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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온 May 23. 2018

생애 첫 정신건강의학과 방문기

타인을 통해 나를 이해하는 과정


정신과를 가보아야 겠다고 생각한건 몇 주 전이었다.

일상생활에 큰 불편은 주지 않지만 점점 더 신경쓰이는 두 가지의 습관과 걱정 때문이었다.


1. 회사가 강남으로 이사온 후 고층 빌딩에서 무언가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상상이 든다.

2. 손톱 옆의 거스러미를 상처가 나기 직전까지 뜯는다.


정신과를 고르는 과정에서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심리학자 친구의 도움을 받았다.

회사 근처나 집 근처 중 정신건강의학과 리스트를 뽑아본 후 홈페이지를 들어가거나 관련된 웹문서를 찾았다.

친구는 '무조건 약으로 처방을 하는 곳이 보다 상담을 잘 해주는 곳'이 좋은 정신건강의학과라고 조언해주었다.

다행히 집에서 가까운 병원은 다양한 심리 치료 프로그램을 병행하고 있는데다 전화 예약 당시 '진료에 걸리는 시간은 환자분마다 천차만별이라 얼마나 걸린다고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말해주셔서 의심 없이 예약했다.



평소보다 두시간이나 일찍 눈이 떠졌다. 과연 무슨 이야기를 할까? 약을 먹게 되면 무슨 약을 먹을까?

해보지 않은 것들에 설렘보다는 두려움을 잘 느끼는 편인데 정신과도 마찬가지였다.

태어나 처음 해보는 무언가가 가슴을 두근거리게했다.


진료에 앞서 여러가지 검사표를 작성했다. 독립된 공간에 들어가 검사지에 답안을 작성하는데 내가 왜 이 곳에 왔는지 전화로 이야기 하거나 진료 목적에 작성한 것을 토대로 검사지를 주는 것 같았다.


나는 '가벼운 강박'과 '불안'을 적어냈다.



내가 받은 검사지는 총 4세트였다.


처음 받은 검사지를 먼저 제출하고 문장 완성 검사를 작성하고 있는데 도중에 간호사분이 들어오시더니 다른 검사지를 주셨다. 실제로 이전의 2세트의 질문지보다 훨씬 다양한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아마 검사지와 나의 경우가 맞지 않기 때문이었나보다.


문장 완성 검사는 주관식 50문항인데 백문백답을 하는 기분이라 작성하는 내내 신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바로 떠오르는 대답이 이것밖에 없는데 의사 선생님이 혹여나 당황하시진 않을까 걱정까지 되었다.


8. 나는 [귀엽다]

22. 내가 없을때 친구들은 [알아서 잘 놀겠지?]

33. 내가 어렸을 때 [역시 귀여웠으나 잘난척을 좀 했다.]

34. 내가 다시 젊어진다면 [더 열심히 놀아야지]

35. 나의 능력은 [어디까지인가]


이런 대답을 써놓고 친구들에게 카톡을 보내면서 낄낄거리고 있는데 긴장되서 그런지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 혼자 낄낄거리면 정말 뭔가 나사 하나 풀린 사람 처럼 느껴질까봐 애써 웃음을 참았다.



의사선생님은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에 나오는 선생님처럼 포근하고 다정한 인상이었다.

선생님은 정신과 진료 경험이 한번도 없는 나에게 '왜 본인이 강박이라고 생각하세요?'라고 되물으셨다.


"손톱 거스러미를 뜯는게 심해서요."

"어렸을 땐 안그랬어요?"

"네. 원래도 안그랬는데 6개월 전에 여러가지 일들이 겹치면서 심해진 것 같아요."


선생님과 나의 대화는 질문과 답의 형식이었지만 그 모든 대화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보통 검사 결과가 50점 이상이 되어야 중증도 강박으로 판단하고 그에 따른 치료를 하게 되는데 나같은 경우에는 치료가 필요한 정도는 아니라고 하셨다. 게다가 검사 결과로 봤을 땐 우울이 1도 없단다.


대화 주제는 자연스럽게 '불안'으로 넘어갔다.


1. 늦은 밤 길에 나와 술취한 남자 둘 밖에 없을 때

2. 주인 없이 돌아다니는 동물을 발견했을 때


내가 제어하지 못하는 상황이거나 예측하지 못하는 것들에게서 많은 불안을 느끼는 편인데 술 취한 사람이나 동물이 나에게 가장 큰 불확실성을 주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이와 관련하여 트라우마가 될 수 있는 과거의 경험을 물어보셨는데 이상하리만큼 아무 경험이 없었다. 강아지를 키워본 적도, 술 취한 남자로부터 나쁜 경험을 한 적도.


상담은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이번엔 과거의 경험이 아닌 가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지랑 사이가 좋아요?"

"네"

"아버지가 왜 좋아요?"

"아빠요? 아빠는 다정하고 멋지고 절 항상 사랑해주시고..."


언제나 나를 공주라고 불러주시는 아버지와 유독 강한 유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항상 부모님 댁에서 내 집으로 돌아갈 때는 아무리 오래 걸려도 늘 데려다주셨다.

엄마에게 하지 못하는 비밀 이야기나 남자친구와 관련된 이야기들도 아버지께는 모두 다 할 수 있었다.  


"남자친구랑 오래 못가지 않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마치 연말이나 연초에 사주를 보러 갔는데 너무 소름돋게 딱딱 맞춰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그 기분을 여기에서 느낄 줄이야. 아주 예전에 신점을 재미삼아 보러 갔는데 '정신과 상담 받는다 생각하고 마음이 답답하면 그 때 한번씩 와~'라고 했던 무당 아줌마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세상 남자들이 아버지 같지 않음이 당연한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남자친구에게 쉽게 싫증내고 짜증을 낸다.

이성과의 관계에 있어서 신체적 나이가 성장하는 만큼 정신적 나이가 정상하지 못하고 어린 소녀의 마음에 머물러 있어 성적 욕구 또한 낮은 것이 연인 관계를 오래 지속하지 못하는 이유라고 하셨다. (소름)



의사 선생님은 약을 처방해주시지 않았다. 이렇다 할 문제가 있다고 말씀하시지도 않았다.

부모와 독립하여 사는 것이 무섭더라도 나에게 더 좋은 일이라고 지지해주셨고 많지 않은 나이에 여러가지 경험을 했음에도 그 경험들을 훌륭하게 풀어내어 자신의 자산으로 잘 만들어 가고 있다며 진심으로 칭찬해주셨다.


전혀 모르는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풀어내고 '잘 살고 있구나'라는 말 한 마디를 들었을 뿐인데 출근하는 지하철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평소 나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자기 검열이나 자기 반성이 심한 편인데 그동안 스스로 나를 참 못살게 굴었구나 또 다시 자책했다. (아무리 봐도 자책은 고질적인 습관이다.)


병원을 들어가는 발걸음은 마치 엄청 차가운 얼음을 손으로 집는 것처럼 나를 해치지 않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었다면 나오는 발걸음은 마치 사랑니를 뽑고 나온 것마냥 시원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원인을 알아야 한다. 더욱이 내 마음에서 비롯된 문제일 경우 여러가지 요인들이 복잡하게 얽혀있어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기 더 어렵다.


감기에 걸려 이비인후과 가는 것처럼 가볍게 생각하라고 하던데 아직까지도 나에게 정신과는 그정도로 가볍게 느껴지진 않는다. 다만 더 건강하고 긍정적인 마음을 위해서 오늘도 이렇게 스스로 노력하고 있구나하고 나를 칭찬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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