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살이 학원을 마치고 셔틀버스를 타고 올 시간이 되었다. 언제나 늦지는 않지만 미리 나가지도 않는 나는 여느 때처럼 셔틀버스 도착 시간을 딱! 맞춘 시간에 분주한 발걸음으로 서둘러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훅. 나의 하늘색 민소매 원피스의 여리한 시폰 밑단에 그보다 더 가벼운 바람이 들어왔다가 나간다.
아이! 깜짝이야. 이 마른, 가벼운 바람은 뭐지? 이렇게 갑자기 가을이 온다고? 여느 여름보다 높은 습도로 바람마저 무겁고 뜨뜻했던 어제는, 아니 불과 오후의 그 여름날은 갑자기 잠수를 탔다.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이별을 선언한 여름의 단호함에 나는 단번에 여름에 질척거리는 연인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전 연인. 나는 내 정수리 위를 휘갈기던 하오의 강렬한 태양과 온몸에 무겁게 찰싹 들러붙었던 여름의 무거운 공기마저도 이젠 좋았던 기억이 될 지경이다. 그래도 그때가 좋았는데...! 아니다. 그래도 그건 아니다. 별안간 실연을 당하더니 이젠 미화에 앞장선 나를 또다시 돌려세우는 것도 나다. 여름은 이렇게 애증의 계절이었나 보다.
“주윤! 바람이 정말 시원해. 가을이 오나 봐! 그렇지?”
“오! 시원하다!”
“이 말은....! 바로바로! 여름방학이 이젠 끝나간다는 말?”
“에잉?”
세찬 여름의 햇살과 무거운 습도를 땀으로 받아내며 하교하던 주윤이의 손에 달고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건네주던 여름방학의 날이 이제 가득 차올랐다가 지려고 한다. 주윤이의 손을 잡고 집으로 걸어 들어오는 데 우리의 손등을 살랑이는 바람에는 이미 초가을이 묻어있다. 우리의 첫여름방학이 매듭을 지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못내 아쉽다.
가을의 목전에서 우리의 첫여름방학을 떠올려보았다. 여름 방학에 들어서며 나와 주윤이는 계획을 세웠다. 물론 대부분 나의 의지가 많았다. 29권짜리 전집 1질을 다 읽기. 아침에 줄넘기하기. 수영 배우기. 연산 문제집 풀기. 늘 그렇듯 방학의 첫 일주일 아침엔 책 읽기 후 줄넘기를 하고 연산 문제집을 푸는 코스를 수월히 완주했다. 하지만 점점 발은 무거워졌고 마음은 느려졌다. 우리는 나른한 게으름의 여름 아침에 서서히 스며들었고 우리의 여름방학 오전 코스는 자연스레 멀어져 갔다. 선명한 마무리는 학원 등록을 했던 수영뿐이다. 역시 학원 등록은 힘이 세다.
“엄마! 유니트 접어놨지요?”
“응? 아!”
“엄마! 설마 하나도 안 접어둔 건 아니지요?”
“아니, 엄마도 바빴어. 하나는 접었지. 하나는.”
혼자서 씁쓸히, 어쩌면 늘 찬란한 계획과는 다른 마무리를 가져왔던 내 유년시절의 많은 방학들과 데칼코마니를 맞춰보는 사이, 아이가 내준 숙제가 훅 들어왔다. 이것은, 여름내 잊고 있던 가을바람을 만난 만큼이나 나를 흠칫 놀라게 했다. 실은, 학원 가기 전 아이가 신신당부했던, 색종이로 기본 유니트를 접어달라는 부탁을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유니트. 그것은 내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하지만 가끔 계획에 없던 일은 온 계절을 장악하기도 한다. 다면체 종이접기는 빨강, 노랑, 초록, 주황의 색색 색종이로 기본 유니트를 접는 지루한 반복의 과정과 이 유니트를 조립해서 3장, 9장, 24장, 36장, 48장, 그리고 90장 다면체를 조립하며 입체를 만드는 과정에서 머리가 찌릿한 경험을 두 손에 전해주는 종이 접기였다. 이 색색의 유니트들은 지루하고 찌릿하게, 그리고 잦은 패배감과 짧지만 달콤한 성취감이라는 요망한 다채로움으로 내 여덟 살의 여름의 모든 시간과 열 손가락을 장악했다.
“엄마, 다면체 종이접기 책 사주세요!”
갑자기 종이접기 책을 보고 종이접기를 하던 여덟 살은 책 뒷면에 광고된 다면체 종이접기 책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직은 이른 것 같아서 사두어도 보지 않을 것 같다는, 순전히 엄마의 판단에 응, 곧 살 거야. 곧 올 거야. 하며 몇 주간 구입을 미뤘다. 하지만 여름방학이라는 너그러운 시간 앞에 아이의 손에 적당할 크기인 1/4색 종이와 함께 결재를 했다.
여덟 살 여름방학의 하루는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테이블에 앉아서 기본 유니트를 접고, 책을 보며 조립을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밥 먹고 학원 갈 때를 제외하곤 온 시간 열 손가락엔 색종이가 들려있었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글쎄. 모르겠는데.”
