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LIFE

머리카락과 함께 흩어진 기억 조각

by 테헤란 언니

by 일상건강
남달랐다고 했다.
하나를 보여주면 두 번째, 세 번째도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학창 시절, 공부하는 게 어렵진 않았다. 열심히 하니 성적이 오르고, 성적이 오르니 주변에서 머리가 좋다 똑똑하다는 얘기를 듣고 자랐다. 그렇게 성인이 되고 대학을 가고 직장을 구했다. 남들 결혼하는 시기에 결혼해서 2년 만에 출산을 했다. 지하철로 비유하자면 나는 늘 중간 칸에 타고 있었다. 앞서 나가지도, 뒤쳐지지도 않은 중간. 출산을 했고 아이는 잠을 자지 않는다는 걸 나는 몰랐다. 100일의 기적이라는 말도 나중에 알았다. 아이가 태어나고 100일이 되어야 잠을 길게 자는 일명 ‘통잠’을 자는 시기라 부모가 잠을 좀 잘 수 있다는 말이다. 신생아는 말 그대로 시도 때도 없이 밥을 먹고 칭얼거렸다. 목과 몸은 슬라임 같이 흐느적 거려 내 어깨와 팔로 지지를 해주지 않으면 뒤로 앞으로 꺾이기 마련이었다.

pc001011348.jpg?type=w1200

평화로이 두 부부만, 성인만 살던 집에 아이가 태어나자 신경 쓸 것이 많아졌다. 청소도 더 자주 해야하고, 아이용 세제, 아이용 분유 등 끊임없이 ‘아이용’이 늘어만 갔다. 점차 이 집에는 성인이 사는 흔적이 지워지고 있을 무렵, 출산하고 100일이 가까워지고 기적을 기대하고 있을 무렵,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다. 머리를 감고 나면, 수북이 쌓인 빠진 머리카락으로 수채 구멍이 막혔다. 수채 구멍을 막고 있는 한 뭉텅이의 머리카락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나면, 머리를 말리면서 또 그만큼이 빠져있었다. 마치 털갈이를 하는 동물처럼, 내가 다녀간 자리는 머리카락이 흔적으로 남았고 어쩔 수 없이 길었던 머리를 단발로 잘랐다.

pc003498905.jpg?type=w1200


의학적 근거는 전혀 없지만, 그때부터였다.

머리카락이 빠질 때부터, 아이가 이유식을 시작해 더 신경 쓸 것이 많아지고 ‘아이용’이 더 늘어날 시기부터, 나는 깜빡 잊어먹는 일이 잦아들었다. 신용카드 결제일에 맞춰 송금을 해야하는 날짜를 잊어 ‘빚 독촉’ 전화를 카드사에서 받기도 했고, 요리를 할 때 방금 간장을 넣었는지 안 넣었는지 헛갈리기 시작했다. 늘 기억력이 좋고 머리가 좋다는 칭찬을 항상 들어온 나로서는 당황스러웠다. 이때부터 핸드폰에 의존하여 정말 자질 구래 한 일도 핸드폰 일정에 넣어놓게 되었다. 친구를 만나기로 한 약속부터 아이 예방접종일 등.


아이의 돌잔치를 할 때가 되자 머리카락이 빠진 곳에는 삐죽삐죽 짧은 잔머리들이 삐져나오기 시작했지만 나의 기억력은 아직도 예전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아마 빠진 머리카락에 흰머리들이 자라면서 나의 기억력도 색이 바래진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20200904_%EC%B9%98%EB%A7%A4%EA%B7%B9%EB%B3%B5%EC%9D%98%EB%82%A0_%EB%B0%B0%EB%84%88.jpg?type=w1200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첫사랑을... 기억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