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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건강 Sep 25. 2020

머리카락과 함께 흩어진 기억 조각

by 테헤란 언니

남달랐다고 했다.
하나를 보여주면 두 번째, 세 번째도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학창 시절공부하는 게 어렵진 않았다열심히 하니 성적이 오르고성적이 오르니 주변에서 머리가 좋다 똑똑하다는 얘기를 듣고 자랐다그렇게 성인이 되고 대학을 가고 직장을 구했다남들 결혼하는 시기에 결혼해서 2년 만에 출산을 했다지하철로 비유하자면 나는 늘 중간 칸에 타고 있었다앞서 나가지도뒤쳐지지도 않은 중간출산을 했고 아이는 잠을 자지 않는다는 걸 나는 몰랐다. 100일의 기적이라는 말도 나중에 알았다아이가 태어나고 100일이 되어야 잠을 길게 자는 일명 통잠을 자는 시기라 부모가 잠을 좀 잘 수 있다는 말이다신생아는 말 그대로 시도 때도 없이 밥을 먹고 칭얼거렸다목과 몸은 슬라임 같이 흐느적  거려 내 어깨와 팔로 지지를 해주지 않으면 뒤로 앞으로 꺾이기 마련이었다

평화로이 두 부부만성인만 살던 집에 아이가 태어나자 신경 쓸 것이 많아졌다청소도 더 자주 해야하고아이용 세제아이용 분유 등 끊임없이 아이용이 늘어만 갔다점차 이 집에는 성인이 사는 흔적이 지워지고 있을 무렵출산하고 100일이 가까워지고 기적을 기대하고 있을 무렵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다머리를 감고 나면수북이 쌓인 빠진 머리카락으로 수채 구멍이 막혔다수채 구멍을 막고 있는 한 뭉텅이의 머리카락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나면머리를 말리면서 또 그만큼이 빠져있었다. 마치 털갈이를 하는 동물처럼내가 다녀간 자리는 머리카락이 흔적으로 남았고 어쩔 수 없이 길었던 머리를 단발로 잘랐다


의학적 근거는 전혀 없지만, 그때부터였다.

머리카락이 빠질 때부터아이가 이유식을 시작해 더 신경 쓸 것이 많아지고 아이용이 더 늘어날 시기부터나는 깜빡 잊어먹는 일이 잦아들었다신용카드 결제일에 맞춰 송금을 해야하는 날짜를 잊어 빚 독촉’ 전화를 카드사에서 받기도 했고요리를 할 때 방금 간장을 넣었는지 안 넣었는지 헛갈리기 시작했다늘 기억력이 좋고 머리가 좋다는 칭찬을 항상 들어온 나로서는 당황스러웠다이때부터 핸드폰에 의존하여 정말 자질 구래 한 일도 핸드폰 일정에 넣어놓게 되었다친구를 만나기로 한 약속부터 아이 예방접종일 등


아이의 돌잔치를 할 때가 되자 머리카락이 빠진 곳에는 삐죽삐죽 짧은 잔머리들이 삐져나오기 시작했지만 나의 기억력은 아직도 예전으로 돌아오지 못했다아마 빠진 머리카락에 흰머리들이 자라면서 나의 기억력도 색이 바래진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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