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터운 창에는 시린 회색의 바람이 붙어있다. 짧아진 햇살은 힘도 약해져서 이미 어둠과 추위에 자리를 내어준 지 오래이다. 집 밖도, 이불 밖도 위험한 계절. 겨울이다. 그것도 겨울의 한가운데, 12월. 하루하루마다 시간이 이렇게 빠르다고? 하며 화들짝 놀라는 새삼스러운 달이다.
오늘, 한 겨울을 뜨듯하게 데워 줄 저녁 식사는 청국장과 김장김치. 김장김치는 그냥 김치와는 질적으로 다른 요리이다. 우리 엄마들은 세상 좋은 재료만을 고르고, 다듬어낸 후 40여 년의 숙련된 손끝으로 지어낸 빨간 양념을 배추 한 잎 한 잎에 곱게 발라낸다. 배추 한 장 한 장의 손길에는 정성뿐만 아니라 40여 년의 전문성도 배어있다. 아무나 만들 수 있고, 아무나 이 맛을 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안다. 겨우 받아먹는 나는 그나마 이 정성과 전문성에 예우를 다하고자 아끼는 접시에 가지런히 김장 김치를 담았다. 위에 깨도 솔솔 뿌려주니 화려함과 고소함이 흘러넘친다. 고마운 빨간 한 접시에는 우리네 엄마들이 품고 있는 가족에 대한 돌봄과 책임, 40여 년의 시간이 만들어준 손끝의 감각, 그리고 자부심이 담겨있다. 그 덕에, 그저 딸이라는 특권을 가진 나는 하이얀 흰 밥에 아직 대가 생생한 빨간 배추 한 잎 크게 얹어 먹는 호사를 누린다.
주윤이도 김장김치의 맛을 경험했으면 싶어서 작은 배추 잎을 골라 세로로 잘라 두었다. 김장김치란 자고로 대부터 이파리까지 한 입에 먹어야 하느니라. 주윤이 밥 숟가락에 흰 밥을 올려 노오란 청국장 국물을 적시고, 무 하나 두부 하나 올린 후 길게 자른 김장김치 한 가닥을 올려 주었다. 오~! 성공! 주윤이 입 안으로 들어가 오물오물 씹는 모습을 본다. 이 모습은 봐도 봐도 볼 때마다 늘 새롭게 뿌듯하다. 주윤이가 씹는 모습을 보면 내 마음이 부르다.
“주윤아, 할머니 덕분에 우리가 귀한 김장김치도 먹고 호강한다, 그치?”
“맞아요. 할머니도 요리 잘하잖아요. 왕 할머니도 그렇구요.”
“맞아. 오늘도 주윤이 왕할머니께서 추석에 만들어주신 송편 간식으로 먹었잖아.”
“왕할머니는 할머니여도 잘하는 게 있다니까!”
“맞아, 주윤아. 그런 거 같아. 사람들은 다 재능이 한 가지씩 있어. 그치? 우리가 그 덕을 보잖아. 물론 우리가 가진 재능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고.”
“맞아요.”
“아! 그럼 우리 주윤이는 어떤 재능이 있을까?”
나의 물음에 주윤이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릴 적부터 스스로가 잘하는 것을 물어보면 늘 대답을 피하던 주윤이었다. 영어를 잘한다는 주변의 칭찬에도 “제가 외국인만큼 잘하는 것도 아니잖아요.”하고 말하던 주윤이었다. 영어에 있어서는 투머치 토커이다 보니 자연스레 스피킹에 대해 감탄을 자주 듣던 주윤이는 이제야 그 칭찬을 스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래서 나도 그 칭찬에 손을 얹어보았다.
“주윤이도 영어를 잘하잖아. 방과 후 시간에 영어로 말 많이 하지? 그거 좋은 거야. 아마 유진 티쳐는 활발하게 반응해주는 주윤이가 있어서 수업에 활기가 느껴질걸? 생각해봐. 선생님이 수업을 하시는데 다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있으면 수업이 재미가 없겠잖아. 그치? 그리고 친구들도 주윤이가 말을 하면 나도 해볼까 하고 한 마디라도 더 하면서 참여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그게 아마 주윤이의 재능이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거 아닐까?”
“흠, 그렇긴 한데. 엄마, 어떤 친구는 방과 후 영어 시간에 저에게 시끄럽다고 해요.”
“응?”
