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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Jun 15. 2023

삶의 본캐는 위기의 연속

에릭슨(Erikson)

  인생은 챌린지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가끔 들어요. 고등학교 졸업하면 좀 편안해질까 했는데, 대학에 갔더니 '이제 나는 뭘 그래도 좀 잘하나,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사춘기 때나 했을 법한 질문들이 뒤늦게 나를 덮치더군요. 결국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살면 좋을까였죠. 이게 고민이 되는 이유는 하나였어요. 잘 살고 싶으니까요. 나에게 세팅된 고유성을 살려서 나를 실현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었거든요. 갓생이라고 하나요. 내가 하는 일의 모양이 나라는 사람의 모양과 잘 맞길 원했어요. 저의 업과 나의 관계는 너무 꽉 끼지도 않고 너무 헐렁하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서로 유연하게 상호작용하는 모습이었으면 했거든요.



  그뿐인가요. 연애도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친구 같은 연인을 원하는지, 어떤 외모나 성격에 끌리는지, 어떤 사람이랑 내가 좀 대화가 되는지도 잘 모르겠더라구요. 책이나 영화에서는 운명 같은 사랑이 그렇게도 불쑥 삶으로 뛰어들더니, 내 삶은 쓸데없이 잠잠하고 평온하기만 하던걸요.  사실 사랑이 아직은 뭔지도 모르겠더라구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어떤 사랑을 원하는지를 모르는거였어요.



  취업을 하고 직장생활을 하는데, 처음엔 착했어요. '네! 네!'하고 방긋방긋 웃었죠. 싹싹함으로 적응은 했는데 언제나 의문이 들었죠. '나는 이 일과 잘 맞나? 나대로 살고 있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결심하면서도 하나의 질문은 언제나 마음속에 있었죠. '잘하는 건가? 이 사람이 나에게 맞는 사람인가?'



  사람들과 함께일땐 내가 흐릿해요. ‘괜찮아.’, ‘그냥.’, ‘난 아무거나!’이렇게 주변에 나를 맞추죠. 관계의 유지를 위해서. 사실 좋은 사람과 있으면 당연해요. 난 널 만나 시시한 농담을 하고 싶은게 중요하지 아메리카노를 먹을지 라떼를 먹을지는 덜 중요하거든요. 심지어 네가 주문을 잘 못해서 내 라떼를 아메리카노로 바꿔와도 괜찮아요.



  하지만, 삶의 결정은 혼자 해야하죠. 결국은 내 책임의 삶이니까요. 그럴땐 혼자여야해요. 나를 샅샅히 살피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요. 나에게 계속 질문을 해야하거든요. 자주 그 답은 지지부진해서 나를 실망시키지만 그렇게 나에게 질문할 때 나는 선명해질 수 있어요.



  언제나, 그리고 지금까지도 제 삶의 질문은 하나였어요.

  '나는 누구인가?'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나대로 살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로 불안할때마다 매번 스스로가 미숙하게 느껴졌어요. 청소년기, 성인 초기, 그리고 이젠 성인 중기에 이르렀는데 나는 어떻게 매 순간 이렇게 불안하고 확신이 없는지. 나는 어쩌자고 아직도 나에 대해 이렇게 모르는지. 청소년기부터 가졌던 질문에 답을 구하지 못하고 여전히 같은 질문을 담고 살고 있는 나에 대한 우유부단함에 적잖이 실망도 했죠. 남들은 다 뚜렷한 자기 주관을 가지고 살고 있는데 왜 난 매 순간 뿌리도 없이 흔들리고만 있는지.



  이때 다정한 에릭슨(Erickson)을 만났어요. 흔들리는 저의 모습을 안다는 듯, 그리고 그런 게 당연하다 말해주는 학자였어요. 본인도 일생에 거쳐 '나는 누구인가'하는 자아정체감(ego identity)을 고민해 왔다고, 그리고 인생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매 단계마다 누구나 새로운 심리사회적 위기(psychosocial cirsis)를 겪는 거라고요. 나만 그렇게 불안한 게 아니라고 다독여주는 그의 연구들은 위안이고 안심이었어요.



  에릭슨은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중요한 타인들과의 관계, 그리고 사회적 상황 속에서 내가 만들어진다고 설명해요. 제가 가끔 후배들을 만나면 하는 이야기가 있거든요.

'저 선배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면 그 사람이 했던 행동이나 결정을 봐. 그 사람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언제나 말은 행동보다 쉬워. 그 사람의 행동과 결정을 봐야 해.'이건 스스로에게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나를 알고 싶으면 내가 했던 행동과 결정을 봐야 하죠.



  어떤 상황에서라도 우리는 비슷한 결정을 할 때가 많아요. 또는 비슷한 상황에서 기분 좋아하고 또 불같이 화를 내죠. 저 같은 경우는 3 사람 이상 넘어가는 모임에서는 말을 거의 안 한다던가, 새로운 상황이나 사람들 앞에선 눈빛이 흔들리며 말을 잘 못하는 것, 그러다가 그 사람과 일 년 정도 알고 지내면 그때서야 마음이 해동되어 갑자기 편안하게 말을 건네는 모습을 보여요. 이건 계속성, 즉 내가 가진 '한결같은 나'예요.



