 바깥으로 빠져나가는데, 우리가 깨어있을 때보다 잠을 자고 있을 때 훨씬 많은 양의 뇌척수액이 흘러들어 활발히 청소합니다.
분산학습으로 공부할 양을 나누고, 사이사이에 잠을 자는 것은 어제 학습한 내용을 잘 정돈하고 사이사이 끼인 먼지를 닦아내어 주는 일입니다. 개운해진 뇌에 오늘의 공부가 더해질 때 뉴런 간의 연결은 명쾌해집니다. 뇌에게 시간을 주세요. 뇌가 개운하게 샤워하면 어제 풀리지 않던 문제가 풀리게 됩니다.
셋째, 간격을 두고 공부할 때 더 집중합니다. Cepeda와 동료들은 2시간 분량의 학습내용을 30분씩 4번에 나누어 학습할 때 2시간 연속으로 학습할 때보다 집중력이 더 유지된다고 밝혔습니다. 실제로 역사과목을 하루에 몰아서 공부할 때, 처음엔 꽤나 집중하지만 뒷부분으로 갈수록 집중력이 흐트러진 경험이 있을 거예요. 힘이 부치다 보니 뒷부분은 모르는 내용도 그냥 지나치게 되고, 심지어 공부하지 못하고 시험을 보는 경우도 생깁니다.
우리의 집중력은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분산학습은 집중학습에 비해 피로도가 덜합니다. 시험기간에도 한 과목을 계속 공부하기보다 과목이 바뀌게 되면 한차례 환기가 되며 다시 시작하는 계기가 되어 뒷부분도 꼼꼼하게 학습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례는 분산학습이 학습의 질과 집중력 유지에 유용함을 보여줍니다.
넷째, 분산학습은 실수나 오류를 고칠 기회를 줍니다. 공부는 모르는 것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내가 모른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도 굴욕적인데, 이해도 쉽지 않아 어렵습니다.
이때 벼락치기는 실수, 잘못 이해한 내용, 이해가 안 되는 내용을 바로잡을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외우기도 급한데 어떻게 실수나 오류가 눈에 보이겠어요. 일단 넘어가자 하고 타협하게 됩니다. 당연히 틀린 부분은 또 틀릴 수밖에 없죠.
반면 매일에 걸친 분산학습을 하게 되면 어제의 실수를 교정할 시간과 여력이 생깁니다. 어제는 보이지 않던 부분이 보이고, 잘 이해되지 못한 부분이 더 세밀하게 이해됩니다. 분산학습을 할 때 시간은 내 편이 되어줍니다.
분산학습의 비결- 1. 초기엔 집중학습, 복습엔 분산학습
집중학습은 단기 레이스 및 처음 공부를 시작하는 시점에 유리합니다. 단어시험, 중간 및 기말고사처럼 단기간 공부는 집중학습으로 성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또한 학습내용이 비교적 단순하고, 개념 간 연결이 덜한 학습도 집중학습으로 성과를 보일 수 있습니다. 특히 처음 공부할 때는 집중학습이 관련 개념을 익히는 데 효율적입니다. 수학학습에서 일차방정식 단원을 집중적으로 학습하고, 수영에서 자유형 영법을 집중적으로 익힐 때 해당 개념과 활동에 익숙해집니다.
집중학습이 장기기억에 취약한 이유는 집중력과 깊은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과목을 하루 종일 공부할 때 지루함과 피로감을 느끼며 집중력이 떨어집니다. 또한 수학과 같이 학습내용이 위계적이고, 역사와 같이 시대적 연계성이 중요한 과목의 경우 벼락치기와 같은 집중학습은 학습내용의 깊이 있는 이해가 어렵습니다. 어려운 내용일수록 우리 뇌가 다시 한번 정리하고 파지 하는 시간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분산학습도 취약점이 있습니다. 바로 초기 학습의 경우 학습량이 많을 때 효율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500쪽짜리 교재를 하루에 5쪽씩 공부하면 100일이 걸립니다. 100일을 꾸준히 공부하기 어려운 상황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우리 삶은 변수의 연속이니까요. 이때 100일 후 처음 공부했던 내용이 잘 기억날까요?
분산학습의 취약성은 집중학습으로 보완할 수 있습니다. 초기 학습은 개념과 기능을 집중적으로 학습합니다. 이후 시험기간까지 적정한 간격을 두고 분산 복습을 하는 것입니다. 일단 한번 처음부터 끝까지 개념을 훑어본 후, 나누어 매일 나누어 복습할 때 능숙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연습해야 하는 피아노 곡을 끝까지 연주해 본 후, 매일 나누어 복습하는 것입니다.
