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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아 Aug 17. 2018

가방을 싸는 일

여행의 시작은, 여행을 떠나고 싶은 욕망부터 가방을 싸는 행위까지다.

가방을 싸는 것으로 여행의 시작을 다 말할 수 없었다. 여행을 떠올리고 항공권을 끊어놓고 다가오는 여행 날짜를 손가락으로 세어가며 기다리다가 마침내 한, 일주일 전부터는 가방을 싸는 것. 이 모든 과정들이 여행의 시작이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했다. 시작은 그저 시작일 뿐이고 내가 정의하는 시작과 당신이 정의하는 시작은 다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여행에서만큼은 시작을 내 식대로 정의해보기로 했다.


여행을 떠나고 싶은 욕망부터 가방을 싸는 행위.


그것이 나의 여행에 있어서 시작이었다.

자주 떠나는 사람들은 짐을 꾸릴 때에도 간소하게 준비하는 것 같았다. 적어도 내가 아는 베테랑 여행자는 그랬다. 누군가의 여행 가방이 궁금해진 것도 그 사람 때문이었다. 언젠가 그의 여행 가방에서 그의 숨이 밴 여행 용품들을 꺼내볼 수 있는 날이 올까. 아마 그때가 되면 나의 여행 가방 속도 어느 누군가는 궁금해질 수도 있겠다. 그때 가방을 활짝 열어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 안에 있던 가장 소중한 것을 꺼내어 기꺼이 당신의 손에 쥐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가방 싸는 일만큼 설레는 것, 공항 가는 길. 곧 탑승할 비행기를 기다리는 일.


생애 처음으로 오래 떠나보자 마음먹은 날, 우리나라는 한겨울이었다. 유독 추웠다. 오래도록 곁에 있던 사람이 눈 깜짝할 새에 곁에서 사라진 탓일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더 추위에 떨어야 봄이 올까 싶었다. 사실 그 순간, 영영 봄이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한국에는 말이다. 떠날 수 있는 좋은 핑곗거리가 될 것 같았다. 날씨 어플을 통해 내가 닿을 곳의 날씨를 살폈다. 다행인 것은 변변치 않은 패딩 하나 없던 내가 겨울을 보낼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이었다. 짐을 쌀 때에 내게 가장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다름 아닌 날씨였다. 혹시 모르니 패딩 조끼라도 넣어볼까 하여, 결국 가득 채운 트렁크 양면 사이에 그것을 욱여넣었다. 완충제 역할을 해서 그 속의 어떤 물건들도 상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도 함께 끼워 넣었다. 결코 여유로울 수 없던 내 마음처럼 트렁크는 나의 겨우살이 옷가지들을 빈틈없이 채운 채로 비행기에 실렸다.

비행기 탑승은 '이미 시작된 여행'이다.

지금은 결코 한 달을 장기 여행으로 생각하지 않지만, 그즈음에는 엄청난 결심이었다. 한 달이라니. 나에게는 살 집과 먹을 양식, 그리고 언제든 따뜻한 손을 내밀어 줄 가족들이 있는데. 한 달이나 그 모든 것들이 없는 곳으로 떠나려 했다. 혼자 일어서는 법을 이제야 배울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의 끝에는 아주 조금 혹여 IS가 납치를 한다거나 그들이 벌이는 테러로 인한 동양인 희생자가 되면 어찌하나 싶은 터무니없는 상상도 했다. 짧은 여행을 위해 싸던 짐을 세어보고 꼭 필요한 것으로 '짧은 여행용 패키지'를 싸는 이유이기도 했다. 경유도 작은 짐을 싸는 하나의 이유였다. 물론 다행스럽게도 나는 내 여행의 전부가 담긴 트렁크를 분실한 적도 납치를 당한 적도 빼앗긴 적도 없다. 그렇지만 짧은 여행을 자주 다니면서 생긴 짐 싸기의 노하우는 분명 그런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내가 정신을 놓지 않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자신한다.


인생도 일종의 여러 방법의 여행 가방 싸기와 같다. 살면서 필요한 것과 필요할 것, 그리고 원하는 것을 모두 안고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상황에 맞게 혹은 누구와 함께 가느냐에 따라 가방 속 물건들이 달라지는 것처럼, 매 순간 우리는 다른 짐을 싼다. 인간의 뇌에도 용량이 있듯 우리 마음에도 분명 어떠한 것을 어떤 사람을 담아낼 수 있는 양이 정해져 있을 것이다. 다만 트렁크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당신은 그리고 우리는 마음의 크기를 나름대로 늘이기도 줄이기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말이 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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