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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Mar 23. 2023

발달_오늘도 나를 잘 키웁니다

발달

  인생을 100살까지 산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언제까지 클까요? 사실 이미 다 컸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어요. 실제 커간다는 말에 가장 적합한 키와 체격은 지금 거의 다 완성된 것으로 보이니까요. 그렇다 보니 ‘큰다’라는 말은 어쩌면 발달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제한하는 단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문득 20살이 성인이라면 인생의 4/5를 성인으로 살아가는건데 다 컸다고 하면 서운하기까지 합니다. 새로움이 갖는 가치를 알잖아요. 커가는건 새로워지는건데 어른들을 다 컸다고 하면 서운할 수 밖에요. 어른들도 하루마다 더 잘 크고 새롭고 싶은데 말이죠.



  그렇다면 ‘발달’이 뭘까요? ‘발달’이라고 하면 어떤 단어가 떠오르시나요? 사실 이런 질문은 좋은 질문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평소에 저는 구체화된 질문이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이렇게 막연히 ‘00은 뭐라고 생각해?’ 이건 상황에 따라 질문받는 사람을 당황시키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질문을 하는 건, 추상적인 개념에 대한 내 주관적 생각은 생각보다 힘이 세기 때문이에요. 행복, 용기, 사랑과 같이 추상적인 개념에 대해 우리는 나름의 정의를 가지고 살아가요. 이를 이론적 용어로 암묵적 이론(implicit theory)이라고 해요. 행복에 대한 암묵적 이론, 용기에 대한 암묵적 이론, 창의성에 대한 암묵적 이론으로 말할 수 있죠. 이 암묵적 이론은 내가 살아온 사회문화적 배경, 나의 주관적 경험, 학습에 나의 주관적 판단들이 서로 모여 화학작용을 일으켜 형성됩니다. 이런 암묵적 이론을 파악하는 게 중요한 이유는, 이들은 내 행동과 동기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인이거든요.



  행복을 예로 들어볼까요. 여러분은 ‘행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어떤 사람은 행복을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 사람은 행복을 위해 더 많이 일하거나 재테크, 절약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쏟을 거예요. 그리고 내가 생각한 만큼의 돈이 있느냐 없느냐가 내가 행복한지 아닌지의 판단 기준이 되겠죠. ‘좋아하는 사람과 밥 한 끼 함께 먹는 것’을 행복이라 여기는 사람은 행복을 외향성과 관계성에 기준을 두고 판단합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저녁이나 주말에 좋아하는 사람과 식사 약속을 잡고 서로 대화하며 에너지와 행복을 느낄 거예요. 그렇게 또 좋은 사람과 약속을 잡겠죠.



  지금 여기 30명이 있다면 30명마다 생각하는 행복은 다 다를 거예요. 그리고 그게 맞아요.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겪어온 삶의 경험과 물려받은 유전적 요인,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고 해석해 온 인지구조도 다 다르니까요. 그래서 우리의 삶은 모두 일정하게 진행되는 과정이지만 그 삶을 세세히 살펴보면 세부적으로 다 달라집니다. 우리에게 나 눈코입이 있지만 그 생김은 모두 다르듯 말이죠.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혹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나라는 사람과 삶이 달라지게 마련이잖아요.



  '발달'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대한 애매한 질문의 의도가 여기 있었어요. 내가 어떤 암묵적 이론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내가 나를 키워가고, 그 과정에서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질 수 있어요. 이때 내가 가진 암묵적 이론의 해상도를 좀 더 높여보면 어떨까요? 우리가 어떤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 사람과 대화를 해보면 '아, 이 사람이 이런 면이 있는 사람이었구나!'하고 그 사람에 대한 해상도가 높아지잖아요. 그제야 그 사람을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죠. 발달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요. 발달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정보들이 더해지면 우리가 형성하는 발달에 대한 암묵적 지식이 좀 더 정교화되고, 어쩌면 우리가 스스로를 더 섬세하게 발달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발달’은 수태의 순간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비교적 영속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발전이 못한 상태에서 나은 상태로 변화하는 과정이라면, 발달은 어느 수준에 이른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어린이가 어른에 비해 미숙한 것이 아닌, 어린이의 발달은 그 상태에서 그 자체로 어느 수준에 이르렀다는 의미입니다. 이 발달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신장과 체격이 증가하는 상승적 변화가 있죠. 뿐만 아니라 요즈음에는 발달을 전생애적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띠라서 뇌 세포의 감소, 기억력 감퇴, 노화와 같은 하강적 변화도 발달로 봅니다. 그렇다면 모든 변화를 발달이라고 볼까요? 그렇지는 않아요. 일시적인 변화는 발달이라 부르기보다는 변화라고 봅니다. 발달에는 영속성이 필요해요. 이 상승적 변화와 하강적 변화는 모두 비교적 영속적일 때, 즉 이 변화가 꾸준히 진행될 때 발달이라고 할 수 있어요.



  발달의 세부적인 영역을 살펴보면 좀 더 이해가 되실 거예요. 발달에는 성장, 성숙, 그치고 학습의 세 영역이 있습니다. 먼저 ‘성장(grow)'은 세포의 양적 성장을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발달인키가 크고, 골격이 자라나는 신체적 성장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두 번째 ‘성숙(mature)’은 생물학적 시간표에 의해 미성숙한 세포가 완전한 상태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에겐 2차 성징을 예로 들 수 있어요. 2차 성징을 통해 남성과 여성은 비로소 각각의 고유한 특성을 갖게 되며 남성과 여성으로서 완전한 상태에 이르죠. 마지막으로는 ‘학습(learning)’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배우고 익히느냐에 따라 나의 인지와 정서가 발달합니다. 학습을 통해 논리적 사고와 공감의 정도가 이전 단계와 질적으로 달라지게 되죠.



