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도 되기 전에 아빠에게 어마한 자산을 세 번에 걸쳐 물려받았다. 요지에 있는 부동산이나 잘 나가는 회사의 주식이어도 좋았겠지만 그런 자산은 까딱하면 나는 받았지만 못 물려줄 수도 있다는 점에서 부담스럽다. 그런데 작은 체구의 친정아빠에게 받은 자산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들과도 나눌 수 있고, 또 우리 아들딸에게도 고스란히 물려줄 수 있는 것이라서 참 좋다.
첫 번째 자산.
중2 1학기 중간고사 때 과학 과목에 심혈을 기울여 '노오력'했는데 결과가 안 좋았다. 평소 내 성적을 시시콜콜 궁금해하지 않고 그저 열심히 하는 모습이 기특하다 칭찬만 하는 아빠한테 이 고민을 털어놓았다.
"아빠 아빠. 작년에 똑같이 공부해도 사회만 꼭 더 틀리길래 이번엔 정말 지인짜 열심히 공부했거든? 근데 점수가 비슷해. 어이없기도 하고 너무 허무한데 왜 그럴까? 내가 사회에 소질이 없나?"
동동거리며 투덜대는 중딩이의 푸념에 30년 전 우리 아빠는 답대신 질문을 하셨다.
"성적표를 다시 한번 잘 봐봐. 사회는 네가 노력한 만큼 결과가 안 나왔지만 다른 과목 중에 노력한 거 대비 점수 잘 받은 과목도 있을 걸?"
내 눈이 성적표를 가로로 훑고 지나며 낯이 뜨거워졌다. 두어 과목은 운이 좋았다 싶었다. 노력보다 결과가 좋은 건 내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구나. 그런 과목도 있다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아빠가 말씀하신다.
"인생이 꼭 열심히 깊이 판 데서만 우물이 터지는 게 아니더라. 어떤 때는 열심히 해도 결과가 미미하고 또 어떤 때는 이런저런 이유로 노력이 부족해도 하늘이 도와서 잘 되기도 하고 말이야. 다만 노력은 확률을 높이는 거야. 확률적으로는 노력에 비례해서 결과가 좋을 테니까. 이런 걸 중학생 때 알게 되다니 넌 진짜 운이 좋다."
이 말을 들은 그 순간으로 돌아가면 꼭 한마디 보태고 싶다. "아빠 딸로 태어난 게 진짜 운이 좋았던 거지!"
두 번째 자산은 고1 때였다. 첫 번째 에피소드를 듣고 궁금할지도 모른다. 한 과목 아니고 전 과목 시험을 망칠 때도 있지 않은가. 나에게도 일어났다. 그것도 고등학교 1학년 첫 내신 때. 부모님이 성적이 안 좋다고 뭐라 하는 분들도 아니었는데 그 성적표를 엄마한테 내미는 건 정말 고역스러웠다. 그런 고문 같은 시간을 내가 보내는 방법은 선수 치며 우는 것이 뿐이었다. 엄마는 그 성적을 아빠에게조차 말씀드리지 않았다. 그런데 너무 괴로웠던 내가 아빠랑 둘이 있을 때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첫 번째 에피소드 이후 뭔가 내 나름대로 큰 일이라고 판단되는 일이 생기면 아빠를 찾게 되었다.
"아 아빠, 이번엔 진짜 다 열심히 했는데 정말 다 망쳤어요. 내가 멍청한가? 선생님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건 그냥 넘기고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건 안 나온 거 보니 이건 진짜 내가 문제인 거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들어."라고 말씀드리니
"음. 출제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거라면 그 또한 다음을 위한 공부가 될 거고, 그리고 그것 보다 더 중요한 게 하나 있는데, 네가 공부한 게 이번 시험이랑은 안 맞았지만 그건 그리 억울할 게 없어. 네가 공부한 건 다 니 거고 아무도 못 가져가. 또 네가 중요하다 생각해서 열심히 공부했다면 그건 시험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니 인생에서 쓰임이 있을 거야. "
그날 저녁, 아빠의 말을 일기장에 적어두었다. 나중에 내가 낳은 아이들에게도 해줘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아니 점수가 왜 이래?/ 내가 너 이럴 줄 알았어!/ 너 학원가서 딴 짓 하니?" 하고 아이와 멀어지는 건 하수 부모다. "다음에 잘 보면 되지." 같은 상투적이고 영혼 없는 위로는 중수일 거다. 아빠는 고수였다. 고수의 말은 살아가며 두고두고 생각나서 가슴에 품게 된다.
