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데 글로 설명할 수가 없네?
J의 기록
우리 팀에서는 매 분기마다 회고를 하고 있다. 지난 분기 동안 맡았던 업무가 잘 진행되었는지 그 결과는 어땠는지를 확인하고 느낀 점이나 개선이 필요한 점을 공유한다. 그 내용을 쭉 적어놓고 다음 분기를 위한 Action item을 도출하는 순서였다.
그리고 다음 분기가 찾아오면 직전의 Action item 이 실행되었는지 확인하는 것으로 회고를 시작한다. 개선할 수 있었던 것을 방치하지는 않았는지, 잘 해왔던 것을 잘 지켜나가고 있는지 다시금 살펴본다.
이미 출시를 해 들여다보고 싶지도 않은 문서를 찾아가며 회고를 하는 것은 꽤 피곤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고는 꼭 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신기하게도 직접 업무에 파묻혀 정신없이 일을 처리할 때 보다 다시 그때를 돌아보면서 발견하게 되는 점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제주 워케이션 에세이 또한 그랬다. 3월-4월에 걸쳐 다녀온 워케이션을 떠올리며 8월 즈음이 되어서야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 꽤 텀을 두고 회고를 하는 셈이었다. B가 착실히 업로드한 블로그를 다시 읽고, 잔뜩 찍어둔 사진을 보며 글을 썼다.
첫 화의 제목은 '3N살에게도 질풍노도의 시기가 온다'였다. 비장하기 그지없다. 이 에세이가 마무리될 쯤엔 달라진 모습이라도 보여줄 것 같은 제목이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첫 화를 쓸 때가 되어서야 왜 내가 떠났는지 이해했다. 어떤 심난한 심경이 나를 움직이게 했는지 알았고, 결과적으로 그 불안과 고민이 나를 어떠한 행복으로 이끌어주었는지 깨달았다. 진심으로 '3N살의 질풍노도'를 맞이한 것에 감사했던 순간이다. 덕분에 워케이션을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때 나는 어디론가 떠나면 뭐라도 해결될 것 같았다. 순진한 생각이었다. 당연하게도 나는 워케이션을 떠나기 전과 달라진 게 없다. 장소가 제주에서 서울이 되었을 뿐, 여전히 리모트 근무는 이어지고 있다. 시간은 흘러 곧 한 살 더 먹을 것이며, 어딘가 내 몸 누일 자가를 가지지 못했고, 연애도 하지 않고, 그나마의 재테크라고 할 수 있는 주식은....(생략).
막연하게 나를 몰아세우던 고민과 불안감은 어떻게 되었을까. 안타깝게도 여전히 내 옆에 있다. 하지만 불안감을 바라보는 감정은 달라졌다. 막연하게 괜찮을 것 같은, 모르겠지만 다 잘 될 것 같은 기분이 그 옆에 함께한다.
신기한 일이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른 것은 워케이션을 다녀왔고, 그 경험을 글로 정리했을 뿐인데 말이다.
근미래에 나는 또 다른 워케이션을 시도해볼 생각이다. 그렇게 이런저런 경험을 시도하다 보면 다음 회고에서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유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아닐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마무리하기는 아쉬우니, 제주 워케이션이 끝내고 느낀 감상을 간단히 적어본다.
첫째. 워케이션을 간다고 해서 있던 고민이 사라지진 않는다. 오히려 무지성으로 일상적으로 보내던 일을 멈추고 새로운 틈이 생기면서 고민할 시간이 늘어날지도 모른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환경은 새로운 시점을 가지는데 도움이 된다. 제주의 자연과 낯선 환경은 유리창에 얼굴을 밀착하고 흠집 하나하나 찾아내던 시선을 환기시켜주었다. 뒤로 한걸음, 두 걸음 물러나 '관찰자' 시선으로 나의 삶을 다시금 바라보게 만들어준다.
셋째. 중요한 건 장소가 아니라 일하는 사람이다. 어디에 있든 역할에 걸맞은 결과를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인지가 중요하다. 워케이션 제도는 회사 입장에서는 상당한 리스크를 감수하는 일인 만큼 고용된 사람 입장에서도 책임감을 가지고 일을 해야 유지될 수 있는 제도라고 느꼈다.
넷째. 혼자 가는 경우가 아니라면, 같이 가는 사람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업무 시간과 그 외 시간을 함께 보내고, 동시에 각자의 시간도 즐길 수 있는 성향의 사람이라면 금상첨화.
마지막. 갈 수 있을 때 가야 한다. 모든 회사가 재택근무와 워케이션을 허용해주지 않는다. 월급을 받으면서 새로운 환경에서 일을 하는 경험은 상상 이상으로 즐겁다.
누군가 나와 B처럼 워케이션을 허용하는 회사에 근무한다면 나는 우선 시도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워케이션을 갈 수 있는 회사를 다니는 건은 어찌 보면 특권이다. 먼 미래에 아쉬움을 삼키고 싶지 않다면 가까운 어딘가에라도 떠나보기를 권한다.
그 길이 즐거울지 무미건조할지 끔찍할지는 모를 일이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선택지보다는 분명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끝으로, 이 소중한 한 달의 시간을 나와 함께해준 B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또 함께할 다음 워케이션을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