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그날의 콜 테마가 정해지면, 신기하게도 이후의 콜도 다 그런 느낌을 따른다. 이번에는 유별나게 이상한 사람들이 연결이 되어 억울했던 날에 대한 기억이다.
통역을 하다 보면, 질문과 상황 없이 엉뚱한 대답을 하는 경우가 많다. 가끔가다 극단적으로 아예 다른 얘기를 하시는 분도 있다. 굳이 극단적인 상황까지 언급하지 않아도, 질문에 100% 딱 맞는 대답을 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드물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예를 들어서, '예 아니오로 답해주세요.'라는 질문에 서술형식으로 답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말을 주의깊게 듣지 않는 경우가 꽤 흔한데, 일반적으로는 그러려니하고 넘어간다.
이번 의료진은 꽤 힘든 느낌이 들었다. 왠만한 통역은 평소보다 더 유창하게 술술 나왔다. 이 사람이 까다로운 느낌이라 좀 더 긴장을 하며 통역에 임했기 때문일수도 있겠다. 웃긴게, 이상한 포인트에서 절었다. 자주 쓰는 단어였는데 한국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0.5초정도 버벅였다. "당신은 통역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아요." 소리가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황당했다. 내가 AI도 아니고.. 이 사람은 프롬프트를 읽는 것 처럼 통역을 하는 것을 상상한 것인가? 이 사람의 통역은 난이도가 높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다른 통역보다 더 힘들었다. 내가 AI처럼 즉각적으로 말을 하기를 바라는 압박을 받아서 그런 것 같다. 기분이 나빳지만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하면 큰 일이 아니기에 통역을 이어나갔다. "다리가 저린가요?" 의료진이 물었다. "다리가 뻣뻣해요." 라는 답이 들려왔다. 의료진이 나에게 말했다. "내 질문을 제대로 통역하고 있나요? 다리가 저리냐고 물었습니다." 발작버튼이 눌렸다. 왠만해서는 전화를 받으며 화가 나지 않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다른 상황보다 더 최선을 다해서 통역에 임하고 있는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 "저는 통역사에요. 당신이 말한 단어 하나하나 빼먹지 않고 전부 통역하고 있습니다. 저는 둘의 그림자에요. 둘의 통역 사이에는 제가 의견을 내지 않아요. 들은대로 통역만 할 뿐입니다." 쉬지 않고 말을 하니 의료진이 소리치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치면 래퍼는 모두 소리치는 사람이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대사를 주면 통역을 해드릴게요."라며 화를 가라앉혔다. 이렇게 한 번 마찰이 있는 사람의 경우, 좀 더 단단하게 관계가 형성될 때가 많았다. 왠지 우리도 전우애같은 끈끈한 감정이 남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후에 내가 모르는 단어가 나왔을 때,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보다 친절하고 명료하게 단어를 설명해주었다. 전화를 끊을 때에도 다른 사람보다 더 따뜻했다.
전화가 끝나고, 다음 전화를 받았다. 다음 전화의 사람도 내 말을 잘 못알아듣겠다고 했다. 공무원이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받는지 주위가 아주 시끄러웠다. 나도 말소리가 잘 안들려서 "방금 말씀하신거 잘 못들었어요. 다시 한 번 말해주세요."라고 세 번을 요청했는데 그는 대답이 없었다. 전화가 끊긴건가 싶었지만 인내를 가지고 여러번 더 대화를 시도하니 그가 돌아왔다. 이 일이 처음이면 내 발음이 문제인것 같다며 자책을 했을 테다. 하지만 여태 받았던 수만번의 콜 중, 이렇게 내 말을 못 알아듣는 사람은 없었다. 이 사람에게도 순간적으로 '왜 이렇게 일에 집중을 안하냐'라고 묻고 싶었지만 아까의 케이스가 생각나서 참았다. 통화 처음에 공무원이 "how are you"라고 얘기하신 것을 떠올렸다. 이 사람도 친절한 사람이리라. 사람이리라.
내가 인내를 가지고 얘기를 하니, 이 사람이 "잠시만요"하더니 스피커폰을 끄고 조용한 통화환경으로 돌아왔다. 여태 왜 그렇게 이상한 환경에 있었는지 황당했다. 공무원이 이래도 되나 싶었다. 통화 중간 중간 '세상에 이런 일이!'스러운 일이 몇가지 있었다. 전화를 끊을 때가 되니 공무원이 나에게 "Thank you for your patience"라고 말을 했다. 이 말은 여러번 들었던 내용이지만, 전부 한국인 고령자와 대화를 할 때 고령자가 내 말을 잘 못 알아들어서 쩔쩔매는 상황을 본 사람이 했던 말이다. 그들에게 아주 천천히, 친절하게 말을 해줄 때 들었던 말이다. 이번 상황에서는, 자기가(청각에 장애가 없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 분에게 문제가 있었다면 이 분이 일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는 것 이다.) 내 말을 잘 못 알아들었지만 인내를 가져줘서 고맙다는 맥락의 고마움이었다. 새로운 상황에서 고맙다는 말을 들으니 답답했던 마음이 풀어졌다.
이후에 들어간 콜에서는, 뇌손상이 의심되는 환자였다. "다리를 들어보세요"라고 했는데 환자가 다리를 못 들었다. 그리고 자꾸 다른 소리를 했다. 의사 선생님이 있는데 옆집 아주머니와 잡담을 하는 느낌으로 자꾸 연관되지 않는 말을 중얼중얼 거렸다. "다리를 못 드시면.. 퇴원이 어려워요."의사선생님이 난처함을 표하며 말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주머니의 다리가 번쩍 올라갔다. 의사 선생님께서 당황해하시며 "아.. 여태 소통에 오류가 있었나보네요. 다리는 문제 없어보여요."라고 말하셨다. 내가 또 중간에서 말을 잘 전달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의심받는 느낌이라 억울했다. 그래도 '나는 다 통역 했다구욧!'이라며 입술을 삐죽 내민다 해도 누가 알아주겠는가. 자기 얘기는 꾹 참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옮겨주는 앵무새가 바로 통역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