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바람, 바람

감기라면, 뱅쇼를 마셔야지요.

by 리아

바람이 이렇게 매서울 줄 알았더라면 나는 코트 대신 두꺼운 잠바를 챙겨 왔을 것이었다. 그저 우리나라보다는 따뜻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패딩 조끼만 겨우 욱여넣은 것이 실수였다. 그마저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비가 많이 왔고 비와 함께 불어 젖힌 겨울바람은 내 품을 파고들었다. 감기에 걸리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결국 지독한 감기에 걸렸고 그 감기는 한 달 내내 나를 괴롭혔다.


차라리 소주를 마셨더라면 금방 나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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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조차 들리지 않던 한국과 달리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나던 샹젤리제 거리.


온몸이 뜨거워지도록 독한 알코올을 부어 넣었더라면 좀 더 빨리 감기를 털고 일어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시방편으로 택한 것은 와인을 오래 끓여 알코올이 날아간 뱅쇼였다. 프랑스 사람들은 감기에 걸렸을 때 뱅쇼를 마신다고 했다. 여전히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나는 샹젤리제 거리에서 마침 뱅쇼를 팔았다. 뜨겁게 데운 뱅쇼는 수혈받은 피처럼 내 몸 구석구석을 돌았다. 감기는 결코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충분히 따뜻했다.



강바람을 맞으며 유람선을 탔다. 아마도 이게 화근이었을 것이다. 너무 빨리 흘러가는 파리의 밤이 아쉬워 야외인 2층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센 강에 비친 파리의 모든 불빛이 자꾸만 나를 밖으로 끌어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 목에 걸려있던 목도리였다. 이대로는 나가면 얼어 죽는다며 그녀가 매 준 목도리였다. 이 도시와 잠자리가 모두 낯설기만 해서 어쩔 줄을 모르던 내게 가장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었다. 체크인을 하고 멀뚱멀뚱 서 있는 내게 함께 점심을 먹자고 했다. 프랑스다운 첫 식사였다.

나의 첫 프랑스식 점심!

R이 그 숙소를 떠나는 날, 그녀의 목도리를 완전히 내게 건넸다.

여행이 끝날 때까지도 목도리는 내 목에 걸려 있었다. 그녀는 내 긴 여행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녀와는 파리를 떠나기 전날에도 식사를 함께 했다.

바람은 그런 것이었다. 살을 에는 바람은 더욱 그러했다. 낯선 이가 처음 보는 객에게도 손을 내밀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 그리하여 오래도록 인연을 이어가도록 하는 것. 바람의 역할은 사람을 이어주는 것이었다.



향기보다 냄새라는 단어가 더 와 닿는 이유는 어딘지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퇴근하고 돌아오는 아빠에게서 나는 냄새는 꼭 바람 냄새였다. 단지 집안의 후끈한 공기와 외부 공기가 달라서 맡을 수 있는 냄새가 아니었다. 바람 냄새는 세상 모든 것을 품고 있었다. 사람이 다닐 수 없는 아주 좁은 공간과 높은 하늘까지, 세상 모든 곳을 지나며 훔쳐 온 것들의 냄새였다. 바깥에 있다가 온 모든 사람에게 바람 냄새가 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살면서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온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그들에게 모두 바람 냄새가 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그 냄새를 묻혀 온 사람은, 오로지 아빠뿐이었다.

바토무슈에서 에펠탑을 볼 수 있다는 설렘을 안고! 아, 이것이야말로 진짜 파리의 겨울 바람 냄새구나.

잊고 지낸 바람 냄새를 다시 맡은 것은 여행지에서였다. 호스텔을 드나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그때보다 차가운 바람의 냄새가 났다. 까르네 한 장을 쥐여주며 갚지 않아도 된다고 말을 하는 한 친구와 메트로를 타기 위해 지하로 내려갔을 때, 뜨거운 바람 냄새를 맡았다. 바람 냄새는, 예쁜 사람의 체취가 세상과 만나 생기는 것이었다. 그 세상은 부양할 가족이 있는 자에게 치열하지만 꼭 필요한 현장일 수 있고, 배가 고픈 여행자에게 따뜻한 여행지일 수 있으며, 삶이 고단해 낯선 곳으로 도망친 자에게 집보다 더 안락한 쉼터일 수도 있었다.


해님과 바람의 경쟁에서 비록 바람이 졌지만, 나는 바람에게 많은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바람은 때로 내가 서 있는 이곳의 분위기가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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