세 번째는 딱 27년 전 이맘때이다. 수능이 시행된 지 겨우 4년째였던 27년 전엔 불수능이란 말은 없었지만 97년도 수능은 그전 대비 불수능이었다. 지금처럼 1교시에 내가 어려우면 다들 어려우니 멘탈 붙잡으라는 말도 듣지 못했다.(근데 그게 듣는다고 할 수 있는 일인가 싶긴 하다.) 또컨디션 조절 실패로 열이 39도를 넘어 해열제까지 먹고 들어간 시험장에서 멘탈이 바사삭 바스러졌다. 평소엔 본 적이 없는 점수로 재수를 결심하고 우울했던 그때 나와 성적이 비슷했던 친구가 수능에서 찍은 것도 맞고 헷갈린 것도 맞았다며 신나 하더니 서울대에 붙었다. 그리 사이가 좋았던 친구가 아니어서 그랬는지 내 그릇이 작았는지 모르지만 화도 나고 샘도 나고, 그런 내가 모양 빠지고 기운도 빠졌다. 복잡하고 찜찜한 감정을 끌어안고 또 아빠한테 가서 보따리를 풀었다. 인생사 새옹지마야. 좋은 게 계속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게 계속 나쁜 것도 아니야... 이런 위로를 해주시려나 했는데아빠는 진짜 고수임을 한번더 스스로 보여주셨다.
"이번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고 네가 아는 사람이, 특히 네 친구가 잘 되는 걸 배 아파하면 안 돼. 어차피 누군가에게 갈 운이나 복이라면 네가 아는 사람인게 다행이지 않아? 네 친구들이 다 억울한 점수를 받고 좋은 학교를 못 가는 것보다 다 좋은 학교 가는 것이 너한테도 더 좋은 것일걸? 기억해 둬. 네가 모르는 사람이 잘 되는 것보다 네가 아는 사람이 잘 되는 것이 너에게도 훨씬 좋은 일이야. "
아빠의 말을 이해는 했지만 대입이 인생 전부였던 열아홉 살은 입시실패가 너무도 쓰려서 그 친구를 진심으로 축하해주지는 못했다. 그런데 그 이후 친구들이, 지인들이 잘 되는 것이 나에게도 좋은 거란 생각이 들면서 진심으로 축하해 주자 그들과 사이가 더 깊어졌다. 행시를 합격하거나, 통대에 입학하거나, 투자로 큰돈을 벌거나, 변호사가 되거나, 임원이 되거나, 결혼을 아주 잘 한 친구들은 이제 자랑스럽고 든든한 내 편들이다. 친구가 잘 되는 걸 배 아파하지 않고 내 일처럼 기뻐하는 것은 어쩌면 조금은 내공이 필요한지도 모르지만 그 내공은 분명히 나에게 좋은 일이 된다. 아빠의 말처럼.
재수를 하고도 그리 만족할 만한 결과를 내지 못했지만 아빠는 담백한 한마디를 보태주었다.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는 거 멋진 재능 맞지만 그게 내가 아니라고 낙담할 필요는 없어. 공부 잘하는 사람이 필요하면 그 사람과 같이 일하면 되거든. 내가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음악도 잘하는 건 정말 아주 어려운 일이지만 공부 잘하는 친구도 사귀고, 운동 잘하는 친구랑도 친하고, 음악을 잘하는 친구를 두는 건 훨씬 쉬운 일이니깐."
아빠자랑을 하려고 쓴 글은 아니지만 아빠자랑이 되었다. (나에겐 멋진 아빠지만 우리 엄마가 브런치작가가 되면 난 아빠를 지키기 힘들지도 모른다.) 30여 년 전 시험을 망칠 때마다 큰 힘이 되고, 그 이후 시험을 보지 않는 삶에도 계속 큰 울림을 주었던 저 말들이 시험을 망쳐서 속상해하는 청춘들에게도 힘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또 내년부터 첫 아이의 내신을 마주할 내 마음에도 다시 품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