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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유 Feb 12. 2024

영국 택시기사와 스몰토크


블랙 캡(Black Cab)이라고도 불리는 런던의 택시.


런던에서 택시를 탈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가까운 거리는 가능하면 걸어 다니려고 노력한다. 조금 먼 거리여도 웬만하면 버스로 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가끔은 택시를 타야 할 일이 있기도 하다. 예를 들면, 먼 거리는 아니지만 시간에 반드시 맞춰서 도착해야 하는 약속이라든지, 학교에 아이들을 데리러 가야 하는데 불가피한 일이 있어 미리 여유 있게 출발하지 못하는 경우가 그렇다. 길이 막히지 않는다면 보통 10분 안에는 도착하는 거리다. 그런데 의외로 택시 안에 머무는 이 10여 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택시 기사와 '대화'를 하게 되는 경우가 가끔 있다.

런던 시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영국 택시, 블랙캡 Black Cab




이렇게 시작하는 경우는 종종 있는 편이다. 내가 외모가 아시아인이여서 그런지 몰라도 어디에서 왔는지, 여기에 거주하는지, (거주한다면) 얼마나 됐는지를 물어보는 질문 말이다.


택시 기사 : "춥죠?"

나 : "날씨요? 네, 뭐 저는 괜찮아요."


"진짜요? 오늘 꽤 추운 날씨인데요."

"그렇긴 한데요, 나는 한국에서 왔는데, 한국의 겨울 날씨도 굉장히 추운 편이라서요 ^^"

"한국에서 왔군요, 영국에 온 지 얼마나 되었나요?"

"3달 정도 되었어요."

"온 지 얼마 안 되었네요, 환영합니다. 런던 생활은 어때요?"

"좋아요, 적응하려고 노력중이에요 ㅎㅎ..."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주고 받다 보면 어느새 내려야 할 지점에 거의 다 와가고 있다. 뭔가를 생각중이거나, 스마트폰으로 확인중이라거나, 아니면 그 누구와도 이야기할 기분이 아닌 ^^;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보통은 이런 정도의 가벼운 대화조차도 나에게는 런던에서 생활하기에 적절한 온도를 유지시켜주는 작은 일상이 된다 :)


택시 안에 있는 마이크를 켜야 기사분과 이야기할 수 있는 시스템이지만, 사실은 마이크를 켜지 않아도 대화는 들린다 ^^



이런 경우도 있었다.


아이 하교 시간 안에 아이 학교에 도착해야 하는데, 외부에서 일을 보고 학교로 가는 길이라 중간에 택시를 타게 되었다. 그러나 역시 유난히 길이 막히는 오후였다.

나도 모르게, 창문 밖을 보고 또 보고, 스마트폰 화면을 손톱으로 따다닥 두드리기도 했었을 것이다.(긴장하면 나오는 버릇) 이 때 운전기사가 먼저 운을 떼었다.


택시 기사 : "오늘 어때요?(How's it going?)"


택시 기사가 누구와 통화를 한다고 생각했었다. 나한테 물어봤을 거라는 생각을 안 했기에, 대답을 안 하고 있었더니, 기사분이 다시 물어본다. 그래서 내가,


나 : "저요?"


"그럼요, 당신이요."


"아직까지는 괜찮은데, 지금 학교에 늦게 되면 아마 아이가 속상해할 것 같아요(나름 유머를 가장한 압박...ㅋ)."


이때부터, 갑자기 스몰토크 분위기가 시작된다. 아이는 몇 살이냐부터 시작해서, 몇 명이냐, 남매인지 형제인지 etc. 나보다 십 년은 젊어 보이던 기사가 알고 보니 우리 아이들보다도 3살이나 위인 아이들 아버님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각자 댁에 있는 사춘기 친구들 스토리까지 나누게 되고...


결국에는 영어 단어를 배우는 경지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이야기를 하다가 기사분이 이야기하는 특정 단어가 갑자기 안 들린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는데(나에게 이런 단어가 솔직히 이 단어 하나뿐이겠냐만 ㅎㅎ), 이럴 때면 나는, 솔직하게 안 들린다고 이야기하고 다시 물어본다.


"내가 영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어. 그래서 아직도 모르는 단어가 많아, 방금 말해 준 단어 다시 한번 이야기해 줄래?"


"물론이지. t.r.u.a.n.c.y., 학교에 미리 이야기 안 하고 그냥 안 간다고" (truancy, 무단결석이란 의미)


"오오 그렇구나, 알았어, 이해했어!"


이 집 아드님도 어지간히 사춘기 피크 지점에서 머물고 있는 듯 하다 ㅎㅎ






영국 블랙캡(Black Cab) 기사분들은 대부분 친절하다. 친절하지 않아서 기억에 남은 케이스는 현금을 안 냈다고 화내셨던 분과 목적지의 이름이 (발음하기) 애매해서 우편번호를 알려드리려고 하자 자신은 우버가 아니라면서 필요 없다고 하셨던 분... 정도? ㅎㅎ '(영국 캡 기사들은) 친절하거나 유쾌하지 않으면 면허를 딸 수가 없는 거야?'라는 궁금증이 들 정도로 나이스한 기사분들이 많은 편이다.


그런데 이런 분들과 영어로 짧게나마 대화를 티키타카 주고받을 수 있다? 영어 회화는 반드시 영어 학원같은 곳에서만 익힐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렇게 일상 생활 속에서 어느 순간이라도 기회가 생기면 연습하고 또 활용해보는 것이야말로 실속있는 '영어로 말해봐요' 연습이 아닐까? (물론, 나도 '무섭게 보이는' 기사분들과는 아무리 '영어'라고 해도 말을 아끼고 싶은 순간은 있다..ㅎㅎㅎ)


영국을 방문하는 분들중에도 블랙캡이 즐거운 영국 여행의 추억 한 조각이 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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