다면체 접기에 관심도 기대도 없던 나는 아이의 물음에 늘 모르겠는 데로 일관했다. 내 마음엔 그 시간에 연산을 좀 풀었으면 좋겠고, 책을 좀 읽었으면 했다. 하지만 아이는 이미 다면체 종이 접기의 세계에 온 열 손가락을 다 채워가고 있었다. 이때 나오는 우리 집 여덟 살의 주특기. 엄마의 말은 이제 들리지 않는다. 이미 네 살 때, 유치원 선생님께서도 인정하셨다.
“절반은 못 듣고, 절반은 들어도 못 들은 척하는 것 같아요.”
주윤이가 다섯 살 때쯤 장난스레 호들갑을 떨며 물어본 적도 있다.
“주윤아, 정말 안 들려? 진짜 안 들리면 병원에 가야지.”
“아. 엄마, 좀 귀찮아서요.”
이미 간섭받고 싶지 않은 너의 세계와 시간을 만나버린 것을 나라고 어찌하겠나. 그냥 언제까지 하나 보자. 하고 지켜보는 수밖에.
엄마의 무관심에 여덟 살은 비빌 언덕이 없었다. 혼자 유니트를 접고 조립을 해나갔다.
“엄마! 성공! 12장 유니트 조립 성공했어요!”
“응? 12장? 정말?”
12장 유니트 접기가 무슨 말인지도 모르던 나는, 설거지를 하다가 잠깐 고개를 돌려 예의상 관심이 있음의 제스처를 취했다. 눈앞에 색색의 입체가 불쑥 가까이 와 있었다.
“엄마, 이건 12장인데, 3색 산이 8개가 있어요. 삼원색으로 빨강, 노랑, 파랑으로 만들었는데 멋지지요?”
그런데, 어머나! 아이가 눈앞에 보여준 입체는 예상보다 훨씬 근사했다.
“우와! 대단하다. 이걸 직접 만든 거야? 진짜 대단하다.”
“네! 이제 18장 만들 거예요.”
나는 설거지를 끝내고 아이가 유니트를 접는 거실의 테이블로 갔다. 아이의 12장 다면체에 관심이 생긴 나는 자연스레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서 기본 유니트를 접기 시작했다. 그때부터가 문제였다.
“엄마! 이번에는 초록, 연두거든요. 엄마가 초록 접어요. 제가 연두 접을게요.”
몰랐다. 이때부터 나에게 유니트 접기 숙제가 생길 줄은! 그리고 아이도 몰랐을 것이다. 엄마가 그렇게 말을 안 들을 줄은.
그렇게 온 여름 동안 아이의 작은 방, 그리고 거실 테이블에는 기본 유니트들과 형형색색의 색종이, 그리고 여덟 살의 꼬물거리는 10손가락, 그리고 찌릿한 시도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새로운 시도들은 언제나 삐그덕거림과 함께 오곤 했다.
18장, 36장은 수월하게 성공했던 아이는 48장 다면체 종이 접기에서 큰 좌절을 자주 경험했다. 며칠을 내내 48장 유니트를 손에 쥐고 입체를 만들었다가 실패해서 다시 해체하고, 다시 시도했다. 그럴 때마다 세상의 모든 패배감은 모두 아이에게 달려들었다.
“내가 왜 다면체 종이접기를 시작했을까요! 이 나쁜 다면체 종이접기!”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끌어낸 후회의 말에 나는 내심 이런 생각도 할 줄 알아! 하고 놀라면서도 귀엽기도 했다. 그럴 때는
“다시 하면 되지! 지금까지 몇 번이나 시도하고 노력해서 성공했잖아. 시도 안 했으면 36장을 성공했겠어?”
“있잖아. 전문가는 그 세계에서 모든 실패를 다 해본 사람이래. 그래야 전문가가 되는 거래. 지금 주윤이가 그런 거야.”
하고 격려했다.
하지만 여덟 살의 짜증이 잦아지면 나에게도 짜증이 물들었다.
“엄마! 이게 가능해요? 불가능한 거 아니에요?”
“아니, 다시 해야 해요. 틀렸어요. 이 모양이 아니에요!”
“엄마, 내가 왜 이렇게 했을까요.”
“아! 다시 해야 하다니! 이건 불공평해요.”
도대체 뭐가 불공평한 건지 모르겠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는 화를 냈고, 불평을 했고, 책을 탓했고, 자신을 탓했고, 울부짖었다. 주윤이의 좌절감이 진해질수록 다 받아낼 수 없던 나는 맞불을 놓기도 했다.
“하지 마. 하지 마. 그만해. 이렇게 불평하면 주윤이에게도 안 좋아. 하지 마. 그만해.”
그러면 또 여덟 살은 주섬주섬 종이를 모아다가 다시 시작하곤 했다. 그때 여덟 살에게 이 패배를 뒤집을 수 있는 것은 책과 자신의 손뿐이었다. 그렇게 여덟 살은 다시 작은 손에 주윤이 마음도 모르고 색색으로 빛나는 작은 색종이를 다시 쥐었다.
