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한독의약박물관
요즘 초등학교 한 반에 안경을 쓴 아이가 절반이 넘는다고 합니다. 스마트폰, TV, 컴퓨터 등 전자기기 사용이 많아지면서 시력이 떨어졌기 때문일 테죠. 우리나라에 안경이 처음 소개된 건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사이입니다. 당시 안경은 워낙 고가라 일부 지배층만 제한적으로 사용했죠. 하지만 18세기에 들어 국내에서도 안경 제작 기술이 발달하면서 지배층을 넘어 다양한 사람들이 안경을 착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안경의 보편화는 조선시대에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 안경이 없었다면 겸재 정선의 그림도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왕실과 궁정에 필요한 그림을 그리는 ‘화원’이 있었습니다. 안경을 착용한 화원은 나이가 들어서까지 창작 활동에 몰두할 수 있었는데, 조선시대 대표 화가 겸재 정선도 그 중 한 명이었죠. 겸재 정선은 안경을 쓰고 80대까지 작품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경매에서 겸재 정선의 작품이 50억~70억에 거래된 적이 있다고 하는데... 만약, 안경이 없었다면? 겸재 정선의 국보급 그림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겠죠. 이처럼 화원의 활발한 활동은 조선 후기 회화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 후대에 남겨진 선비의 지식
나이가 들어 눈이 침침해진 선비들은 안경의 도움을 받아 나이가 들어서도 책을 읽는데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또, 자신들의 학문적 성취를 보다 수월하게 기록할 수 있게 되면서 새롭고 다양한 지식이 확산됐습니다.
# 정교해진 침술
시력이 나쁘거나 노안이 있는 의원에게 정교한 시침은 부담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의원이 침을 안 놓을 수는 없겠죠. 이때 안경이 필요합니다. 조선 21대 임금 영조는 내의원 수의(首醫) 권성징에게 정확한 시침을 명령하면서 안경을 착용하라고 명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유물은 한독의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남석안경’입니다. 안경이 전래된 이후 17세기부터 조선에서도 안경을 제작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20세기 이전까지 유리를 생산하지 않았습니다. 유리를 생산하기 전 제작했던 남석안경은 경주 남산에서 생산된 수정으로 만들었습니다. 당시에는 경주의 별칭인 동경(東京)을 따서 ‘동경 수정안경’이라고도 했습니다.
안경 테는 귀갑(거북의 등껍데기), 우갑(소뿔) 등 고급스러운 재료로 제작됐습니다. 남석안경은 조선 순조 때 널리 보급되어 고급품으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신식안경의 대량 판매로 그 수가 줄어들었다가 남산이 문화재보호구역 지정되고 수정 채굴이 금지되면서 거의 맥이 끊어졌습니다. 남석안경은 코다리에는 여의두 무늬 또는 구름 형태의 특이한 문양을 지니고 있으며 경도(硬度)가 높아서 쉽게 깨지지 않습니다. 유리 렌즈에 비해 온도에 따른 변화가 적어 여름에는 눈을 시원하게 하고 김이 서리지 않아, 눈의 피로를 풀어 주는 보안경의 으뜸으로 여겨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