엄마라는 사람에게 걱정은 직업병과 같다. 톡 하고 가벼운 자극만 있어도 무의식적으로 툭 튀어나오는 게 엄마의 걱정인데, 특히나 학교, 친구, 내가 보지 못했던 상황이라는 3박자가 맞는 순간 이건 엄마의 온 하루를 지배하는 중대사건이 된다. 매일 하굣길마다 “오늘은 어땠어?” 하고 물으며 인터뷰어가 되는 엄마의 질문에 늘 “굿”하고 대답하고 마는 주윤이었다. 늘 실패로 끝난 나의 인터뷰는 갑자기 특종을 물어버렸다. 밥 먹는 속도는 줄었고, 엄마의 심층취재는 일단 사실 관계 파악을 첫 방향으로 잡았다.
“응? 주윤이에게 시끄럽다고 그래?”
“네, 그 친구는 제 옆에 앉거든요. 영어 방과 후 시간에 제가 말하면 친구가 옆에서 시끄럽다고 말해요.”
“주윤이는 말하면 안 되는 상황에서 말해?”
“아니요, 선생님이 물어보면 말하거나 질문하는 거예요.”
“아, 그래? 그러면 주윤이 생각에 주윤이 목소리가 너무 커?”
“엄마, 지난번에 방과 후 수업 보러 왔잖아요. 그때도 저 질문했잖아요. 그 정도예요.”
“음, 그러면 그 친구는 몇 번 정도 주윤이에게 그런 말 했어?”
“방과 후 시간마다 말해요.”
“그러면 유진 티쳐는 뭐라고 해?”
“유진 티쳐 안 들리게 말해요. 저는 옆에 있으니까 들리지요.”
“아, 그래.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친구들도 주윤이에게 그렇게 말해?”
“아니요, 다른 친구들은 안 그래요.”
사실관계 확인은 여기까지였다. 진심의 한 마디였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신경 쓰지 말라고 하기에 이미 주윤이는 신경이 꽤나 쓰이는 눈치이다. 내 아들 이야기만 듣고 그 친구를 나쁘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물론 내 아이에게 부정적인 말을 한 아이에 대해 뭐지? 하는 생각이 불쑥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관계는 또 언제 어느 시점에 달라질지 모르는 데 내가 알지도 못하는 그 친구를 제멋대로 판단하는 것은 선을 넘는 일이 맞다. 사실, 나는 그 문제에서 제 3자이다. 더욱이 나는 너무나 내 아이 편이어서 내 조언은 때론 아이에게 도움이 안 될지 모른다.
나는 가열차게 사실관계를 확인하리라 하고 온갖 질문을 쏟아내 놓고, 이후 인터뷰의 2막의 방향을 어디로 잡아야 할지 몰라 표류하는 불안한 선장이었다. 어떻게 하지?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까. 불안한 내 마음에 드디어 주윤이의 마음이 딱 부닥쳤다.
“엄마 그래서 걱정이 있어요.”
“응? 뭔데?”
“다음 주에 유진 티쳐가 우리가 수업을 잘하면, 보너스로 남자끼리 여자끼리 짝꿍을 하게 해 준다고 했거든요. 근데 그 친구랑 짝이 될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아, 그래? 아! 맞다! 주윤이 옆 반에 지웅이 있지? 지웅이가 불편해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방과 후 수업 때 같은 반이었데. 방과 후 선생님께서 지웅이를 그 친구와 같은 모둠에 앉히려고 하니까 지웅이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
“어떻게요?”
“손을 번쩍 들어서, 선생님! 자리 바꿔주세요. 했대. 그랬더니 바꿔주셨데.”
“네에?”
“지웅이 용기 있지? 주윤이도 그렇게 해봐. 혹시 그런 일이 생기면.”
불쑥 생각난 옆반 아이 일화에 급한 불은 겨우 껐다. 하지만 이건 친구의 부정적 피드백에 대해 주윤이가 가진 불편감을 누그러뜨리는 데에는 한참 못 미치는 사례일 뿐이다. 아마 친구의 부정적인 피드백을 들을 때마다 주윤이는 ‘내가 잘 못 하는 사람인가.’하며 자신을 의심하는 마음이 생겼을 것이다. 주윤이에게는 그런 상황을 끊는 것이 필요했다.
“주윤아, 엄마는 있지. 친구가 잘하는 면이 있으면 감탄하고 응원해주고 친구가 부족한 면이 있으면 굳이 못한다고 말하지 않고 어느 정도는 모른 척해주는 친구가 좋은 친구라고 생각해. 친구가 잘하는 면에 부정적인 피드백을 해주는 친구는 굳이 가까이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거든. 모든 친구랑 다 친할 수는 없어. 어떤 친구의 말이 주윤이에게 스트레스가 된다면 그 친구는 좀 거리를 둬도 된다고 생각해.
