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과 준우 이야기
초여름의 신부가 되고 싶었다. 예비 신부들이 가장 원하는 계절인 봄, 특히 오월이 아니라는 것에 나는 준우가 고마워하기만을 바랐다. 오월은 예식장 잡기도 가장 어려울 뿐 아니라 식장 대여 비용 또한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초여름이든 봄이든 언제가 되어도 상관없다고 했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말이 나에게는 상처가 되었다. 여자는 그랬다. 어쩌면 생애 단 한 번뿐일지도 모를 결혼식을 원하는 날로 정한다는 것은 로망 중 하나였다. 나는 성대한 결혼식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단 하나, 계절과 장소만은 중요했다.
"초여름, 6월이면 좋겠어. 녹빛이 짙은 어느 공원에서."
예식장이 아닌 공원이라는 말에 핸드폰만 보던 준우는 나를 쳐다보았다. 뜬금없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런 그를 보고 한 번 싱긋 웃은 후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예식장이 낫지 않나?"
그의 눈빛을 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었지만, 내 정수리에 꽂히는 그의 시선이 따갑도록 느껴졌다. 한없이 따뜻했던 목소리와는 매우 달랐다. 결혼 이야기만 나오면 늘 그는 목소리를 깔고 말을 했다. 처음에는 그런 모습이 진중해 보였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다. 그는 싫어하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늘 낮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 자신이 싫어하는 것에 대해 티를 내는 그를 보면서 나의 사랑도 식었음을 느꼈다. 이제 그 중저음의 목소리가 몸서리칠 정도로 싫어졌다.
"결혼식만큼은 내가 원하는 곳에서 하고 싶어."
나도 모르게 숟가락을 탁, 소리 나도록 내려놓고는 놀라 한숨을 내쉰 뒤 말을 이었다.
"6월이면 그렇게 덥지도 않을 거야. 어른들 모셔놓고 아무렴 내가 뙤약볕에서 결혼하자고 하겠어? 그리고 짧고 간단하게. 주례 없이, 오빠 친구한테 사회 봐 달라고 하고. 축가는, 오빠랑 내가 하면 되지, 서로 이쁘게."
"엄마랑 이야기해보자."
그의 대답은 너무도 단순했다. 마치 너는 엄마가 없으니 우리 엄마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듯 우리 사이의 중요한 일은 모두 그의 ‘엄마’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싫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내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자격지심이었다. 욕심이기도 했다. 그의 엄마를 보고 나니 더욱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미 결혼한 누나는 출가외인이었기에 그의 엄마는 오로지 아들만 바라보는 것 같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세상 그 어떤 엄마 못지않았다. 그리고 그런 아들이 사랑하는 여자를 집으로 데리고 왔을 때 그녀는 아들만큼 나를 예뻐해 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다지 ‘싹싹하고 살가운 젊은 처자’가 되지 못했고 그의 엄마에게 진심을 보이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늘 그의 집을 찾았을 때 준우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다그쳤기에 나의 소심함은 더욱 커졌다. 엄마가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과 원망이 살면서 처음 마음속에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
내심 혼자 미안함이 들었는지 그는 설거지를 자처했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커피 물을 끓였다. 내게 가장 작은 행복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식후 커피 한 잔이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물론 식후에 마시는 커피는 믹스 커피였다. 환경을 생각할 틈도 없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종이컵에 믹스 커피 가루를 부었다. 식당에서나 먹을 법한 종이컵 용 믹스 커피만이 행복을 채워줄 수 있었다.
근데 자기는 정말 부를 사람이 아무도 없어, 가족 중에?
설거지를 하며 아무렇지 않게 그가 물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화제였다. 가족이 없다는 것은 어느 누군가에게는 편한 일일지 모르겠지만 결혼을 생각하는 나에게는 걸림돌이었다. 2년 가까이 연애를 하면서 그가 말을 꺼낼 때마다 피한 이유이기도 했다. 아무리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어른들이더라도 막상 당신 자식이 부모 없이 자란 여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하면, 모른 척 다른 핑계를 대더라도 말리기 때문이었다. 그가 좋았던 것은, 아니 어쩌면 그의 부모를 좋아했던 것은, 정말이지 ‘부모 없이 자란 여자’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어서였다. 1년 6개월 즈음, 그와의 권태기가 눈으로 보이기 시작할 때 나의 마음을 잡아준 것 역시 그의 부모였다.
"없어. 새삼 무슨."
커피 포트에서 딸깍 소리가 났다. 아주 짧은 침묵조차 견디기가 힘들었던 나는 서둘러 끓는 물을 종이컵에 부었다. 물 따르는 소리가 겨우 나의 마음을 잠재웠다.
"그래. 알겠어."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설거지를 마친 후 소파에 드러누운 그에게 커피를 건넸다. 그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커피를 받아 들었다. 그의 행동에 내가 생각이 짧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느 직장인처럼 일주일에 오일을 지겹도록 믹스 커피만 마셨을 그에게 나는 또 회사와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종이컵 커피를 내놓은 것이었다. 그와는 달리 카페에서 일을 하고 있는 나는 이토록 편하고 맛있는 종이컵 믹스 커피가 좋았다. 이것이 우리의, 어쩌면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미안해."
나도 모르게 나지막이 그에게 사과를 했다. 그게 어떤 것이든 당신의 취향을 존중한다던 나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래서 내뱉은 사과는 그 누구에게도 큰 감흥이 없을 테지만, 나는 사과를 건넸다. 그는 나의 사과에 싱긋 웃어 보일 뿐이었다. 저 미소마저도 예뻐 보이지 않을 때가 올까. 갑자기 두려워졌다.
우리의 만남은 꽤나 영화와도 같았다. 아는 언니의 부탁으로 쉬고 있던 찰나에 잠시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는 카페에서 두어 달 정도 일을 봐주기로 했다. 직장인들이 많아 점심시간에만 바쁠 거라는 그녀의 말에 흔쾌히 승낙을 했다. 카페는 큰 금융 회사 건물의 지하에 있었다. 한때 로망이었던, 멋진 정장을 입은 남자들을 마음껏 볼 수 있다는 환상에 첫 출근 전날은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첫 출근 날, 나답지 않게 실수가 잦았고 나는 그 날의 마지막 손님이었던 그에게 주문과 다른 음료를 내어 주고 말았다. 그는 당연히 아무 생각 없이 음료를 받아 들고 한 모금 쭉 마셨다. 그리고는 바로 입에 넣었던 그 음료를 다시 입 밖으로 내뿜었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 웃음이 터졌고 잠시 후 이 난처한 상황의 시작은 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시나몬 라떼, 맞아요?
옆에 서 있던 한 동료에게 휴지를 받아 들어 와이셔츠를 닦으며 그가 내게 물었다. 그가 시나몬 라떼를 주문했던가. 갑작스레 나에게 질문을 한 그 때문에 당황하여 내 머릿속은 백지가 되었다. 그가 뿜어낸 음료는 대체 무엇이었는지, 나는 여전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는 나에게 보상 같은 것 되었으니 그저 연락처만 달라고 요구했다. 그것이 그가 내게 건넨 고백이었다.
그는 첫눈에 반하는 것을 믿지 않았다고 했다. 그가 첫눈에 반한다는 것은 곧 운명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런 그가 나의 첫 출근 날 나에게 왔고 나는 그런 그를 웃으며 받아들였다. 우리가 만난 것은 어쩌면 운명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때에, 그에게는 적어도 그러했다.