  가끔 그 결정과 행동들이 타인과 구별되어 보일 때가 있어요. 직장을 다니며 아무런 어드밴티지가 없는 대학원 박사를 취득한 저의 모습은 그 예로 볼 수 있죠. 박사 학위를 딴다고 해서 월급이 오르는 것도, 명예를 얻는 것도, 그리고 전직이 쉬운 것도 전혀 없어요. 그저 이 삶이 자연스러운 것 같다는 막연한 흐름 하나로 선택한 일이었어요. 지금도 가끔 주변에서 물어요. '왜 박사를 했어?' 그러면 저는 가끔은 자주 설명해야 했어요.

  "취미였어요. 누군가는 골프를 치고, 운동을 하고, 개인 PT를 하듯 저에게는 취미였어요. 우리 모두 끌리는 어떤 일에 시간과 노력을 쏟잖아요. 저는 그게 공부였던 거 같아요. 이왕 하는 거 특기면 좋겠지만 취미정도인 것 같아요. 그리고 아마 골프나 PT보다 돈도 적게 들걸요!"



쓸데없는 일이 자연스러운 일로 느껴져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사람. 그게 공부였던 사람. 어쩌면 무용한 것을 선택하곤 하는 사람.

그건 30대의 내 개별성, 즉 '다른 사람과는 구별되는 나'라는 인식이었어요.



  그렇게 한결같은 나, 그리고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내가 서로 손을 뻗어 그물을 이루어가더라고요. 그때 나의 개별적인 모습들에서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었어요. 어쩌면 내 생각, 행동, 가치들이 연결되며 하나의 총체적인 내 모습을 정의할 수 있게 되었죠. 저는 타인에 대한 관심보다 나 스스로에 대해 관심이 좀 더 많은 사람이었어요. 개별적인 사회적 경험을 통해 총체적인 내 모습을 발견한 거죠.




  지금까지 확실하게 발견한 하나의 총체적인 내 모습은 한 문장에 그쳤지만, 저는 계속 살아있는 사람이고 앞으로 내 상황도 변할 것이 분명하니까 또 살아가며 내 총체적인 모습을, 정체감을 발견하며 살아갈 수 있겠죠. 에릭슨은 누구에게나 삶의 단계마다 위기(crisis)가 온다고 했거든요. 그 위기를 내가 어떻게 겪어가느냐에 따라 나라는 사람이 성장하는 모습이 달라진다고 했어요. 나에게만 불안한 삶이 아니라고 말이에요. 누구에게나 평생 위기가 온다고 말해주는 그가 고마웠어요.



  그 시작은 영유아기부터 시작해서 노년기까지 이어져요. 우린 평생 성장하는거죠. 영유아기에는 일관성 있는 양육을 통해 세상에 대한 신뢰감을 획득하느냐에 대한 위기를 겪고, 영아 때는 할 수 있는 일이 생겨서 내 생각대로 행동을 하는 과정에서 자율성을 획득하는지에 대한 위기를 겪죠. 유아기에는 적극적으로 놀이를 하며 '아! 내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구나!' 하는 주도성 획득에 위기를 겪고, 아동기에는 학교를 다니며 과제 완수를 통해 근면성 획득을 할 수 있느냐에 대한 위기를 겪죠. 청소년기에는 다양한 나를 발견하며 정체감을 형성할 수 있느냐에 대한 위기를 겪게 되고, 성인 초기가 되면 다양한 인간관계 안에서 의미 있는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친밀감 형성을 할 수 있느냐에 대한 위기를 겪습니다. 이후 중년기에는 내가 사회적으로 기여하고 있는가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생산적인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위기를 겪고, 노년기에는 과연 내 삶이 의미가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통해 자아통합감을 획득하느냐의 위기를 겪죠.



  우리는 이렇게 누구나 삶의 매 순간에 위기를 겪게 되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살아가는 존재인가 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그 위기를 내가 어떻게 겪어내느냐가 되겠죠. 이건 제게 중요했어요. 제가 가지고 있던 스스로에 대한 불만은 이거였거든요.

  '왜 나는 이렇게 불안하지? 왜 나는 마흔을 살았는데 여전히 어렵지?'

하지만 에릭슨은 이런 제게 이렇게 말해주었죠.

  '왜라는 질문에서 불안해하기보다, 어떻게?라고 질문의 방향을 바꿔보는 게 어때?'



  에릭슨을 통해 저는 드디어 '왜 나만?'이라는 질문의 핸들을 '나는 어떻게 해볼까?' 하는 방향으로 꺾어봅니다. 새로운 질문이 내게 도착했다는 것은 내가 또 다른 발달단계에 진입했음을 알려주는 시그널임을 이제는 알았거든요.



  이젠 매 삶의 단계마다 나에게 노크하는 새로운 질문을 만날 때 나는 처음엔 늘 그렇듯 낯설겠지만 이전보다는 빠르게 의연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불안해하거나 스스로를 미련하게 생각하기보다는 그 순간에 충실히 행동하고 선택해보려 합니다. 그렇게 그 단계에서 늘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만들어갈 생각이에요.



  어쩌면 우리 삶은 늘 정체감을 성취하고, 또 새로운 삶의 단계와 상황을 만났을 때 정체감을 탐색해 보는 과정의 반복이 아닐까 합니다. 매 순간 새로운 삶의 단계와 그에 맞는 새로운 위기가 오는 게 인생이라면 말이죠. 오늘 내가 불안했다면 내일의 나는 나를 발견했을 거예요. 오늘 내가 나를 발견하며 편안했다면 내일은 또 새로운 나를 만나느라 내가 분주하겠죠. 하나면 될 것 같아요. 그 순간에 충실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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