“엄마! 완성했어요! 48장 유니트예요! 이젠 90장을 도전할 거예요!”
48장을 도전했을 때의 그 어려움을 잊을 걸까. 호기롭게 90장에 도전한 여덟 살은 며칠을 90장 다면체 종이 접기에 매달렸다. 역시나 몇 번이고 화를 냈고, 자신을 탓했고, 책을 탓했고, 불가능하다 말했고, 불평했다. 그러다 화를 삭이지 못하고 울기도 했다. 90장은 난도가 높은 탓에 그 실패가 잦았고 이틀이 지나도 같은 곳에서 계속 틀렸다. 여덟 살은 아무리 해도 안된다는 무력감이 찾아온 듯했다. 그렇게 여덟 살은 유니트를 테이블에 방치하고 잠이 들었다.
아이가 실패한 유니트를 본 아침, 나는 90장 유니트 조립을 시작했다. 처음엔 책을 보고 시작했는데 48장을 끼운 이후는 설명이 없었다. 설명대로만 따라 하던 나는 49장째부터 어디에 유니트를 꽂아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다시 유니트를 해체했다. 그리곤 다시 시작했다. 따라 하지 않고, 이해하면서 해보자. 어떤 원리로 꽂아야 하는지를 파악하며 해보는 것으로 생각을 고쳤다. 그리곤 반신반의하며 시도했고 성공했다.
“엄마 90장 성공했어!”
“우와! 나도 해볼래요!”
90장 유니트가 성공한 것을 눈으로 본 아이는 드디어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엔 내가 옆에서 설명을 해주었다. 5 각형 옆에는 6 각형이 5개 모여야 한다는 것, 그리고 6 각형 옆에는 5 각형과 6 각형이 번갈아 들어온다는 것. 나는 내가 이해한 것을 주윤이에게 말해주었고, 주윤이도 받아들였다. 그렇게 내 도움으로 90장을 성공했다.
하지만 여덟 살은 알았을 것이다. 내 열 손가락으로 해본 것만이 내 것이 된다는 것을. 그리고 내 것을 갖기 위해서는 실패의 과정들까지 내 손가락의 지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혼자서 성공했던 12장, 36장, 48장은 다시 풀어서 해도 금방 해냈지만, 다시 시작해본 90장은 그렇지 않았다. 여덟 살은 다시 90장을 혼자서 시작했다. 나는 지켜보았다. 내가 스스로 해야 비로소 그것이 내 것이 된다고 나는 믿는다.
며칠을 끙끙거리던 주윤이는 기어이 90장을 해냈다. 그리곤 다시 말한다.
“엄마! 이제 뒷면이 보이는 입체를 만들 거예요! 이건 유니트를 다르게 접어요!”
여덟 살은 90장을 성공한 만족감이 크고 무거워서 그 자리에 주저앉지 않았다. 징검다리에 한 발을 놓을 때 온 주의를 한 다리에 놓으며 긴장하지만, 여덟 살은 그 징검다리에 멈추지 않는다. 가볍게 또 다음 발에 주의를 기울여 다음 징검다리로 사뿐히 건너간다. 여덟 살에게 도전은 그렇게 재미난 놀이가 된다. 여덟 살에게 과정은 어렵고 지난했지만 성공은 가벼웠다. 그 가벼운 성공의 바람은 또다시 새로운 도전의 장면으로 여덟 살을 데려갔다. 난 그 모습이 참 멋있었다.
가을바람이 분다. 그 가벼운 바람은 40번의 계절 동안 내가 맞아왔겠지만 올해의 가을바람은 나에게도 처음이다. 가을은 그 자체가 개연성이어서 가을바람을 핑계 삼아 나는 자연스레 피노누아를, 산책을, 야외 테라스를 떠올린다. 가을을 누리는 데에 익숙한 것들을 해내는 과정에서 올 가을에도 예상치 못한 새로운 경험들이 불쑥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러면 나는 또 이 가을을 누리는 기술 한 가지를 얻게 된다.
나의 여덟 살의 여름에는 책 읽기, 수영, 연산의 기술에 예상치 못한 다면체 종이 접기가 불쑥 들어와 한 자리를 크게, 그리고 오롯이 차지했었다. 12장에서 90장까지, 그리고 뒷면이 보이는 입체로 이어지는 과정은 그 한 계단은 힘겨웠지만 계단과 계단 사이를 오르는 걸음은 가벼웠다. 나의 여덟 살은 그렇게 또 도전하고 좌절하고 불평하고 화를 내며 여름내 여물어갔다.
나의 여덟 살의 가을에는 어떤 놀이가 찾아올까. 어떤 놀이에 오롯이 익숙해지는 시간들을 겪어나갈까. 나의 여덟살이 제 손으로 엮어갈 경험이 무엇인지 궁금해지는, 그런 여름과 가을 사이의 설레고 어색한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