생각해봐. 주윤이 유치원 때도 이렇게 했잖아. 그때 유진이랑 윤성이는 집에 가서 엄마에게 주윤이 영어 진짜 잘한다고 칭찬했데. 그리고 선재랑 수아도 주윤이가 골든벨 울린 날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엄마! 우리 반은 주윤이가 1등 했어! 하고 칭찬했데.”
“진짜요?”
“응~그럼. 그리고 주윤이도 그랬잖아. 솔직히 주윤이 줄넘기 못하잖아. 윤성이는 한 번에 100개씩 완전 잘하구. 그때 주윤이도 엄마 윤성이는 줄넘기 진짜 잘해요! 하고 엄마에게 자랑했잖아. 그때 주윤이가 엄마 윤성이는 줄넘기 소리 시끄러워요. 안 했잖아. 그치?
그리고 윤성이도 한 번도 주윤이에게 너 줄넘기 진짜 못한다 그런 말 안 했잖아.”
“네.”
“엄마는 그런 친구들이 좋은 친구라고 생각해. 서로의 장점에 감탄하고 응원해주는 친구들. 그게 아닌, 친구의 장점을 보고 부정적으로 말하는 친구는, 글쎄 엄마는 잘 모르겠어. 주윤이는 어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안 좋아요.”
“그래, 그거야. 주윤아. 사람을 때리는 게 나쁜 행동이지? 다른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는 말도 나쁜 행동이야. 그럴 땐 말해”
“뭐라고 말해요?”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나 기분 나빠. 하지 마. 하고 말해야지. 친구 눈을 똑바로 보고, 단호하게.
우리 사람들은 말하지 않으면 몰라. 아마 친구도 주윤이가 지금까지 기분 나빴다는 걸 몰랐을 수 있어. 모르고도 그러거든. 그러니까 분명히 말해줘.
기분 나쁘니까 하지 말라고.”
“아! 모를 수도 있어요?”
“그럼, 말 안 하면 몰라.”
얼마 전, 손흥민 선수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2022년 월드컵에서 브라질과의 경기 후, 4-1로 패한 직후 이루어진 인터뷰였다. 기자는 이전 포르투갈 경기에 비해 선수들의 경기력이 떨어진 원인을 물었다. 이에 손흥민 선수는 경기 직후에 가쁜 숨을 몰아쉬던 것을 멈추고, 기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분명히 답했다.
“아니다. 우리는 모든 걸 바쳤다. 그런 식으로 우리를 비난하지 말아 달라. 나는 우리 팀 선수들이 자랑스럽다. 우리 선수들은 모든 걸 쏟아부었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나는 이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건강한 공격성을 보았다. 공격성은 남을 해치는 무력과 폭력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공격성은 진화론적으로 맹수뿐만 아니라 나의 생존을 위협하는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적인 요인이기도 했다. 비단 물리적 위협뿐만 아니라 나를 향한 무례한 말과 행동, 그리고 부당한 상황에서 ‘그건 아닌 거 같아.’ ‘하지 마’하고 단호하게 대처할 수 있는 건강한 공격성은 나의 생존과 안녕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리고 대게는 이렇게 대처하지 않으면, 상대는 영원히 나의 불편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것을 이미 아는 사람은 무례한 말과 행동을 애초에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주윤아, 할 수 있겠어?”
“엄마, 1학기 때 재윤이에게 했던 것처럼요?”
“그래, 그때 재윤이도 장난으로 주윤이 머리 때린 거 재윤이는 몰랐잖아. 주윤이가 싫어하는 줄. 근데 말하니까 재윤이가 사과했잖아. 그치?”
“맞아요.”
“그리고, 지금 재윤이가 주윤이의 진짜 친한 친구가 되었잖아. 지난주에 재윤이가 주윤이에게 멀리서도 인사하는 거 보는데 엄마도 기분이 좋더라.”
“맞아요. 재윤이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요.”
“그래, 이번에도 친구에게 말해. 그래서 친구가 알게 되면 재윤이처럼 더 친해질 수도 있고, 또 아닐 수도 있고 그래. 그건 1학년 남은 기간 동안의 일이 되겠지. 사람 일은 모른다.”
어떻게 될지는 제 3자인 나도 모른다. 주윤이가 학교에 가서 같은 상황에서 나의 조언을 기억하고 말할지 참을지 역시 나는 모른다. 결국 선택과 행동은 주윤이의 몫이다. 다만, 주윤이가 건강한 사람이어서 건강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지켰으면 하고 바란다. 그저 나는, 다가오는 겨울방학 때 주윤이를 위해 어떤 운동으로 건강한 체력과 신체적 자신감을 길려볼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해볼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