  성장과 성숙이 유전과 진화의 영역이라면 학습은 보다 후천적이고 환경적인 영향에 의한 발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발달의 특징이 엿보이죠. 발달은 유전과 환경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한때는 발달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궁금해했지만 최근에는 신체 및 인지기능에는 유전이, 성격과 같은 정서적 발달에는 환경이 더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연구 결과들이 발표되고 있어요. 대표적으로 생김새와 체격은 부모님을 닮아 대체로 키가 큰 부모님의 자녀는 키가 큰 경우가 많죠. 반면에 성격의 경우에는 어떤 사람과 어떤 환경에서 관계를 맺었는지에 따라 달라지곤 합니다. 실제 어릴 적 다른 가정에 입양된 일란성쌍둥이의 경우 생김새와 인지기능은 비슷했지만, 성격은 많이 달랐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한 친구는 학창 시절 입양한 부모님과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놀림을 많이 받던 환경에서 자랐고, 한 친구는 그런 경험이 적었다고 해요. 각자 다른 환경이 일란성쌍둥이의 성격을 다르게 발달시킨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환경에 따라 변화 가능하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는 나를 잘 발달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꽉 쥐고 있다는 낙관을 갖게 합니다. 브론펜브레너(Bronfenbrenner)는 생태학적 체계이론을 통해 한 인간의 발달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요인으로 가족, 친구, 교사등을 제시했어요. 부모님과 친구, 선생님은 나의 발달에 중요한 환경이 되어주는 거죠. 기아타이거즈 팬인 부모님의 손을 잡고 야구장에 가서 빨간색 티셔츠와 응원봉을 힘차게 흔들며 응원한 여덟 살 아이는 커서 기아타이거즈 티셔츠를 입고 다시 야구장에 갑니다. 친구가 보여준 세계는 또 얼마나 재미있던가요. 학창 시절 친구의 글씨체를 따라 해보기도 하고, 좋아하는 음악을 함께 듣고, 같이 공을 차면서 나눈 정서는 여전히 그곳에 남아있기도 하고 동시에 지금의 내가 가진 정서 지층의 한 부분에 고유의 색으로 남아있죠. 한 사람은 그 주변 다섯 사람의 합이다라는 말이 있어요. 한 사람을 이해하고 싶으면 그 주변 다섯 사람을 관찰해 보면 된다는 의미로, 우리는 그만큼 우리가 관계 맺는 사람과 함께 대화하고, 술잔을 기울이고, 농담을 하며 서로의 유머와 말투, 생각을 닮아간다는 거죠. 그렇게 스스로를 발달시켜나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에겐 하나의 의무가 생기죠. 내 주변을 좋은 사람들로 채울 것. 내 이야기에 공감을 해주는 사람, 같은 상황을 보더라도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까닭에 내가 볼 수 없는 세상 쪽으로 내 발의 각도를 틀어줄 사람, 내가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임을 매 순간 일깨워주는 사람, 내가 꽤 쓸모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는 사람, 나를 무조건 지지해 주는 사람, 나의 실수를 알고 있음에 내 행동을 조심하게 해주는 사람,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잡이가 되어주는 사람, 도움이 필요할 때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 내 삶의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어줄 의무가 있어요. 그래서 내가 잘 자랄 수밖에, 아니 잘 못 자라기가 어려운 환경을 구축해 주는 거죠. 나를 위해서.



  동시에 나는 누군가의 환경이기도 합니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좋은 토양이 되어줄 수 있겠죠.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미안해', '고마워'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좋아하는 친구에게 '너랑 농담하며 노는 게 나는 참 좋아.'하고 표현할 수 있어야겠죠. '언제나 내가 남편! 하고 부를 수 있고, 그때마다 대답해 준다는 그 사실에 감사해.(오늘 아침도 커피 부탁해!)'하고 수줍게 메시지를 남기는 사람이 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어요. 내게 소중한 사람의 말을 귀와 마음을 기울여 들어주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공감과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흙 속을 꿈틀꿈틀 부드럽게 움직이며 산소와 양분을 만들어내는 지렁이가 떠오릅니다. 내 움직임으로 내 삶의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요. 내 삶을 비옥하게 만드는 하루도 멋진데, 그런 하루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토양에도 양분을 주는 일이잖아요. 나도 누군가의 환경이니까요. 내가 누군가의 근사한 환경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니 갑자기 마음이 우렁차지는 기분이 듭니다. 벌써 이렇게 김칫국을 마시는 걸 보니 느껴집니다. 아. 말이 길어졌구나.



  이제야 저는 제가 생각하는 발달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에게 발달은 명랑하고 좋은 사람으로 제 삶의 토양을 비옥하게 일구어낸 변화로 말하고 싶어요. 유전적인 발달의 강약점을 나만의 고유한 것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도 그 안에서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탁월하게 발달시켜 나갈 거예요. 그 과정에서 나에게 좋은 음식을 먹여주고, 충분한 잠을 재워주고, 열심히 일하게 하고, 편안히 쉬게 해 줄 거예요. 그리고 내 주변에 좋은 사람들과 즐겁게 만나 맛있는 커피과 와인을 나눠마시며 시시한 농담만 가득한 대화도 자주 할 겁니다. 그 농담의 사이사이에 서로에게 의미 있던 사건들을 나누며 그들의 삶의 태도를 배워볼 거예요. 그렇게 하루씩 나를 좀 더 좋은 곳으로 데려다 놓을 거예요. 아! 그 과정에서 커피, 와인, 글, 그리고 사랑은 덤으로 야무지게 챙겨야겠어요. 좀 더 수월해질 게 분명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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