분산학습의 비결 2. 교차연습과 시너지
교차연습(interleaving practice)은 서로 다른 유형의 학습을 번갈아 학습하는 공부법입니다. Taylor와 Rohrer는 비슷한 유형의 문제를 집중해서 푸는 것보다 서로 다른 주제를 섞어서 푸는 것이 장기기억에 효과적임을 밝혔습니다. 예를 들어 수학문제를 풀 때 자신이 취약한 급수 파트만 집중적으로 푸는 것보다 미분, 적분 단원과 섞어서 문제를 푸는 것이 더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교차연습이 효과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우리 뇌는 차이를 인식할 때 활성화되며 개념 간 연결을 이룹니다. 같은 유형의 문제를 반복하면 풀이방법을 단순히 외워버리는 피상적 사고를 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학습자는 내가 잘한다고 여기는 유창성 착각에 빠지게 되죠. 하지만 미분, 급수, 적분이 혼합된 문제에서는 적용해야 하는 개념 간 차이를 인식하고 선택하는 과정에서 각 문제의 특징을 확실하게 구분하게 됩니다. 또한 두 개념을 비교 대조하며 개념 간 차이를 명확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둘째, 장기기억 형성에 유리합니다. 앞서 장기기억을 형성하는 데는 지식 간 연결이 중요하다는 내용을 다루었습니다. 교차연습은 서로 다른 유형의 개념을 활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개념 간 관계를 이룹니다. 또한 한 가지 유형으로 이루어진 문제를 해결할 때보다 개념 간 이동을 위해 더 많은 인지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앞서 살펴본 바람직한 어려움 이론에 따라 더 많은 인지적 노력을 들인 교차연습이 장기기억에 유리한 이유입니다.
셋째, 실제 시험은 교차연습입니다. 시험은 한 과목에 여러 주제의 내용으로 구성됩니다. 우리가 모의시험과 기출문제를 풀어보듯 당연히 여러 유형으로 이루어진 문제를 섞어 풀어보는 것이 실제 시험에 유리합니다.
분산학습과 교차연습이 만났을 때 시너지를 낼 수 있습니다. 한 단원 및 유형만 집중적으로 풀기보다 학습내용을 분산하고, 단원별로 섞어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미분 10문제, 적분 10문제, 급수 10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개념 간 관련성 이해와 차이점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단, 교차연습은 개념의 이해가 된 이후에 학습하기를 권유합니다.
분산학습의 비결 3. 복습 간격 분산
분산학습은 학습내용을 쪼개는 것뿐만 아니라 복습 간격을 일정하게 분산하는 것도 유용한 방법입니다. 앞서 살펴본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에 따르면, 학습 후 우리의 학습 내용은 급속도로 망각됩니다. 따라서 학습이 이루어진 후 1번, 하루 후 1번, 일주일 후 1번, 한 달 후 1번씩 간격을 두고 분산하여 복습할 때 학습내용이 장기기억에 저장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분산 복습은 같은 과목이라도 학습 유형에 따라 간격이 다를 수 있습니다. 개념을 배우는 학습에서 Rohrer는 수학과목의 경우 첫 번째 복습은 개념을 처음 배운 2시간 후 개념을 응용한 문제를 풀어보고, 다음날은 심화문제, 일주일 안에 복습 문제를 풀어보는 것을 제안합니다.
최종학습이 끝난 후 시험을 앞둔 상황일 때 장기기억을 위한 적절한 복습 간격에 대하여 연구자들은 최종 학습이 끝난 후 시험일까지 남은 기간의 10~20%의 시간을 제안합니다. 즉 최종 학습이 종료된 후 시험까지 일주일이 남았다면 복습은 16~33시간 간격이 적절합니다. 만약 고2 수학 학습을 종료하고 수능까지 365일이 남았다면 복습은 36일~70여 일 간격이 적절합니다.
나누어 꾸준히 공부하는 분산학습은 뇌의 특성이 반영된 공부법으로 장기기억 형성과 유지에 유용합니다. 공부하는 뇌는 한 방이 아닌 오늘 내디딘 한 발씩이 모여 실력이 쌓입니다. 오늘 내디딘 성실한 한 발들이 모일 때 머지않아 여러분이 원하는 곳에 지금보다 발달한 모습으로 도착해 있을 것입니다.
이어질 내용은 반복학습과 함께 활용할 때 서로 시너지를 내며 공부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학습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