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잔의 커피는 주요한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사건과 함께 했다.
한 잔의 향기로운 커피가 오늘날 우리의 컵 안에 들어오기 까지는 24개 이상의 단계를 거친다.
물론 현대 커피의 품종과 가공 방식(수세식 washed process과 자연건조식 natural process)에 따라 단계에 차이가 있지만 대게는 비슷하다.
커피는 커피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의 씨앗이다. 이 나무에서 열매를 수확한 후에 가공을 거쳐 씨앗을 얻는다. 이 씨앗을 대량 재배하기 위해 농장은 개간한 토지에 속껍질 채로 씨앗을 심고 6~12개월 후 모종을 열을 맞춰 옮겨 심는다. 이를 약 1~3년 간 열심히 재배하고 전지하여, 붉게 변한 커피 체리를 따 과육을 제거한다. 이 체리 열매의 단단한 껍데기 안에는 일반적으로 2개의 씨앗이 마주보고 있다. 이 껍질과 과육을 제거하면 얻게 되는 2개의 씨앗이 바로 생두이다. 이를 불순물을 제거하고, 건조시킨 후 껍질을 벗겨낸다. 이후 원두를 선별하고 등급을 매기고, 경매나 도매를 통해 원두가 판매되면 항구로 보내진다. 이후 여러 도소매 과정을 거쳐 믹싱 혹은 블렌딩(여러 원두를 섞는 것)과정을 거치고, 원두를 까맣게 태우는 로스팅 후 분쇄되면 우리가 아는 한 잔의 향기로운 커피가 내려질 준비를 마치게 된다.
이렇게 한 잔의 커피가 만들어지는 데에는 많은 과정과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커피를 만들기 위한 과정이 이처럼 복잡하고 그 역사가 무척이나 긴 만큼, 분명 커피는 알게 모르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세계사에 큰 영향을 주어 주요한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사건과 함께 한다.
특수한 날씨와 환경에서 커피를 대량 재배하기 위해 많은 토지와 긴 시간이 필요한 만큼 이를 위한 전쟁과 식민지배는 필수적으로 일어났다.
유럽 커피하우스에서 커피는 사상가와 예술가들의 음료이자, 민중의 음료로서 토론의 장을 열었고, 이는 유럽의 문화적 부흥과 개혁, 차별과 혁명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상업적으로도 커피의 무역이 곧 무역사를 나타내었다. 커피는 고대 아라비아 시절부터 현대까지 중동과 유럽, 미국, 남미, 아시아의 교역과 발전에 큰 영향을 주어 많은 역사적 사건들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오스만투르크와 유럽 역사에서는 커피를 빼 놓을 수가 없다. 반대로 다양한 역사적, 지리적 사건과 환경들이 커피의 전파에 큰 영향을 주기도 했다.
오스만제국은 15세기 전성기 시절 터키는 물론이고 발칸반도(남동유럽), 흑해, 동유럽, 북아프리카(리비아, 알제리, 이집트 등), 서아시아(팔레스타인, 시리아 등), 아라비아(예맨 등) 등 3대륙을 모두 점령했던 대제국 이었다. 이는 곧 지중해 해상 무역로와 실크로드의 장악으로 이어져, 커피와 홍차 등 여러 기호품을 빠르게 유럽과 아시아로 전파하였고, 커피의 전파를 통한 유럽권에서의 막대한 수요로 중동과 아프리카 등에서 커피와 홍차를 대량 재배할 수 있게 해주었다.
커피는 종교적으로도 중동의 이슬람과 유럽의 카톨릭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유럽과 중동의 여러 국가에서는 역사적으로 커피를 종교적 이유로 금기시 하였는데, 커피의 검붉은 색과 각성효과를 악마의 음료로 규정했던 것이다. (사실 커피로 인해 사람들이 카페(커피하우스)에 모여 자주 토론하고 사교의 장을 여는 것을 두려워 했던 종교적 정치 지도자들의 변명일 지도 모른다. 사교의 장은 곧 지도자에 대한 반란을 야기할 지도 모르고, 대중들이 모이는 구심점이 종교가 아닌 커피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종교적 박해 속에서도, 재미있게도 대중과 교황의 커피 사랑 때문에 커피는 그 자체로 교황에게 세례를 받기도 하였다. 1605년 교황 클레멘트 8세는 커피에 세례를 내렸는데 이는 이교도의 악마의 음료로 취급 받아 밀매로 유통되던 커피가 대중화 된 계기가 되었다. 무려 교황이 세례까지 내린 음료라니, 그만큼 커피의 맛과 향이 매혹적이었을 것이다.
또한 커피는 문화적으로도 세계사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커피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 중 하나가 커피가 '홍차'와 '티타임'을 유행시켰다는 것이다.
'홍차' 하면 가장 생각나는 브랜드가 아마 '실론티(Ceylon Tea)'일 것이다.
우리가 아는 '실론티'의 '실론(Celyon)'은 지금은 스리랑카의 영국령 시절 이름이다. 1800년대 후반까지 실론섬은 홍차가 아닌 대표적인 커피 재배 수출지 였다. 이때 커피의 재배지만 무려 최대 4억8천만평(...)에 이르며, 45만톤(...) 이상의 커피를 생산해 유럽에 수출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스리랑카는 커피를 재배하기에 기후 환경이 썩 좋지 않았을 뿐더러, 커피나무의 대표적인 전염병인 커피녹병으로 재배지의 나무 대부분이 죽어버리자, '실론티의 아버지'라 불리는 제임스 테일러가 영국에서 홍차 묘목을 가져와 홍차를 재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실론섬은 대표적인 홍차 재배지가 되어 '실론티'로 유명해졌다.
홍차를 재배한 것은 아마 당시의 시대적 환경도 주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당시 홍차의 거의 유일한 생산지는 중국이었으며, 17세기 이후 홍차와 함께하는 티타임 문화가 유럽 귀족의 사교 모임으로 떠올랐으니 커피 대신 홍차를 찾는 수요가 많았을 것이다. 또한 실론섬에서의 대량 재배로 인한 홍차 가격의 하락도 티타임 문화를 더욱 발전시켰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유럽에서 홍차(Tea)가 대표적인 사교 모임이 된 이유에도 커피에 영향이 컸다는 것이다.
17세기까지만 해도 영국, 이탈리아 등 여러 유럽의 커피하우스에는 여성이 출입할 수 없었다. 이에 여성들은 국왕에 탄원서를 제출하였고, 이후 성차별적이고 선동을 야기하는 커피와 카페하우스가 한동안 금기시 되며 자연스레 홍차 문화가 여성과 귀족들 사이에 자리 잡게 되었다.
이 영향으로 현재까지도 홍차는 영국과 홍콩인들에게 가장 대중적인 음료이며, 티타임 문화의 영향으로 현대 기업에도 노동자들의 휴식권 제공을 위한 '브레이크 타임' '스낵 타임'을 가지는 곳이 많다. 커피의 재배와 문화가 현대의 문화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커피 속에 담긴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고 알고 있던 역사와 문화에 커피가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자연스레 그 향에 빠져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